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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시작하며 문화 현상으로서의 기부 1부 순수한 기부는 없다 모스와 「기부론」 ‘총체적인 사회현상’으로서의 기부 고귀한 지출 2부 기부는 순수해야 한다 제한경제와 일반경제 끊임없는 위반과 정상의 윤리 제한경제에 다시 포획되는 기부 3부 이중구속으로서의 기부 비경제적 행위로서의 기부 기부 행위의 성립 조건 기부와 교환의 병존 보들레르의 산문시 「가짜 화폐」 아브라함과 이삭의 일화 4부 익명의 기부 사르트르와 기부 부정적 의미를 가진 기부 「벽」, 수혜자와 굴복 긍정적 의미를 가진 기부 글을 쓴다는 것은 주는 것이다 익명의 기부를 위하여 마치며 아름다움의 지수를 높이자 미주 참고문헌 더 읽어볼 만한 책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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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마르셀 모스
「기부론」이 집필된 1920년대 초반은 서구에서 자본주의가 급속도로 발전하던 시기였다. 프랑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시기에 모스는 인간의 도덕적 감성 타락에 상당한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 그러니까 자본주의가 급속도로 발전한 사회에서 인간 행위의 대부분은 전적으로 ‘경제적 이성’에 의해 지배되는 경향을 보였으며, 그 결과 사람들의 관계는 교환가치에 매몰되어 점점 더 피폐해지는 상황이었다. 요컨대 인간들이 점차 ‘계산기’만을 두드리는 ‘경제 동물’이 되어가고 있다고 모스는 진단했던 것이다. 모스는 이러한 상황을 절망적으로 규정하고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모색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그는 일부 고대사회에서 널리 행해졌던 하나의 행위에 주목하게 된다. 외적으로 보아서는 경제적 이성의 지배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이는 행위, 바로 기부 행위가 그것이다. 인류학자였던 모스는 기부 행위의 기원을 원시시대 포틀래치 풍습에서 찾았다. 결혼식이나 장례식에서 식사를 대접하는 것 역시 우리에게 남아 있는 포틀래치 풍습이다. 이렇듯 그는 나누는 행위에는 답례가 전제되어 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세 가지 의무가 있는데, 주어야 하는 의무, 받아야 하는 의무, 그리고 답례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인데 원시 사회의 종교적, 법적, 경제적, 신화적 측면들이 모두 어우러진 ‘총체적인 사회현상’으로 고찰한 기부론은 매우 흥미롭다. ※ 2. 조르주 바타유 요컨대 바타유에게 있어서 에로티시즘은 인간의 죽음에 대한 인식과 그 궤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정확히 이와 같은 의미에서 에로티시즘은 그 자체로 소비 개념을 중심으로 정립된 바타유의 일반경제와도 무관하지 않다. 왜냐하면 결국 에로티시즘에 참여하는 쌍방의 주체는 서로가 서로를 위해 자기를 ‘내어줌으로써’ 원하는 황홀감을 느끼고자 하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자기를 완전히 ‘내어주는’ 행위가 곧 ‘기부 행위’이고 ‘소비 행위’ 아니겠는가? 게다가 이렇게 이해된 에로티시즘은 ‘금기’와 ‘위반’ 혹은 ‘전복’으로 요약되는 바타유의 정상의 윤리가 구현되는 인간 행동의 가장 중요한 영역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 지금까지 살펴본 바타유의 사유, 그 가운데서도 특히 정상의 윤리는 『저주받은 몫』을 통해 확인되는 바타유의 기부론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바타유는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순수 기부, 즉 완전히 자발적이고 비경제적인 기부를 겨냥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기부자는 과연 자신의 기부에서 이와 같은 극한의 경지를 체험할 수 있을까? 이는 매우 의미심장한 질문이다. 사실 이 질문이야말로 바타유의 기부론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타유의 정상의 윤리는 더 높은, 아니 가장 높은 산에 오르려는 등산가에 비유할 수 있다. 극한을 체험하고자 하는 인간의 염원.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삶에 긍정적 가치를 부여하려는 노력으로 요약된다고 한다. 바타유는 원시사회의 ‘제한경제’에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일반경제’를 대비시킨다. 경제 중심이 ‘생산’에서 ‘소비’로 전환되었으며 인류는 본격적으로 재화를 축적하게 되고 이때부터 전쟁, 축제, 도박, 예술 등 대규모 소비가 수시로 행해졌다고 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그런데 금이 고귀한 빛을 발하듯, 주권적 개인은(자율적이고, 외적은 환경에 거리를 둘 수 있고, 책임을 질 수 있는) 신과 같은 변제 불가능한 베풂을 행할 수 있는데 이로써 맛보게 되는 지고의 황홀감이 순수한 기부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 3. 자크 데리다 기부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기부 수혜자나 기부자가 기부를 기부로 지각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기부를 의식하거나 기억하지도 말고 또한 그것을 인정하지도 말아야 한다. 더 나아가서는 기부를 망각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 망각은 망각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범주를 넘어설 정도로 철저해야 한다. 데리다는 앞서 설명된 바타유의 순수 기부 행위를 일종의 광기에 비유한다. 불가능한 것을 실천에 옮기려는 행위와 같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려는 행위는 순수한 기부 행위라기보다는 광기에 불과하지만 그가 행위를 포기하고 멈추었을 때 비로소 행위의 순수성이 드러남과 같은 맥락으로 설명된다. 즉 남에게 보이기 위해 하는 행동이 아니라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은밀함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이러한 일이 일상에서도 가능한가 하는 점에 대해 데리다는 끝까지 침묵했다고 한다. ※ 4. 장 폴 사르트르 기부에 대한 사르트르의 관심은 이른바 ‘췀명의 기부’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데리다의 사유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완벽한 익명 기부의 실천 가능성을 보았다. 그러니까 타인도 모르고 심지어는 행위 당사자인 기부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루어지는 기부, 즉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는 기부가 실행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데리다는 이와 같은 실천 가능성을 하나님의 절대명령에 복종하면서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존재인 이삭을 하나님에게 바치려 했던 아브라함의 행동을 통해서 제시했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아브라함의 번제와 같은 행위가 일상생활에서도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자유롭지 않을 자유가 없는 것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놓여날 자유가 없다고 사르트르는 말했다. 즉 끊임없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곧 ‘타자’이며, 결국 나를 객체화시키고 무력화시키는 “타자는 지옥”일 수 있다. 특히 기부 행위와 관련하여, 무엇인가를 가진 나를 쳐다보는 갖지 못한 자의 시선, 그리고 그 시선을 인식해야하는 나. 동시에 내가 그에게 무엇을 주었을 때 그것을 받으며 쳐다보는 그의 시선은 공개적인 기부 행위의 부정적 측면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사르트르는 기부 행위자와 기부 수혜자의 관계를 ‘나’와 ‘타자’의 관계로 보고 가장 이상적인 것은 ‘익명성’에 있다고 주장했다. 실천방향은 이상적이나 여전히 구체적 방안은 숙제로 남겨놓았지만 말이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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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같이 없어질 동시대 사람들과 좀 더 의미 있고
건강한 가치를 지켜가면서 살아가다가 ‘별 너머의 먼지’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 생각한다” 지난 11월 14일 안철수 원장이 사재 1700억 원을 전격 사회환원한다고 밝히자 이러한 행보의 진의를 묻기 위해 달려온 기자들에게 그가 한 말이다. 이와 관련하여 안철수연구소 측은 ‘지금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사회공헌이 선택이 아닌 필수’인 시대라며 ‘안철수연구소가 창립 이래 지속적으로 전개해 온 사회공헌 활동이 일상화될 수 있도록 우리의 독창적 노하우와 혁신성을 접목한 사회공헌 프로그램으로 나눔과 기부 문화를 선도해나갈 것이며 아울러 우리 사회에 나눔과 기부 문화가 확산돼 함께 살아가는 사회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입장을 밝혔다. 안 원장의 이른바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실천에 수많은 시민들이 감동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지난 서울시장 선거 이후 잠시 수그러들었던 ‘신당 창당’설, 내년 4월 총선을 겨냥한 ‘강남 출마설’ 등의 의혹들이 제기되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이러한 통 큰 기부를 순수하게 보지 않으려는 입장도 분명 있는 것 같다. 우리에게 대표적인 기부천사로 익숙한 가수 김장훈 씨는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 기부를 한다고 말해왔는데, 안원장의 사회환원 발표가 있던 날 어떤 이는 다음 아고라에서 안원장의 기부보다 김장훈의 기부가 100배 더 ‘순수하다’고 말했다. 기부란 무엇이며 또 기부는 반드시 순수해야 하는가? 기부는 실천하면 그만이지 기부가 무엇인지 꼭 알아야 하냐고 묻는다면 할 수 없지만, 혹시라도 기부의 기원이나 기부행위의 본질 등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은 유의미한 재미를 줄 것이다. 통계청이 2011년 11월에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 중 36.4%가 기부에 참여하고 있고, 1년간 기부 횟수가 6.1회, 1인당 기부 현금이 16만 7,000원에 달한다(본문 18쪽 이하)고 하니, 이제 기부 행위 자체는 이미 그 다양성과 함께 우리의 일상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평생을 어려운 생활 여건 속에서 김밥을 팔아 모은 돈 수억 원을 기부했다거나, 어떤 평범한 시민이 구세군 냄비에 1억 원짜리 수표를 넣고 사라졌다는 소식이 아직 기삿거리가 될 정도로 우리에게 놀라움을 안겨주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사람들은 보통 기부를 할 때 그것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따져 묻고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당연히 그 행위의 실천 자체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부를 할 뿐이다. 그러나 기부를 하는 사람의 심리 상태라던가 기부 사실의 공개 여부에 대한 가치, 그리고 동시에 기부를 받는 사람의 감정이나 그들이 느낄 수 있는 부담감 등에 대해 하나씩 따져 본다면 ‘기부’라는 행위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것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저 실천함을 넘어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할 시간을 갖게 된다. 도대체 기부란 무엇인가? 이 책에 소개될 20세기를 대표하는 네 명의 지성인은 기부, 특히 ‘기부의 순수성’에 관심을 가졌다. 각기 다른 입장을 견지하고 있지만 사실상 이들의 주요 관심사는 기부라는 행위로 연결된 ‘나’와 ‘타인’의 관계에 대한 흥미로운 고찰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