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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건강한 슬픔
흔적 몸살 가마우지 덫 밥의 그늘 건강한 슬픔 산수유 마을에 갔습니다 꽃무늬 벽지 여인숙 신발의 꿈 봄밤 중언부언의 날들 불타는 트럭 유리병 편지 살다 보면 비가 오는 날도 있다 데자뷰 말뚝 디아스포라 여고 괴담 날짜변경선 단풍 바닥 지긋지긋이 지극하다 울음 음치교정교실 2부 이명의 깊이 음악 사람의 그늘 이명의 깊이 가장 이른 깨달음 이불 역전 광장의 비둘기 바람의 정거장 사랑니 이름의 기원 무릎 봄날 저녁의 우주 울음 불 꺼진 창 관계 국물 금 위에서 서성거리다 거울 TV 표정 물웅덩이 立夏 아우라 환승역 능소화 3부 이 골목의 너무 많은 모퉁이 장독 조립식 비닐옷장 팽나무 가족사 텃밭 깊이 기피 영원의 그늘 이사 방울토마토 기르기 얼음 연못 이 골목의 너무 많은 모퉁이 1 이 골목의 너무 많은 모퉁이 2 꿈 제5원소 물고기 화석 돌절구 聖 일요일 쑥밭에서 벽 틈 덩어리 골목 빅뱅 해설 ‘아우라’의 글쓰기, ‘사이’의 존재론 · 이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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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슬픔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랜만이라는 안부를 건넬 틈도 없이 그녀는 문득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그저 침묵했다 한때 그녀가 꿈꾸었던 사람이 있었다 나는 아니었다 나도 그때 한 여자를 원했었다 그녀는 아니었다 그 정도 아는 사이였던 그녀와 나는 그 정도 사이였기에 오래 연락이 없었다 아무 데도 가지 않았는데 서로 멀리 있었다 전화 저쪽에서 그녀는 오래 울었다 이쪽에서 나는 늦도록 침묵했다 창문 밖에서 귓바퀴를 쫑긋 세운 나뭇잎들이 머리통을 맞댄 채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럴 때 나뭇잎은 나뭇잎끼리 참 내밀해 보였다 저렇게 귀 기울인 나뭇잎과 나뭇잎 사이로 바람과 강물과 세월이 흘러가는 것이리라 그녀의 울음과 내 침묵 사이로도 바람과 강물과 세월은 또 흘러갈 것이었다 〉 그동안을 견딘다는 것에 대해 그녀와 나는 무척 긴 얘기를 나눈 것 같았다 아니 그녀나 나나 아무 얘기도 없이 다만 나뭇잎과 나뭇잎처럼 귀 기울였을 뿐이었다 분명한 사실은 그녀가 나보다는 건강하다는 것 누군가에게 스스럼없이 울음을 건넬 수 있다는 것 슬픔에도 건강이 있다 그녀는 이윽고 전화를 끊었다 그제서야 나는 혼자 깊숙이 울었다 --- p.20~21 불 꺼진 창 마음에 불 꺼진 창이 있었다 나는 늘 밖에서 어둡게 서성거렸다 그리고 누군가 내 안에서 불 끄고 우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는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연애는 언제나 깜깜했으나 돌이켜보면 그래서 결국 환했다 나를 서성거리게 할 누군가를 내 안에 남겨둔다는 것 그것을 알기까지 오랜 세월이 흘렀을 뿐 그동안 아프게 늙었을 뿐 언제라도 만나고 싶어 간절했으나 막상 창을 열고 불을 켜면 텅 비어 있을 것만 같아 두려웠다 불 꺼진 창이 켜놓은 연애가 환하려면 불 꺼진 창을 불 꺼진 창으로 남겨둘 것 밖에서 오래오래 서성거릴 것 열지 말 것 마음에 불 꺼진 창이 있었다 --- p.80~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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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모퉁이에서 가만히 짚어보는 흔적의 미학
마지막에 그가 노래한 대로, 점점 멀어지는 빅뱅 속의 우주처럼, 우리는 점점 더 외로워질 것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다만 두려워하거나 거부하지 않겠다. 오래 침묵하며 오래 모순 덩어리를 그냥 안고 살아온 덜떨어진 이의 마지막 자존심이다. 이 시집 속에서 헤아려주는, 외로워도 울지 않는 길을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고운기·시인 부분을 정성으로 매만진 사람은 저도 몰래 전체를 돌보게 되는 것인가. 그래서 이 책에선 버릴 말을 찾기가 어렵다. 한 권의 시집은 한 편의 시 같고, 한 편들은 어쩌면 격렬한 정신의 ‘헬스’를 거친 한 줄들 같다. 이렇게 되기까지 그는, 강산이 변하도록, 얼마나 많은 말들을 품었다가는 내려놓아야 했을까. ―이영광·시인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2001) 이후 11년 만에 강연호 시인의 네 번째 시집 『기억의 못갖춘마디』가 문예중앙시선(015)으로 출간되었다. 지난 세 권의 시집에 이어 이번 시집에서도 시인은 일상의 삶이 품은 비애를 가만히 추적하며 슬픔과 허무의 맥을 짚어나간다. 특히 이번 시집은 깊은 곳에서 오랫동안 우려낸 듯한 정서를 시 곳곳에 품고 있다. “골목의 너무 많은 모퉁이”에서 “오래 서성”이며 “불 꺼진 방”들이 품고 있는 “깊은 표정”을 읽고자(「시인의 말」) 하는 마음으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적당한 온도에 적당한 습기를 머금고 있는 시어들은 행과 행 사이에 안온하게 깃들어 있어 몇 번이고 곱씹어 읽게 하는 힘을 지녔다. 그 안에서 때로는 엄살 같기도 하고 투정 같기도 한 나직한 외침들이 끝내 지순한 슬픔으로 변모해가는 서정적인 체험을 가능케 하기에, 그의 시는 읽는 이의 마음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킨다. 매번 다시 살아나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그것 추워서 뜨거웠고 어두워서 환했던 기억이 있다, 그 불량의 시절인 듯 연탄불처럼 다시 층층 포개지고 싶다 포개져 마침내 화르륵 타오르는 체위이고 싶다 ―「몸살」 부분 시간을 품고 있는 모든 것이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은, “흔적”과 “얼룩”과 “금”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집, 기억의 기록과 같은 이 시편들이 품고 있는 “흔적”의 미학 또한 여기서 출발한다. 해설을 붙인 이찬 문학평론가는 「몸살」에 부쳐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몸살’이란 결국 ‘그 기억에 살이 낀 것’, ‘그 기억’이 모두 쓸어안을 수 없기에 ‘혼자 열없이 열 오른 것’, 시인의 마음결에 가라앉은 어떤 ‘흔적’과 ‘얼룩’과 ‘금’에서 솟아오른 것이다.”(이찬 해설, 「‘아우라’의 글쓰기, ‘사이’의 존재론」) 낱낱의 기억들이 현재로 소환될 때마다 새로운 화학반응들이 일어난다. 그것은 한바탕 “울음”으로 해소되기도 하고, 끈질긴 “침묵”으로 수렴하기도 하며, 때로는 한숨으로 때로는 또 다른 질문으로 이어진다. 문득 나 역시 늘 도망치며 살았다는 생각 사람을 피해 떠돌았다는 생각 이제 누군가를 만나면 내가 이민족 같다 연변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몽골인지 혹은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방글라데시인지 사방팔방 북상과 남하의 갈림길에서 잠시 지쳐 머물다가 다시 떠날 채비에 분주한 철새 같다 ―「디아스포라」 부분 시간의 깊이와 그 얼룩덜룩한 감각의 질감들을 현재의 시간으로 되살려내려는 시인의 기투는 ‘회감’의 처연한 울림에 머물지 않고, ‘차이’, ‘타자’, ‘소수자’, ‘정치시’ 등과 같은 말로 호명되었던 최근 한국문학의 흐름에 합류할 수 있는 예술적 짜임새를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크게 두 갈래의 흐름으로 이 시집을 관통한다. 하나는, 시인의 가슴속에서 새어나오는 ‘허무주의’의 리듬감을 지닌 시편들이며, 다른 하나는 시인의 자아분열감-시인이 획득한 여유와 지혜를 엿보게 하는-을 돋을새김의 문양으로 펼쳐낸 시편들이다. 이는 “이 생에서 디아스포라 아닌 자/어디 한번 나와 보라고 해/먼저 돌을 던지라고 해”(「디아스포라」),“나는 짐짓 지구본마냥 고개 기울여/늘어난 얼굴들을 빤히 쳐다보며 묻지, 누구시더라?”(「데자뷰」)와 같은 구절들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이 두 개의 굵은 줄기는 시인이 지닌 성찰의 힘을 통해 “깊이의 리얼리즘”으로 번져나간다. 꺼이꺼이 불러 봐야 우주는 서로 멀어지고 우리는 점점 더 외로워질 것이다 지금 당장 이웃을 사귀어야 하는 이유다 ―「빅뱅」 부분 늘 “금 위에서 머물고팠다”고 고백하는(「금 위에서 서성거리다」), 어린 방울토마토의 “저 가엾은 연초록을 어떻게 잘라낼까” 망설이는(「방울토마토 기르기」) 데서 드러나는 모질지 못한 시인의 마음은 시가 발원한 그 깊이, 시가 지닌 여린 속살을 짐작게 한다. 삶 속 세밀한 풍경?을 보듬는 마음에서부터 먼 우주에 흩어지는 외로움 외침에까지 귀 기울이고자 한 시편들은 우리 삶 속에서 피어나는 감정의 스펙트럼을 다른 빛깔들로 촘촘히 수놓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