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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인문학의 위기와 위기의 글쓰기 / 김진균 21세기 기술 선택적 융합과 새로운 계몽 / 김연순 통합 교육으로서의 미래 인문학 / 김종규 디지털 시대의 인간 조건과 삶으로서의 문학 공부 / 임형택 탐미의 시대에 미를 되새김하다 / 안상원 그런 것도 연구거리가 되나요? / 이정민 2부 영화로 마주하는 퀘벡 인문학 / 박희태 러시아의 대학과 고등교육 제도 변천 개요와 글쓰기 능력의 중요성 / 최정현 근대 영국 문학의 등장과 여행 문학 / 김순배 인문학과 ‘재현’의 욕망 / 김화임 색을 통해 알아보는 중국 문화 / 윤애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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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진부한 말이 되어버린 ‘인문학의 위기’를 넘어
인간의 조건을 묻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답하는 본연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 이 시대의 인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가에 대한 제언과, 새로운 인문(人文)이 추구되고 실험되는 현장들에 대한 생생한 보고가 담긴 12편의 비평적 에세이. “나는 이 애처로운 학문을 통해 내 친구에게 무엇인가를 바치고자 한다. 이 학문과 관계된 영역은 아주 오래 전에는 철학의 본령으로 간주되었지만, 철학이 방법론으로 변화된 이후에는 지성인에 의해 경시되거나 단순하게 임의적으로 다루어졌고, 마침내 잊히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올바른 삶을 가르치는 학설과 관계된 영역이다.”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 아도로노의 위의 말은 오래 전 한국어로 번역된 그의 에세이집 『한줌의 도덕(원제; Minima Moralia)』 앞장에 자신의 학문적 동지 호르크하이머에게 주는 헌사의 첫 마디이다. 아도르노가 ‘애처로운 학문’, 혹은 ‘슬픈 학문’이라고 부른 이 학문에 이름을 붙인다면 무엇이 될까. 여기서는 일단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애처롭고 왜소한 모습으로 변모해 버린 ‘인문학’이라고 지칭해 보도록 하자. 그렇다면 이 학문은 어째서 슬프고 애처로운 처지로 내몰리게 되었을까. 그 답 또한 아도르노의 위의 말 속에 담겨 있다. 본디 철학의 본령이었던 이 학문이 ‘방법론(도구)’로 변화(강등 내지 전락)하여 올바른 삶을 가르치는 학설이 더 이상 못 되게 된 데 그 원인이 있다. 아도르노의 표현에 따르면, 그러한 학문은 한마디로 “물질적 생산 과정의 부록”으로 변질된 학문이다. 그리하여 자율성을 잃어버리게 된 이 학문의 주체들은 “한탄”이나 늘어놓으며 자신의 존재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그 결과 기꺼이 세계 진행 법칙의 충족 조건이 되고자 한다. 다시 아도르노에 따르면, 이 학문(인문학)의 생명은 “헤겔식 방식에 대항하면서 동시에 헤겔 사유의 필연적 결과 속에서” 획득한 ‘부정성(!)’에서 오는 것이었다. “이 정신은 부정적인 것을 직시하면서, 부정적인 것에 머무르면서만 힘으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부정성=비판정신’을 상실한 이 학문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혹시 서점의 인문학 코너를 서성이거나, 아니면 정부나 기업인이 마이크를 잡고 훈계하는 ‘인문 콘서트’의 현장에 앉아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건 아닐까. 『인문학과 인문 교육』의 첫 글인 국문학자 김진균의 에세이 「인문학의 위기와 위기의 글쓰기」는 아도르노의 위의 헌사의 울림과 맞닿아 있다. 그는 1996년과 2001년에 이어 2006년 인문대 학장들이 모여 발표한 ‘오늘의 인문학을 위한 우리의 제언’이란 선언을 상기시키며, 인문학 위기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으며 정부 예산 지원을 호소한 그러한 태도가 결국 자율성 상실을 더욱 부추기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말았다고 단언한다. 그것은 어쩌면 ‘문·사·철’의 높은 지위에 자신을 올려놓고는 현실적 삶에 가닿는 수사학과 언어학 등 인문이 실재에서 수행되는 경로는 외면한 고담준론의 인문학이 위기 앞에서 스스로 반성하는 태도마저 저버린 불가피한 결과이다. 스스로에 대한 노여움이 느껴지지 않는 인문학에 동시대 사람들이 여전히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는 인문학 위기를 ‘위기의 글쓰기’를 통해 돌파하자고 제안한다. 그리고 이는 “사람의 무늬로서 인문의 학을 다시 세우고, 사람의 무늬를 지우려는 불인(不仁)의 사회에 고함을 지르는 일에서부터 출발”한다. 아도르노가 말했듯이, 개인적 존재를 은밀히 규정하고 있는 객관적 권력들에 대한 비판정신을 상실한 채 삶에 대한 이러저러한 방도를 가르치려 드는 이른바 ‘시장 인문학’은 “더 이상 인간다운 삶이 ‘영위’될 수 없다는 사실을 기만하는 이데올로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가 또 하나의 고담준론에 불과하다고 느껴지면 서점의 인문학 서가에라도 가볼 일이다. 거기서 ‘고함’이 아니라 ‘비명’이라도 지르자는 제안으로 『인문학과 인문 교육』은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테크놀로지가 인간을 지배하게 된 ‘포스트 휴먼’ 시대에 기계의 지배를 필연으로 간주하는 ‘새로운 계몽’에 저항하는 ‘계몽의 변증법’을 구상해 보려는 글(김연순, 「21세기 기술 선택적 융합과 새로운 계몽」)이나 4차 산업혁명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기술혁명의 시대에 대응하는 ‘미래 인문학’을 구성해 보려는 글(김종규, 「통합 교육으로서의 미래 인문학」), 그리고 디지털 시대에 문학 공부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제언하는 글(임형택, 「디지털 시대의 인간 조건과 삶으로서의 문학 공부」) 역시도 도구적 이성에 저항하면서 인간적 삶의 가능성을 탐색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노력이다. 인문적 비평 에세이로 탁월한 안상원(「탐미의 시대에 미를 되새김하다」)과 김화임(「인문학과 ‘재현’의 욕망」)의 글은 미학과 문학으로 나뉠 수 있음에도 미 인식과 감각을 가늠하거나 글쓰기에 담긴 욕망을 분석하는 일이 인간적 삶을 공허로 몰아가는 세계에 저항하는 것임을 심층에서 해명하는 작업에 다름 아니라고 말해 준다. 그러나 『인문학과 인문 교육』의 지니는 미덕은 이론적 탐색을 넘어 인문의 실천을 ‘현장’에서 발견하고 그 가치를 입증하려는 글들을 풍성히 담고 있다는 데 있다. ‘현장 인문학’을 가능성을 검토하는 글(이정민, 「그런 것도 연구거리가 되나요?」)을 포함하여, 퀘벡(박희태, 「영화로 마주하는 퀘벡 인문학」)과 러시아(최정현, 「러시아의 대학과 고등교육 제도 변천 개요와 글쓰기 능력의 중요성」), 중국(윤애경, 「색을 통해 알아보는 중국 문화」)을 오가고, 탁월한 ‘여행 문학’을 낳은 근대 영국 문학(김순배, 「근대 영국 문학의 등장과 여행 문학」)과 중세 유럽 학문과 대학의 형성에 이슬람 문명이 어떤 관계를 맺었던가(신종락, 「이슬람 문명의 수용과 중세 유럽 대학의 발전」)를 이야기하는 글들을 읽으면 인문의 실천은 결국 삶의 현장에서 입증될 수밖에 없으며 위기 역시도 그러한 실천을 통해서 가능할 것이라는 전망을 갖게 된다. 결국, 어쩌면 인문 교육의 현장에 있는 소장 학자들의 책 『인문학과 인문 교육』 역시 아도르노가 말한바 인문학의 소생을 위한 하나의 애처로운 시도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동시대의 인간적 삶의 가능성을 탐색하려는 시도가 없다면 인문학은 위기가 아닌 소멸에 이르고 말 것이다. 아니 차라리 소멸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일찍이 새로운 잡지[‘새로운 천사(Angelus Novus)']를 구상하면서 발터 벤야민은 이런 말을 했다. “잡지 속에 하나의 삶이 …… 구제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어떤 삶이 형성되지 못한다면 이 잡지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으로 전락할 것이다.” 인문학이 필시 그럴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