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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수국에 이르다 저녁의 표정 무언극 이면의 무늬 모태 비상구 정전 원시인 뱀 이야기 너무 질긴 저녁 달항아리와 까마귀 눈사람 불 켜진 고양이 풍향계 안개 통신 매혹의 지도 2부 콘서트 역광 나는 수평선이 불안하다 비디오 모란 날다 고양이와 냉장고의 연애 의자氏의 하루 역사의 방법 혁띠와 뱀의 습성 텍스트 그림자 미술관 달빛 사용 설명서 위독한 연애 힐끗, 우주선 거미들 3부 독거 실종 나무 요리 무거운 병 없는 손 무거운 집 새의 행로 바퀴벌레 H씨의 행방 꽃 피는 발 늙은 남자의 휘파람 검은 사막 유령의 시간 회색의 눈 낙법 새의 기원 껌 물고기의 발자국 저수지 4부 시간의 영역 까마귀 전사 거울의 식성 418호 위험한 풍경 유리창 콜럼버스를 읽는 밤 누룽지와 박쥐 삐걱거림에 대하여 그림자 재고 정리 바퀴벌레를 읽다 나는 쥐구멍과 통화하고 싶다 시계를 먹는 고양이 명암의 방식 풍경의 질서 검은 숲 그림자의 문장 해설 전회와 진화와 귀환의 감각 · 유성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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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의 문장
오래 뒤적거리던 나무 그림자에 불을 질러 꽃 없는 봄을 완성하듯 때로 죽음은 만화방창이다 마침내 당신이 보이지 않는 아침 한 줄기 연기와 살을 버린 소리 몸 섞으며 사라지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빛 터질 듯 달아오르는 돌 속에서 빗살무늬로 수런거릴 때 귀와 눈이 지워지는 무화과나무 맨 처음 진흙 같은 표정으로 구물구물 살아 움직이는 그림자의 가슴에 가만히 손을 얹는다 눈 감지 못한 새벽 두시 지느러미도 없이 다만 빗방울의 차가운 심장과 함께 모태 시멘트 바닥에 나뒹구는 붉은 지렁이 몸을 꼬아보고 뒤집어보고 어쩌다 잘못 든 길 내 몸속으로 고물고물 지렁이 몇 마리 들어온다 가만히 앉아서 빗줄기를 거두는 마른 밭처럼 지렁이와 빗줄기 물로 빚은 노래의 다른 형식인 것 흙의 품을 향하는 동질의 슬픔인 것 구부러지고 끊어지면서 먼 길 가야 하는 토막 난 철삿줄을 본다 숨이 멎을 때까지 많이 버둥거렸을 끝이 뾰족한 한 생애를 본다 그냥 돌아서지 못하고 다시 들여다보는 붉은 기호 탯줄 잘린 자리를 찾아가는 알몸의 빗줄기 같은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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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도 감각하지 못한 대상과의 『만남』과 『젖음』
탄성계수 높은 서정성으로 삶에 대한 사유를 시 속에 녹여온 홍일표 시인이 5년 만에 『매혹의 지도』(문예중앙시선016)로 돌아왔다. 시인은 스스로 “나는 골동품 같은 구름이나 기러기를 버린 지 오래”(「안개 통신」)라고 말하며, 지난 시집 『살바도르 달리풍의 낮달』(2007)과 단절된 색다른 면모와 진화된 시세계를 이번 시집에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홍일표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한층 더 풍부해진 감각의 층과 깊은 상상적 미감에서 끌어올린 언어로 “대상과의 깊은 교유”(「시인의 말」)를 매혹적으로 펼쳐나가며, 한편으로 시와 시인 자신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를 전개한다.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보이는 상상 속 “이면의 무늬”를 다양한 감각으로 그려내고, “눈 감지 못한 잉걸불 같은 눈으로 밤을 사냥하”(「불 켜진 고양이」)며 시와 시 쓰는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다. 홍일표 시인에게 시(詩)란, 대상에 대한 무한한 '홀림'이며, “마음의 뼈에 유리잔의 실금처럼 풀여치가 다녀간 흔적”과 “안개의 미세한 떨림”(「매혹의 지도」)을 마음의 지도에 그려 넣는 것이다. 이 시집 전반에서 그러한 “감각과 수사와 서정이 경계 없이 펼쳐”(권혁웅 시인)지니, 실로 “매혹의 지도”가 아닐 수 없다. 언어가 가닿지 못한, 손가락 끝으로 가리킨 신비 이번 시집에서 드러난 홍일표 시세계에 대해, 유성호 평론가는 “메시지 중심 코드에서 환유적 감각의 층을 풍부한 모호함으로 확산해내는 코드로 이월되고”(해설「전회와 진화와 귀환의 감각」) 있다고 평한다. 즉 홍일표 시세계의 변화는 '감각'의 측면에 있다. 시인은 눈앞에 보이는 대상과 그 대상에서 촉발된 상상 속 “이면의 무늬”를 시 속에 부려놓는다. 그런 상상의 질서에 따라 감각과 사유를 재배열하는 마음의 기록이 홍일표의 시편들이다. 솜사탕을 수국 한 송이로 번안하는 일에 골몰한다//솜사탕은 누군가 내려놓고 간 벤치 위의 따듯한 공기/헐떡이다가 그대로 멈춘//수국은 수국을 통과하며 말한다//하늘에서 엎질러진 구름이 완성한 노래가/나무젓가락에 매달려 반짝이는 동안/구석에 쪼그리고 있던 햇살들이 손수건만 한 경전을 펼쳐들기도 한다//땅속에서 캐낸 태양은 먹기 좋게 식어 있다/붉은 껍질만 잘 벗겨내면/달지 않은 수국 한 송이 꺼내/한 열흘 땅 위의 배고픈 그림자들을 먹여 살릴 수 있다//멀리서 온 바람이 수국을 입안에 넣고 우물거리며 지나간다 ―「수국에 이르다」 전문 실재가 아닌 끓어오르는 상상을 시편 곳곳에 부려놓으니, 그 언어에는 언어로써 다 표현될 수 없는 어떤 절묘한 지점이 있다. 그것은 “논리적 해명보다는 상상적 점화(點火)를 욕망함으로써 채택된 시적 수사학”(해설 「전회와 진화와 귀환의 감각」) 이며 “말의 머리를 비틀어 슬그머니 말을 넘어서는 당신의 수사학”(「뱀 이야기」)이다. 이를 권혁웅 시인은 “손으로 잡아챈 명료가 아니라 손가락 끝으로 가리킨 신비”라고 말한다. 이번 시집에는 이른바 경구 형식의 ‘창조적 은유(creative metaphor)’가 많이 활용되었다. “귀는 허기진 동굴”(「콘서트」)이나 “별은 하늘에 고용된 일용직 악사”(「검은 사막」) 같은 간명한 비유로부터, ‘수평선’을 두고 “바다의 입을 꿰맨 바느질 자국”(「나는 수평선이 불안하다」)이라거나 ‘저수지’를 두고 “온종일 글썽이는 눈망울”이나 “밀봉되었던 물의 살가죽이 갈라지고/이따금 새들이 우편엽서처럼 날아오르는 곳”(「저수지」)이라고 한 비유에 이르기까지, 흡사 잠언(箴言)을 떠올리게 하는 단정하고도 단호한 은유가 많이 구사되었다. ―유성호, 해설 「전회와 진화와 귀환의 감각」 중에서 자기 기원과 시를 향한 무한한 탐색 “잠들지 못한 볼펜 끝에서/누군가의 검고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흘러나”(「불 켜진 고양이)」온다고 한다면, 그 누군가의 울음소리는 분명 시인 자신일 것이다. 홍일표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자기 기원에 대한 탐색을 통해 섬세한 자기 확인 과정”(해설 「전회와 진화와 귀환의 감각」)을 치러 나간다. 그래서 시편 곳곳에 시인은, 풍랑을 좇고 파도나 해일을 요리하는 고양이의 모습이나, “밤의 살을 뜯어 먹는”(「원시인」) 개의 모습으로 투영되어 나타난다. “바위의 눈 속에서 나는 바위이고, 공기의 눈에 나는 물렁물렁한 공기”(「원시인」)이듯 시인은 스스로 자기 기원을 탐색하며, 때로는 바위와 공기처럼 순수한 물질이 되고자 욕망한다. 시인은 “내가 희미해질수록/나는 정직한 물질이 된다”(「원시인」)고 말한다. 바위와 공기처럼. 온종일 들리지 않는 그 여자의 노래 속에서 뒹굴다가/머뭇거리는 안개의 살을 만져보는데/손발이 없다 얼굴은 뭉개져 소리가 오가던 길도 지워져 있다//술잔 밖은 언제나 에로틱하거나 우아한 죽음을 지향한다/아주 단순하게 바람이 불고/비가 내리다가 자주 생각의 허리를 부러뜨려 잃어버린 바늘을 찾기도 한다/예민해진 가을숲에서 부러진 빗줄기를 찾는 일은 쉽지 않다//만 리 밖에서 울며 걸어오던 비가 어제 죽은 허공의 등줄기를 적신다/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는 저곳/빈 동굴은 웅웅거리며 겨울바람의 붉은 마음을 여러 번 곱씹고 있다//접히고 구부러지고 다시 펴지는 사이/마음의 뼈에 유리잔의 실금처럼 풀여치가 다녀간 흔적이 남았다/나는 그것을 안개의 미세한 떨림과/그 여자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남긴 한 획의 연민이라고 쓴다//저녁이 식은 해를 안고 불의 심장 속으로 들어간다 ―「매혹의 지도」 전문 그렇다면 자기 기원으로 돌아가려는 시인에게 시란 무엇인가? 시인의 말에서 “대상과의 깊은 교유는 곧 귀신을 만나는 일이고, 단 한 번도 감각하지 못한 생의 숨결에 온몸이 젖는 것”이라고 밝혔듯이, 홍일표 시인에게 시는 대상과의 '만남'이며 '젖음'이다. 대상과의 깊은 교유는, 즉 “마음의 뼈에 유리잔의 실금처럼 풀여치가 다녀간 흔적”이며 “안개의 미세한 떨림”이자 “여자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남긴 한 획의 연민”(「매혹의 지도」)이다. 여기서 시인의 시가 시작된다. 그렇게 “맨 처음 진흙과 같은 표정으로” “나무 그림자에 불을 질러/꽃 없는 봄을 완성하듯”(「그림자의 문장」) 시인은 그림자의 문장을 완성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