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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사랑, 그 이상의 사랑으로 추억도 환상이다 기타 등등뿐 나는 잠잔다, 고로 살아 있다 불타는 말의 기하학 의심의 옹호 왜 하필 사과일까? 무덤 임대업 타동사에 얹혀서 대낮이 어찌 한밤의 깊이를 헤아리겠느냐 베개 거꾸로 로꾸거로 같은 꿈을 꾸다 감기 바이러스 정전사고 그림자 옷 벗기기 욕해줄 사람 찾습니다 검은 에너지를 충전받다 153 잉여 휴식시간의 자율학습 노트 검은 재즈 블랙 파라다이스 피회침, 죽을힘으로 산다 시인론, 지며 살아야 색동 눈발 쏟아지면 기다림을 기다린다 눈이 녹으면 백색 어둠 소행성(小行星) 2부 바늘에게 바치다 필요충분조건으로 마더 테레사의 손 만능열쇠 절대고통 해석의 문제 어느 실직자의 증세 그런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아버지 마음 약자병법 지갑주인 베드로는 닭고기를 먹었을까? 반성을 반성하다 은총의 달에 박수부대 국화, 밀려나면 저절로 된다 빈 동네의 크리스마스 반성 방법으로 무엇이 체험을 능가하랴 참말로 참말하면 봄의 미행 장자와 조우(遭遇)하다 종이학 타고 왔다 나를 추상(抽象) 할 때 꿈 밖이 무한 무엇을 위해 시를 써왔나 내 안의 사문(斯文) 초월(超越)의 문제 얼굴 시계 3부 개천표 가을에는 날마다 떠나간다 남의 이름처럼 불러본다 귀뚜라미, 폭설을 불러온다 서울이 더 초야이다 죽는 곳이 더 고향이다 해탈론 이상적인 연인들 내일이여 휘파람을 불어다오 로꾸꺼로 현재는 선물이 아니다 한계령을 읽어내다 흑해 나도 이상해진다 공부 검은 리본을 문신하다 그늘 곶 아직도 아직도냐? 발에게 맡긴다 마이너리티 겨울 부활 무궁한 미래의 오랜 어린이들 얼굴 속의 얼굴들 지구 탓이다 All Fools' Day 겨울 환상 그림자도 달밤 탄다 국민부적 밥해주러 간다 성덕대왕신종 해설 '어둠빛'을 노래하다ㆍ최현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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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말의 기하학
쉬운 걸 굳이 어렵게 말하고 그럴듯한 거짓말로 참말만 주절대며 당연함을 완벽하게 증명하고 싶어서 당연하지 않다고 의심해보다가 문득 문득 묻게 된다 유리 벽을 지나다가 니가 나니? 걷다가 흠칫 멈춰질 때마다 내가 정말 난가? 나는 나 아닐지도 몰라 미행하는 그림자가 의문을 부추긴다 제 그림자를 뛰어넘는 아무도 없지만 그래도 확인해야 할 것 같아 일단은 다시 본다 이단엔 생각하고 삼단에는 행동하게 손톱 발톱에서 땀방울이 솟는다 나는 나 아닐 때 가장 나인데 여기 아닌 거기에서 가장 나인데 불타고 난 잿더미가 가장 뜨건 목청인데. --- p.19 타동사에 얹혀서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다고 했더니 언제 살았던 적 있었느냐고 살아본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죽고 싶어질 수 있느냐고 정색하고 반문한다 너무 괴로워서 그만 헤어지자고 했더니 언제 사귄 적 있었느냐고 사귄 적 없는 이들이 헤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비웃듯 다그친다 온 적도 없이 오래전에 벌써 가버린 시대 구호와 운동의 스테레오 이중주 속에서 암흑물질을 찾다가 기다리다가 살았던 적도 없이 사귀었던 적도 없이 지칠 대로 지쳐 눈뜨기도 힘든 아직 여기. --- p.25 기다림을 기다린다 한때는 남북통일을 또 한때는 메시아의 재림을 어느 때는 아시아와 유럽 대륙이 자리바꿈하기를 핼리혜성도 목마르게 기다렸는데 이제는 지구의 자전 방향이 바뀌기를 기다린다 지구도 반대로 돌아보고 싶을 테니까 기다린다는 건 거대한 것 아득한 것 무궁한 것을 기다린다는 것 후천개벽(後天開闢)을 기다린다는 것 우주의 혁신 계획에 참여하고 싶다는 것 기다리지 않아도 오게 되어 있는 건 기다림이 아니다 기다림에 길들여져 기다릴 게 없다는 것이 견딜 수가 없어서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기다림을 기다린다 위대한 허무(虛無)란 기다릴 게 없는데도 기다리는 것이다. --- p.49 반성 방법으로 다들 앞으로만 걸으니까 다들 너무 빨리 걸으니까 따라갈 수 없어서 나는 뒤로 걷는다 걸어온 내 발자국을 보고 싶어서 어떻게 생겼나 얼마나 갈 지(之) 자로 비틀거렸나 아직도 헛발 딛나 헛걸음질인가 내 눈으로 확인하며 걷고 싶어서 역할도 모르고 걸어야 하니까 앞으로 걸어봐도 앞은 볼 줄 모르니까 보이는 건 어제의 발자국뿐이니까 혹시 누가 내 발자국을 신고 따라오나 하고. --- p.72 발에게 맡긴다 침대에서 죽는 것이 바이킹에게는 최대의 수치였다지 쉰셋의 나혜석도 길에서 죽었다지만 나는 살기 위해 길을 간다 길에 배고픈 발을 위하여 마음의 병도 발에게 맡긴다 보아도 못 보고 들어도 깨닫지 못할 때까지 아픈 마음 아프지 않을 때까지 마음이 없어져버릴 때까지 몸도 없어져 발만 남을 때까지 발이 발인 줄도 모를 때까지 걸으면서 걷는 줄도 모를 때까지 걸어서 에덴까지 낡은 지팡이 하나로 우뚝 서버릴 때까지 지팡이에 싹 돋아, 금단의 사과 꽃필 때까지. --- p.109 |
“걸어서 에덴까지” 삶의 내부를 확장하는 시어의 발걸음
유안진 시인에게 초월은 헛된 가상이며, 현재(present)는 잘못 배달된 선물(present)이다. 이것이 시집에 무수한 소리은유(동음이의어와 유음이의어들을 활용한 말장난)들을 심어놓는다. 우리는 세계를 뒤틀 수는 없으나 말을 뒤틂으로써 적어도 그것의 상징질서를 뒤틀 수는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은유가 강제하는 질서에서 벗어나, “궤도탈출”의 여정에 오를 수 있다. “내 발길”만이 “길이 된다.” ―권혁웅·시인 삶을 내부에서 확장하려는 의지가, 단지 삶을 이어가려는 욕망과는 전연 다른 것임을 이 시집은 보여준다. 이 시집에는 두 발로 시간 위를 활보할 때 우리가 미처 넘보지 않던 바깥이 문득 반대방향의 팽팽한 인력으로 불거지며 펼치는 시간의 곡예가 담겨 있다. “걸어서 에덴까지” 가는 일은 에덴을 당겨서가 아니라 삶의 내부를 확장함으로써 가능한 일임을 시는 증언한다. ―조강석·문학평론가 유안진 시인의 열여섯 번째 시집 『걸어서 에덴까지』가 문예중앙시선(017)으로 출간되었다. 유안진 시인이 추구해온 시세계가 보다 촘촘하고 단단한 88편의 시로 수 놓여 있다. 시인은 “거꾸로 살아와서, 거꾸로의 거꾸로인 로꾸거로 썼고, 이 또한 거짓말로 참말하기의 심화로 시도하고 싶었다”(「시인의 말」)고 말한다. ‘거꾸로의 거꾸로’로 되짚어가면서 나아가는 시어들은, 전후좌우 사방을 확장하고 수렴하는 걸음이다. 돌아보기 위해서 거꾸로를, 나아가기 위해서 거꾸로의 거꾸로를 탐색하기에, 세계와 삶의 이치에 관한 순리적인 깨달음이 묻어난다. 득도의 경지를 원하기보다 물러섬의 깨달음을 지향하는 시인의 걸음을 닮은 시편들이다. 거꾸로 로꾸거로, 거짓말로 참말하기, 참말로 참말하기 나는 늘 내 두려움이 두렵지 최대치로 치솟아 눈멀어버리는 햇빛 공포도 한밤중에는 가라앉아 밝아지는 눈으로 정오와 자정을, 웃음과 울음을 갈팡질팡 거꾸로 로꾸거로 살다 말다 하느라고. ―「백색 어둠」 부분 로꾸거 기법, 거짓말과 참말 사이 소리은유의 말장난들이 쉬이 휘발되지 않는 것은 곧은 뼈대에 유연한 살결들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뜨겁고도 깊게, 유머와 진지함을 가로질러 시는 더욱 풍요롭게 전개된다. “‘기법’이라는 겸손한 예의 뒤에는 유일무이한 편편의 창조와 느낌만으로 충분하게 식목되는 시림(詩林)에 대한 기대가 울울하다.”(최현식 해설, 「‘어둠빛’을 노래하다」) 나 말고도 누구든 다 믿지는 마시기를 사람이란 대체로 관리의 대상이기보다는 관심의 대상이며 믿음의 대상이기보다는 사랑의 대상일 따름인 줄을 부디 알고나 믿어주시기를. ―「참말로 참말하면」 부분 시인은 ‘나’와 ‘세계’의 자리를 끊임없이 치환하며 사유한다. 관찰과 사유가 가닿은 데서 “로꾸거”로 시인 자신에게로 돌아와 거꾸로의 거꾸로 기법, 거짓말로 참말하기를 완성해간다. 그 안에 거꾸로의 거꾸로가 찾아내는 자리, 진정한 “참”을 향한 믿음이 뿌리를 내린다. 시어의 전복을 통해 참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인 것이다. 그렇게 “걸어서 에덴까지” 이르는 여정, 이 시집에서 점점이 떨어지는 ‘사랑’은 그런 의미에서 끊임없는 갱신과 변전을 실천하고 기약해온 존재들을 위한 정중한 ‘경의’인 동시에 명랑한 ‘애도’이다. 물론 이때의 ‘애도’는 존재를 삶의 저편으로 추방하는 망각의 제의(祭儀)와 거의 무관하다. 잃어버린 대상의 빈자리를 메우는 슬픔이라는 점에서 애도는 우리의 상흔을 치유하고 또 여타의 타자들을 다시 사랑하게 하는 생명 운동의 일종이다.(최현식 해설, 「‘어둠빛’을 노래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