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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1부·감응과 분열분석 1장 / 감응의 이미지 2장 / 아나키와 문화 3장 / 우리 시대의 욕망과 분열분석 4장 / 진보에 대한 반(反)시대적 고찰 2부·혁명 이후의 혁명 5장 / 혁명과 반복, 혹은 마음의 정치학 6장 / 프롤레타리아 문화는 불가능한가? 7장 / ‘새로운 인간’과 무의식의 혁명 8장 / 건축이냐 혁명이냐? 3부·공-동체와 코뮨주의 9장 / 분열적 감응의 미시정치학 10장 / 도래할 코뮨, 또는 ‘가장 작은 것’과의 연대 11장 / 공동체에서 공-동체로 | 보론 | ‘정동’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할 것인가 ? 출전 참고문헌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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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응의 문제의식은 무의식적 욕망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비인간적인 힘의 유동으로서 감응은 무의식의 흐름 속에서 포착되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왜 감응인가? 무의식과 욕망이라는 단어가 이제 ‘한물간’ 것이기에 다른 유사한 물건으로 재포장해 내놓는 상술은 아닌가? 실제로 그렇게 묻는 사람도 있었고, 나 역시 자주 던져 본 질문이었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생뚱맞게 등장한 낯선 개념을 이전과 다르게 변주하고, 그럼으로써 애초의 개념이 놓여 있던 지형을 바꾸지 못한다면, 거기서 어떤 새로운 사유가 생겨나겠는가? --- pp.9~10
지금 한국의 지식사회에는 하나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 감응(affect)이라는 유령이. 정동(情動), 정서(情緖), 혹은 또 다른 단어들로 다양하게 번역되던 이 말은 언제부터인가 조심스레 회자되기 시작하더니 이제 철학은 물론이요, 사회비판과 문화분석, 경제와 과학, 예술창작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분야에서 빼놓지 않고 모습을 드러내면서 뭇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고 있다. 이를 테면 인식론적 논제로부터 정치학과 사회학, 경제학과 문화연구, 문학이론과 예술비평, 역사와 인지과학, 생명공학과 포스트휴머니즘 그리고 페미니즘에 이르기까지 전 분야에 걸쳐 감응은 담론의 중심에 놓여 있는 듯하다. 말 그대로 감응은 도처에서 흘러넘치고 있다. 하지만 도대체 감응이란 무엇인가? --- pp.22 기쁨과 슬픔, 동경과 멸시, 분노와 질투, 호의와 적의, 후회와 선망… 언어적으로 명확하게 분절되어 표명되는 감정은 타인과의 소통을 ‘자연스럽게’ 이끌지만, 삶에서 실제로 겪게 되는 온갖 분란과 갈등은 실상 그 같은 소통이 오해와 불통의 과정임을 반증해 준다. 외국어를 번역할 때처럼 일 대 일로 대응되는 투명한 감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 ‘분노’라는 단어를 써도 길을 걷다 취객의 행패에 놀라고 다쳤을 때 느끼는 분노와 공적 정의가 무시되고 탄압당해서 솟아나는 분노는 같을 수 없다. 동일한 상대에게 느끼는 사랑의 감정이어도 처음 그것이 싹틀 때의 설렘과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어 평상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기분은 같은 듯 다를 것이다. 더 나아가 흔히 ‘웃(기고 슬)프다’라고 말하는 착종된 감각 역시 단순명료하게 정의되는 감정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증거한다. --- pp.46~47 그리하여, 한 남자와 그의 누이를 닮은 어떤 여자가 한 몸처럼 함께 들어와, 안티고네 혹은 엘렉트라의 정념으로 국가의 법과 가족의 법을 맞붙였던 고대비극처럼, 흡사 끝나면 큰일 나는 의례적 코미디의 한 정경처럼, 앓는 백치와 간호사의 역할을 나누는 것이다. 근친상간의 금기에 아슬아슬하게 두 다리를 내려뜨리고 앉아 구덩이 속 오레스테스, 제 오라비를 걷어찼었나, 세상에서 가장 보이지 않는 여자의 형상을 한 채 해묵은 기억의 지하무덤으로 데려가 봉인된 가족의 폭력을 헤치곤(그런데 그 기원의 사건은 정말로 있었던 것일까) 기어이 죽은 아비의 환영을 끌고 올라오는 저 망할 누이인지 붉은 누더기인지를 닮은 여자가, 참으로 물색없는 사랑과 돌봄, 심지어 경배(adoration)의 맹세로서, 망각과 깨어남과 열광과 발작을 거듭하는 남자의 따귀를 때리고, 침을 뱉고, 욕을 퍼붓고, 아무도 봐서는 안 될 참지 못할 진실을 제가 유일하게 보았다고 우기며 마침내 총구를 겨눠 쏠 때에, 반복 속 변주를 통해 단속(斷續)되는 이 낮은 방향의 소란은, 여자가 열쇠처럼 쥔 총은, 과연 무엇을 주나. --- pp.436~4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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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함께-살 것인가?" - 감응으로 바라본 미-래의 정치학 감응(affect, 感應)의 시대가 도래했다. 정동(情動), 정서(情緖), 혹은 또 다른 단어들로 다양하게 번역되는 감응은 스피노자-들뢰즈의 사유에서 연원하는 것으로서 이성과 감성,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근대적 이분법을 넘어서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다. 감응은 정신보다 신체에 우선 작용하는 힘이며, 명석판명한 관념보다 무의식적으로 몸에 각인되고 작동하는 감수성의 차원을 아우른다. 하지만 그것은 즐거움이나 분노, 우울, 슬픔, 기쁨과 공포 등의 통상적 감정들로 환원되지 않는데, 무의식과 신체를 관류하는 힘으로서 감응은 항상 이행의 과정에서만 표현되기 때문이다. 지나가다 새똥을 맞았을 때의 불쾌감과 공개석상에서 모함을 받을 때의 불쾌감이 같을 수 없다. 또한 허기질 때 밥을 먹고 느낀 쾌감과 광장에서 민주주의의 대의를 성취했을 때의 쾌감이 동일하지는 않다. 쾌감과 불쾌감이라는 언어 표현은 같을지라도 형언할 수 없는 미묘한 차이가 있으며, 그것은 사건적으로만 정의되는 감응의 여러 가지 양태들이다. 감응에 대한 관심은 비단 개인적이고 정서적인 측면에만 머물지 않는다. 들뢰즈를 빌려 말한다면, 사회적으로 드러나는 온갖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차이의 양상들은 감응의 응결체라 할 만하다. 즉 제도나 법, 규범, 관습과 습관, 에티켓으로부터 미학적 개념과 철학사상의 체계, 그리고 예술작품에 이르기까지, 나아가 혁명과 파국, 현상과 사건 속에서 드러나는 특정한 사태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들은 감응이 현실 속에서 특정한 강도(intensity)를 이루어 표현된 ‘감응의 응결체’인 것이다. 이렇게 감응의 프리즘을 통해 개인과 사회, 일상과 삶의 본원적 차원을 다시 살펴보는 일은 근대 이후의 미-래를 전망하기 위한 중요한 이론적 실천이 아닐 수 없다. 이 책 『감응의 정치학』은 근대를 넘어서 탈근대를 향한 감응의 흐름을 뒤좇아 정치와 사회, 문화와 예술, 혁명과 공동체의 문제들을 분석한다. 코뮨주의(commune-ism)는 그 탐구의 실천적 과정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감응의 인간학과 정치학 감응은 인간학과 정치학의 기본적인 전제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한편으로 인간은 “필연적으로 감응에 예속되어” 있기에 합리성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존재다. 흔히 이성과 더불어 감성이 인간의 존재 조건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런 측면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은 “공통의 감응에 의해 자연적으로 합치”할 수 있기에 정치적 사회체를 구성하는 존재다. 인간이 다른 인간들, 나아가 인간들의 집합체인 사회와 국가로 결속할 수 있는 이유는 인간들 ‘사이에’ 감응의 흐름이라는 접속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과 인간의 유대는 이해타산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고, 감응적 관계의 설립을 통한 연대가 필연적이다. 만일 감응을 낱낱의 개별화된 감정과 동치시킨다면, 그와 같은 집합적 연대는 전혀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감응은 조각난 감정이 아니라 연속적 흐름 속에서 나타나는 지속의 감각이며, 그로써 개인들의 신체를 관통하고 연관짓는 힘으로서 기능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감응적 존재라면 필연적으로 사회적 존재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성적 판단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유대에 있어서도, 감응이라는 존재 조건으로 인해 인간은 사회적 본성을 갖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연적으로(본성적으로) 사회 상태를 욕망한다.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사회 상태를 해체시키는 일은 불가능하다.” 감응이 인간학의 기초이자 정치학의 기저를 이루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코뮨, 또는 공-동성(共-動性)의 공동체 이웃관계에 있는 무엇을 감수(感受)하는 것은 감응의 실재와 작동을 드러낸다. 그것은 시각적 표상에만 한정되지 않으며, 공감각적 지각에 관련된 모든 효과를 포괄한다. 핵심은 그와 같은 감응의 이미지가 획일적인 감각 표상에 의해 박제화되지 않고, 언제나 사건의 특이성을 통해서만 체험된다는 데 있다. 사건이란 무엇인가? 정의상 사건은 유일무이한 일회적 발생이다. 그러나 단독자의 유아독존적 실존이 사건을 일으키지는 못한다. 유일무이하고 일회적인 것은 인접한 다른 것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사건으로서의 특이성을 발산한다. 축구선수가 영예의 결승골을 넣기 위해서는 다른 열 명의 선수들이 일사분란하게 공을 패스해 주고 결정적인 슛을 날릴 만한 위치로 그를 이끌어 주어야 한다. 그가 결승골을 넣는 사건은 그 같은 시공간적 배치 속에서 움직이는 다른 주자들과의 협-조(協-調)에 의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 러시아어로 사건(sobytie)은 ‘함께’를 뜻하는 접두사 ‘so’와 ‘존재’를 가리키는 ‘bytie’가 결합해 만들어진 단어다. 타자들이 하나의 시공간에 모여들지 않는다면, 특정한 배치를 이루지 않는다면 사건은 일어나지 않는다. 감응이 생산하는 효과는 타자들이 함께-있음(being-in-commune)으로 인해 유발되는 함께-함(doing-in-commune)의 사태다. 따라서 감응의 문제의식이 함께-삶(living-in-commune)이라는 정치적인 것과 연관되는 것은 불가피하고도 당연한 노릇이다. 감응의 핵심은 ‘코뮨’에 있다. 어떻게 함께-살 것인가? 외부성과 타자성을 본질적으로 포함하는 공동체. 그것은 동일체가 될 수 없다. 동시에 이는 공동체가 함께-하는 운동을 본원적으로 내포하는 집합체임을 가리킨다. 공동성은 같은 속성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움직임을-만드는 리듬의 연대에 다름 아니다. 공동성은 공-동성(共-動性)으로 전환되어야 하며, 특정한 조건 속에서 특정한 리듬에 맞춰 추는 춤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질성의 연대란 바로 그런 게 아닐까? 타자와 함께 출 수 있는 춤, 전혀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가락이어도 몸이 가는 대로, 손과 손을 부여잡은 몸짓으로 서로의 움직임에 호응하여 어설프게나마 리듬과 박자를 맞추어 가는 과정, 그로부터 생겨나는 미묘한 감응의 공-동성. 그렇기에 공동성이란 분열을 내장하는 힘이며, 오직 이질성의 연대로서만 공-동체일 수 있다. 다르기 때문에 공동체를 이룰 수 있으며, 거꾸로 공동체의 구성 근거에는 필연적으로 분열이 있게 마련이다. 분열의 공-동체, 우리는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공동체에서 공-동체로, 그리고 코뮨으로. 삶이 종결되지 않는 생명의 과정이듯, 공-동체의 운동 또한 완결될 수 없는 리듬으로 채워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여기를 떠나 다른 시공간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라도 과감히 욕망하기를 멈출 수 없다. 또 다른 실패를 기약하며, 그러나 실패를 언제나 감수하고 넘어서는 실험으로서 이 춤이 지속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코뮨주의, 그 불가능한 시도를 다시 한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