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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제1부 013 정돈된 과거 015 육촌 016 흐린 날의 종족 018 밤은 몇 개의 수조를 거쳐 아침이 되는가 020 바이올린 켜는 염소 022 분명은 아주 잠시 024 중간색 026 도체 028 서쪽 030 사람이 벚나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032 봉투-옷 혹은 육체-자루 034 아테나 콤플렉스 036 불의 이웃 제2부 041 신(新) 지옥도 042 5구역 044 나무 자세 046 정전 054 요요 057 오늘의 메뉴 058 당나귀의 권리 060 그림씨에게 062 기념품 064 다나카는 다나카답게 다나카인데 066 모래바람무늬 068 나의 모니터는 사막을 그리워한다 070 아무도 세 이야기의 관계를 말하지 않는다 제3부 075 너는 내가 아니니까 076 주워 온 돌 하나 때문에 078 소금의 언어 080 화 금 수 목 월 일 토 082 생각다방 산책극장 084 마취의 세계 086 울기 위해 동원되는 일곱 개의 감정 090 접전 091 공중 속의 티타임 092 망고 트릭 094 수탉이 사랑하는 밤 096 서른 번쯤 들은 이야기 097 감동적인 밤 제4부 103 맨드라미 104 철학적 홍등가 106 죽은 토끼 빌려 오기 108 미완성 나라의 국어 선생님 110 도서관 가는 길 112 다정한 외면 114 사라예보의 장미 116 독 118 그림 하나가 말을 119 가오리 120 사바아사나 122 젖무덤 123 실패 124 해설 남승원 실패의 새로움과 가능성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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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이란 말에는 생각보다 깊은 뜻이 있다
혼자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에게 옷을 갈아입힐 적마다 앉은뱅이 고모에게 진 빚을 갚는 느낌이다 산후조리하다 맞은 침 때문에 평생 앉아서 살게 된 열아홉 절망에 생김새가 있다면 문병 온 친구가 주머니에 찔러 준 흰 봉투같이 생겼을 것이다 하룻밤만 자고 나면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다 아는 사이 비밀 하나쯤 지키겠다는 듯 치는 커튼 그 안에서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곡식 여물지 않을까 봐 논농사 곁에 가로등 세우지 않듯 불 끄고 돌아눕는 것 그것이 안녕이다 잘 자라는 인사 대신 갈아입을 옷 챙겼느냐 실없이 물어 주는 것 문 열면 환한 냉장고의 불빛 같고 다 먹지 못할 간식에 붙여 놓은 번호 같은 안녕 감탄할 수밖에 없는 죽음 커튼 치고 연습해 보는 것 같아서 너를 사랑했다는 것이 아무래도 거짓말이었나 봐 지우게 될 문자를 써 놓고 들여다보는 간병사의 저녁 저녁은 안녕이란 인사를 하지 않는다 *** --- 「봉투-옷 혹은 육체-자루」 중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세계로 가는 통로가 있다 성체조배 하러 가는 길 온몸에 황금을 칠한 어둠 속에서 찢긴 잠의 절단면을 걷고 있던 사람 하나가 벚나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에겐 그 벚나무 어딘가에 아름다운 나라가 있었던 것이다 셀 수 없는 꽃잎이 되려고 그가 걸어 들어간 벚나무 아래서 내 안에 내리고 있는 새벽 빗소리를 들었다 질 나쁜 종이에 연필심 긁히는 소리 전국의 벚꽃 개화 시기가 조금씩 달랐던 건 사람들이 집을 떠난 시간이 달랐기 때문이다 내가 죽어도 가로수로 서 있을 사람 혹여 누군가 활과 화살을 만들기 위해 이 나무를 베어 낸다 할지라도 바람에 흩날리는 우수 누구에게나 한 번쯤 있었던 화려한 시절 짧아서 아름다웠던 생 바구니를 메고 있는 새벽이 벚나무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 --- 「사람이 벚나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릇을 뺐다고 연락이 와서 장작 가마 속에 들어앉아 땀을 빼게 되었다 흘러내리는 유약 위에 흘러내리지 않으려는 유약을 바른 토끼 귀 털 문양 그릇 나는 땀 흘리는 그릇이었다 불가마 뒤안에 버려진 파편들 깨지기 위해 만들어지는 그릇 중의 으뜸은 사람이었다 불똥이 튈 때 목 긴 화병 옆구리에 작은 찻잔 하나가 날아가 박혔다 실패하지 않는 우연은 성공작을 위해 눈에 잘 띄는 곳에 진열될 것이다 아무도 그려 주지 못한 무늬를 갖기 위해 받들었던 균열들 땀구멍을 통해 투명한 무늬로 빠져나왔다 도공의 손을 빌려 깨지기로 한 그릇들 원하는 꼴이 아닌 사람들이야말로 꼭 필요한 낭비였다 *** --- 「불의 이웃」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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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행버스를 탔다 목적지까지 가는 몇 개의 정류장에서 사람들이 타고 내렸다 버스가 멈출 때마다 창문에 흰 손수건을 기대어 놓고 오래도록 졸고 있는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졸음은 소년을 깨울 수 있을까
사람만 한 풍경이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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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민의 시는 발광(發光)이다. 눈 내리는 겨울밤 저 멀리서 반짝이는 불빛인 동시에 비가 내리는 도시의 밤 처연하게 빛나는 가로등 불빛이기도 하다. 북극의 밤하늘을 신비롭게 수놓는 오로라인가 하면 물고기를 잡았다가 놓아주는 어부의 손길로 다가온다. 다소곳이 시작했으나 그 끝은 울림이 큰 서사들, 모든 시편들 속에 보석 같은 문장 하나씩 콱, 박혀 있다. 철학적 진리체에 가까운 말들이다. “인생은 요약되지 않아서 어려웠다”(「5구역」), “길을 잃는 것보다 사람을 잃는 게 더 큰 문제였다”(「마취의 세계」), “내려가는 것만이 약이었던 고산병”(「기념품」). 이러한 세력들이 요소요소에 포진해 있다. 어둠을 안고 있는 우리의 등을 두드려 준다. 위로나 배려의 마음을 쉽게 드러내기보다는 한 번, 두 번 곱씹어서 야무지게 결론을 내는 방식이다. 거절하기 어려운 부탁 같은 말들이 쉽게 잊히질 않는다. “잘 자라는 인사 대신/갈아입을 옷 챙겼느냐 실없이 물어 주”며 나를 토닥인다(「봉투-옷 혹은 육체-자루」). 나무 그늘 아래에서 쓸쓸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예상치 못한 자문자답, 단순한 물음들은 어려운 경로를 거쳐 낯설게 밀려온다. 사려 깊은 언어들이다. 카드 섹션하듯 나타났다가 겹쳤다가 투명해지는 문장들. “젖은 양말 같은 저녁/뜻밖의 여유로 다가오는 이상한 통증//갈 곳이 없었다”(「마취의 세계」). 눈가에 눈물이 얼비치는 이유다. 시인은 “사람만 한 풍경이 없었다”(「시인의 말」)고 말한다. 신정민의 시들은 사람들의 초상이다. 벚나무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 그래서 우리는 만난 적이 없는 사람, 바다를 건너 구름으로 흘러들어 만나고 온 사람들을 아직도 기억한다. 페르시안 카펫과 같이 펼쳐진 시편들이 시공간을 초월해서 날아다닌다. 죽음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삶, “죽은 자의 자세가 가장 편했다”(「사바아사나」).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시가 외친다. “목숨보다 눈부신 것 없다//죽도록 살아야 한다”라고(「철학적 홍등가」). - 정익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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