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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 / 김하기
착각일수도 / 문성수 비에이 / 강동수 반말 / 박향 꽃 중에 꽃 / 정인 아버지가 가리킨 나라 / 배길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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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나라 팔자가 모진 탓이다. 사랑채 타 없어진 거 봤나? 니가 가고 난 뒤, 빨갱이한테 가족들이 학살당했다는 자들이 횃불을 들고 우리 집에 쳐들어와서 불을 놓았지. 사랑채에 누워 있던 너가베를 끄집어낸다고 혼을 빼던 생각을 하면….”
--- p.47 문득 그는 자신의 일을 떠올렸다. 그렇게 단호히 결백을 항변했던 일들도 어쩌면 아집의 그물에 사로잡혀 그렇게 믿고 싶었던 착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자신이 한 말과 행동에서 아이들이 불쾌감과 성차별을 느꼈다면, 아니 자신도 모르는 어떤 욕망이 내밀한 가면을 쓰고 그렇게 연출하도록 지시했다면 그래서 사과를 요구한 아이들의 주장이 꼭 모함만은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이르자 그는 갑자기 자신이 두려워졌다. --- p.86 녹두는 평상 아래에서 주둥이를 처박고 먹이를 탐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동그랗게 말려 올라간 녀석의 꼬리가 귀엽다. 문득 녀석의 배가 볼록하게 솟은 게 눈에 띄었다. 가만 있자, 이 녀석 배가 왜 이 꼴이지? 나는 평상 아래 녀석의 배 쪽으로 손을 슬며시 내밀었다. 녹두가 고개를 홱 쳐들고 나를 노려보았다. 녀석의 눈에 들짐승 특유의 날카로운 경계의 빛이 어렸다. 그때였다. 녀석이 앞발을 들어 제 아랫배로 다가가는 내 손등을 사납게 할퀴었다. 싸한 통증이 스쳐 지나갔다. 놀란 김에 녀석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쳤더니 녀석은 아웅 하고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고는 평상 밑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담장으로 뛰어올라 어디론가 사라졌다. --- p.113 문득, 모든 것이 가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가짜들 앞에서 결국 또 자신만 억울하게 당하고 말 거였다. 전방을 주시하며 아프도록 입술을 깨물고 있는데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진통제도 소용없던 끔찍한 충치의 기억처럼 화는 온몸을 고통스럽게 뒤덮었다. 급기야 아까부터 혀끝을 맴돌던 말이 토악질을 하는 것처럼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 p.181 그렇다꼬 일주일을 기다리겠나? 가서, 다음 기회를 봄서 마음으로나 내 할 말 대신해주는 사람들을 응원할란다. 내가 그 자리 함께 안 한다꼬 내가 당한 일이 없어지는 건 아인까네. 백골이 흙이 돼도 못 이자뿔 일을 당한 사람들이 가슴에 한을 품고 죽은 사람도 많고, 내처럼 생각만 하모 정신줄을 놓아버리는 사람도 아직 많을 끼다. 그러이 저 일은 다 죽는다꼬 끝날 일이 아이다. 원(怨)을 안 풀어주모 죽어도, 죽어도 계속될 한이다. 그걸 어째 그냥 두노. 마음을 묵었으이 인자라도 힘을 보태야지. --- p.225 “똑똑한 우리 형을, 죄 없는 형님들을 나라에서 왜 땡겨부러? 마을 사람들을, 죄도 없는 사람들을! 대통령에 국회의원에 장군까지 있잖여? 나라에서는 그리 안 해! 반란군 놈들이…, 그 빨갱이 새끼들이 그런 거이야!” --- p.2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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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가 창궐하고 AI가 소설을 쓰는 시대,
소설가의 사회적 책임감과 사명감을 되돌아보다 사현금(四絃琴)은 문단에서도 손꼽히는 네 명의 중견 작가 김하기, 강동수, 박향, 정인의 동인(同人) 이름이다. 사현금 동인은 문학과 현실의 접점을 새롭게 만들기 위해 1년에 한 번씩 픽션 무크지를 발간하고 있다. 무크지는 1980년대 군사정권의 문화 탄압에 맞서기 위해 작가들이 저항의 수단으로 발간했던 부정기 간행물이다. 무크지 『사현금』이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은 문학의 사회적 책무를 되돌아보고 새로운 시대의 문화 담론을 생산하기 위해서이다.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변종 바이러스가 전 세계에 창궐하고 있으며, 인공지능이 소설을 대신 쓸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시대 변화와 환경 속에서 소설의 쓸모와 작가의 필요성을 묻는 일은 더욱 중요해졌다. 사현금 동인은 “인간의 창의력과 상상력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다”고 말하며, 글을 쓰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다. 소설가는 막중한 책임감과 사명감을 갖고 있어야 한다. 책을 읽지 않는 이들을 원망하기보다 작가와 독자의 관계를 변화시키고자 노력해야 한다. 사현금 동인의 두 번째 무크지가 지향하는 바이다. “소설이 바이러스를 일으켜 세상을 초집중시키는 시대, 우리에게 그런 미래는 아예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의 감성을 전염시키고 전염된 감성이 위대한 예술을 탄생시킨다면 인간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아카데미에서 네 개의 트로피를 거머쥔 ‘기생충’은 한국 영화이다. 스스로 변화하기를 몸부림치던 아카데미는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을 간절히 기다려왔을 것이다. 한국이 세계를 놀라게 했다면 지역이 중앙을 놀라게 하지 못할 리 없다.” - 서문 [이 시대의 소설가로 살아가기] 中 시대성과 개별성, 사회와 개인의 끊임없는 줄다리기, 사회라는 거대한 파도에 찢긴 개인의 삶을 건져 올리다 무크지 2권 『꽃 중에 꽃』에는 사현금 동인 김하기, 강동수, 박향, 정인 네 사람의 소설을 싣고 있으며, 여기에 문성수, 배길남 두 명의 객원필진 소설을 더해 모두 여섯 편의 작품이 담겨 있다. 김하기 작가의 「귀향」은 비극적인 역사의 소용돌이에 매몰된 한 비전향 장기수의 삶을 그리고 있으며 문성수 작가의 「착각일수도」는 아집의 그물에 사로잡힌 여고 교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강동수 작가의 「비에이」는 아름답게 포장된 자신의 첫사랑 상대가 실은 먹먹한 고통의 터널을 통과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이야기며, 박향 작가의 「반말」은 언어가 가진 기능을 지나치게 맹신하며 늘 높임말을 쓰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표제작이기도 한 정인 작가의 「꽃 중에 꽃」은 아름다운 꽃으로 살고 싶었던 할머니와 상처 많은 한 여인을 지극히 사랑했던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배길남 작가의 「아버지가 가리킨 나라」는 자식들을 지키기 위한 아버지의 처절한 위선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특히, 각 작품에는 시대의식이 짙게 묻어 있다. 역사라는 거대한 파도를 명분 삼아, 사회는 개인에게 시대정신과 희생을 요구한다. 이에 맞서, 행복을 추구하는 개별 존재의 치열한 생존기가 시작된다. 이 파도는 비극적인 역사 사건일 수도 있고(「귀향」, 「비에이」) 사회가 만들어낸 개인일 수도 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 삶은 곧 인간 내면의 사회성과 개별성의 치열한 다툼 그 자체다. 사회가 빚어낸 개인은 수십 년간 스스로 견고히 쌓아 올린 아집(「착각일수도」)의 형태로, 삶을 영위하기 위한 위선(「아버지가 가리킨 나라」)의 모습으로, 타인의 고통을 들여다보지 않으며 자신의 기억을 미화하는 행위(「비에이」)로, 오로지 한 가지 믿음으로 삶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행동(「빈말」)으로 우리 앞에 드러난다. 겉으로는 달라 보이는 각 이야기와 주인공, 내면 갈등은 사회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결국 개인이 맞서 싸우는 건 표면적으로 드러난 사회 권력을 넘어,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이다. 그럼에도 표제작 「꽃 중에 꽃」이 이야기하듯, 사회에 찢어진 개인을 보듬어주는 건 사랑이다. 비극의 역사가 제3자의 시선에서 벗어나 나와 가까운 누군가의 이야기가 될 때, 시대적 아픔이 타인의 아픔을 넘어 개인의 아픔으로 다가올 때, 세상을 좀 더 밝게 만들 인류애(人類愛)의 진한 향기가 세상에 아름답게 퍼질 것이다. 그것이 사현금의 두 번째 동인 무크지가 전하는 주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