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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1장 산자와 죽은 자 들어가면서_에마뉘엘 이르시 삶과 죽음 사이의 대화_장 클로드 아메장 삶이 끝나는 순간은 언제인가_베르나르 마리 뒤퐁 2장 삶과 죽음 들어가면서_장 클로드 아메장 현대사회에서의 죽음_다니엘 에르비외 레제 죽음이라는 사건에 얽힌 쟁점들_파트리크 보드리 3장 좋은 죽음 들어가면서_다니엘 에르비외 레제 영웅의 죽음_롤랑 샤에 성인의 아름다운 죽음_에리크 르비야르 죽어가는 타인 앞에서_에마뉘엘 이르시 부록_ 임종 환자의 의료적 대우에 관한 직업윤리 규정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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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삶과 죽음 사이의 대화
오랫동안 사람들은 세포의 죽음이 인간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우연한 사고나 파괴의 결과 내지는 마모와 세월의 흐름, 환경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는 내재적 성질에 따른 결과에 지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진실은 훨씬 더 복잡한 성질의 것으로 밝혀졌다. 우리 몸은 생명이 잉태되고 우리 존재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연이은 형태의 변형을 통해 스스로를 구성해가며, 이 과정에서 세포의 자살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가령 팔과 다리의 형태를 먼저 만든 다음, 손가락과 발가락의 경계가 되는 조직을 제거해서 손가락, 발가락이 모양을 갖추게 하는 식이다. 또한 세포의 죽음은 몸의 발생 초기에 존재하는 반대 성의 생식 기관들의 흔적을 없애는 역할도 한다. 이렇듯 세포들은 우리가 태어나서 살아가는 내내, 유전자에 들어 있는 정보에서 출발해서 언제든지 자멸의 길로 들어갈 수 있는 무기를 계속해서 만들어낸다. 이러한 불안정성은 인체의 가소성과 복잡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우리 몸이 매순간 스스로를 만들어내고 재구성하여 변화무쌍한 환경에 적응할 수 있게 해준다. 면역계가 자신의 몸을 공격하는 것을 막아주고 유전적 손상을 겪은 세포가 암에 이르는 것을 피하게 해주는 것도 세포의 자살이다.--- pp.24-27 모든 생명은 쇠약 현상과 환경의 공격 속에서 이미 패배가 정해져 있는 싸움을 치른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생명의 지속성이 가능했던 것은 생명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각각의 개체와 각각의 세포가 자신의 때 이른 죽음을 대가로 더 젊고 생식력도 더 큰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활용해온 덕분인지도 모른다. 우리를 늙고 죽게 만드는 것이 어쩌면 우리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것인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세포와 몸의 작용을 이해하고 변화시키려는 시도가 과연 성과를 거둘 수 있을까? 그러므로 우리는 삶과 죽음이 벌여온 무조건적이면서도 우연적이며 갈수록 복잡해지는 형태의 게임이 시간을 가로질러 지금까지 계속되어온 생명의 오랜 여정과 그 생명이 만들어온 놀랍도록 많은 새로운 세계에서 얼마나 중요하고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pp.41-42 1-2 삶이 끝나는 순간은 언제인가 죽음의 의학적 정의는 최근 수십 년간 큰 변화를 겪었다. 심혈관을 기준으로 정의되었던 죽음이 오늘날에는 뇌를 기준으로 정의된다. 게다가 예전에는 시신 자체가 죽음을 말해주었지만 오늘날에는 시신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이제 죽음은 더이상 그 자체로 제시되는 게 아니라 과학적으로 증명된다. 의학이 죽음을 생각하는 방식이 완전히 바뀌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사회에 윤리적으로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과거에 죽음은 심장을 기준으로 하는 하나의 형태밖에 없었으며, 심장이 멎는 시점이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경계점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인공호흡기 같은 의료적 도움이 없었기 때문에 죽음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빨리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죽음이라는 사건이 시간과 장소와 행동의 일치를 보여주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뇌사가 등장하면서 그러한 일치성은 깨졌다. 이제 죽음을 법적으로 확언하려면 증명이 필요하다.--- pp.50-53 윤리적인 배려로 환자의 생명을 끝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면 인간의 존엄성은 매우 임의적인 개념이 된다. 존엄성이란 환자의 자율성과 같은 말일까? 존엄성이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 의해 정의되고 평가될 수 있을까? 존엄성에 등급을 매길 수 있을까? 자기 자신의 상태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으면 존엄성이 더 높아지는 것일까? 그럼 이 경우 약자들과 가진 것 없는 자들은 어떻게 보호해야 할까? 어린아이와 치매에 걸린 노인은 자신의 상태에 대한 의식이 없거나 완전하지 않다. 이들이 이런저런 혼수상태에 놓인 사람들과 같다는 말인가? 물론 비가역적 혼수란 말은 자율적인 면에서나 이성적인 면에서나 온전히 인간다운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뜻한다. 하지만 ‘비가역적’이라고 말해지는 혼수상태라고 해서 타인을 단순한 상품처럼, 말하자면 법적으로 장기를 꺼내 써도 되는 ‘장기 창고’처럼 여겨도 될까?--- pp.59-60 2-1 현대사회에서의 죽음 현대사회의 죽음을 특징짓는 첫 번째 요소는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늙어서 죽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수명 연장은 현재 죽음과 관련된 상황에서 핵심적 사실에 해당한다. 수명 연장의 주된 결과는 각 개인과 개인의 총체로서의 사회가 노화와 이에 따른 자율성 상실 및 의존성 증가라는 집단적 현상을 마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사람들은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자신을 동일시하기보다 아주 나이 많은 사람이 보여주는 모습, 즉 더디게 진행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생명의 쇠퇴를 겪고 있는 모습에 자기 자신을 투사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 결과 생겨난 현상은 공포의 이동이다. 저세상에서 지옥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관련된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부터 이 세상에서 버림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관련된 노쇠에 대한 공포로의 이동을 두고 하는 얘기다.--- p.76 현재의 법치사회는 안전한 사회라고는 할 수 없다 하더라도 과거의 사회에 비해 개인에게 덜 위험한 사회임은 분명하다. 법적인 측면 외에도 식품 안전과 위생 안전, 사회적 보호, 기술적 발전 역시 사람들이 죽음을 노화에 따른 경우가 아닌 한 끔찍한 사고와 나란히 놓게 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물론 현대사회에서는 자동차 사고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있으며, 교통 발달로 인한 전염병의 확산 위험도 크다. 하지만 이러한 집단적 죽음은 잠재적이고 추상적인 위협에 머무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를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위험으로는 인식하지 않는다. 현대사회는 위험한 사회이긴 하지만, 갑작스런 죽음의 가능성이 개인에게 일상생활의 차원에서 계속 부담을 주지는 않는 것이다. 그리고 갑작스런 죽음이 일어날 경우에도 사람들은 그 일을 용납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면서 사회가 개인에게 제공하는 보호체계를 문제 삼는다. 고도로 현대화된 사회에서는 위험으로부터의 보호를 요구하는 것이 죽음을 거부하는 첫 번째 방법이 되어가고 있다.--- pp.77-78 2-2 죽음이라는 사건에 얽힌 쟁점들 죽음에 대한 이해방식을 구축하는 데는 죽음에 관한 정보, 죽음에 관한 과학적 사실만으로는 절대 충분하지 않다. 죽은 자는 살아남은 자들의 상상 속에서는 계속 살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은 자가 죽었다는 것을, 더이상 듣지 못한다는 것을, 대답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목소리를 낮추고 죽은 자에게 말을 건넨다. 게다가 죽은 자는 자신에게 속했던 물건들이 자신이 그 물건을 다룰 때 했던 몸짓이나 그 물건에 던졌던 시선을 간직하게 만든다. 그리고 살아 있는 자들의 몸짓을 통해 자신의 습관, 손짓, 고갯짓을 보여주며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는 모르는 사람들한테서 죽은 자가 미소 짓고, 우산을 펴고, 창구에서 기다리고, 계산서를 받고, 버스에 오르는 모습을 순간적으로 보는 것이다. 죽어가는 일은 결코 개인 한 사람만의 죽음에 국한되는 일이 아니다. 죽어가는 일은 세대간의 연계 속에서 자리의 재편성을 요구한다. 이제 죽음의 과정과 죽어가는 일의 심리적 단계를 과학적으로 알게 되었다고 해서 ‘믿음의 시대’에 머물러 있는 전통적인 사회들에 비해 죽음과 죽어가는 일에 더 잘 대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죽음을 삶의 끝으로 단순화하려는 경향 때문에 우리는 죽음이 삶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잊고 있다.--- p.95 3-1 영웅의 죽음 분노에 찬 아킬레우스는 단호하게 답한다. “개 같은 놈! 내게 간청하지 말라. 네가 한 짓을 생각하면 너무나 분하고 괘씸하여 내 손수 네 몸을 토막내어 날로 먹어치우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니 네 머리에 달려드는 개들을 쫓아줄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네 어머니는 자신이 낳은 아들을 관 속에 누이고 슬퍼하지 못할 것이며, 개와 새들이 너를 남김없이 뜯어먹으리라.” 그런 다음 아킬레우스는 미리 생각해두었던 “모욕적인 일”을 실행에 옮기며 가차없이 헥토르의 시신을 훼손한다. “그는 헥토르의 양쪽 발뒤꿈치와 복사뼈 사이 힘줄에 구멍을 뚫고 가죽끈을 꿰어서 머리가 바닥에 끌리도록 전차에 매달았다. 그런 다음 전차에 올라타고 채찍을 휘두르자 말들은 나는 듯이 맹렬하게 달렸다. 시신이 끌려가는 주위로는 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헥토르의 검은 머리칼은 산발이 되었고, 한때 그렇게도 아름다웠던 얼굴은 먼지 속에 나뒹굴었다..” 아킬레우스는 매일같이 헥토르의 시신을 전차에 매달고 먼지투성이의 전장을 돌아다닌다. 시신이 어서 망가지고 훼손되어 짐승들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게 하려는 생각에서였다.--- pp.112-113 이제 시신 앞에 놓인 두 갈림길, 즉 시신이 겪을 수 있는 두 가지 운명에 관해 다시 이야기해보자. 우선 첫 번째 길은 잔인한 적들의 손에 모욕당하고 훼손되어 짐승들에게 던져지는 운명에 놓이는 것이다. 호메로스는 문제의 짐승들을 개, 맹금, 물고기, 파리, 벌레 등으로 다양하게 열거하고 있다. 요컨대 생명이 떠난 몸을, 다시 말해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고 자연의 순환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시체의 살을 먹고 살아가는 모든 동물이 그에 해당한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죽음의 첫 번째 정의를 얻을 수 있다. 죽는다는 것은 생명력을 잃고 더이상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는 몸이 된다는 것, 썩은 시체가 됨을 뜻한다. 하지만 만약 시신이 두 번째 길로 가면, 즉 가족들에 의해 수습되면 그 시신은 다양한 장례의식의 대상이 된다. 가령 파트로클로스의 시신은 거대한 장작 불에 태워졌고, 남은 뼈와 재는 유골 단지에 담겨 땅에 묻혔다. 그리고 이러한 화장과 매장의식에 이어 무덤에는 비석도 세워졌다. 이렇듯 영웅이 죽은 뒤 숭배를 받으려면, 즉 자기 고향 땅에서 신격화된 조상으로서 경건한 존경을 받으려면, 그 시신은 포식이라는 자연의 순환을 벗어나야 한다. 자연의 법칙에 따라 죽은 생물의 살이 살아 있는 생물을 위해 사용되는 종속적인 영양의 순환에서 벗어나야 한다.--- p.116 3-2 성인들의 아름다운 죽음 성인의 죽음에서 질병은 그 자체로는 직접적인 관련성을 크게 지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육신적인 차원이 모두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성인이 육신의 고통과 싸워 이기는 것은 아름다운 죽음을 구성하는 한 가지 요소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술피키우스 세베루스는 마르티누스가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할 일을 꾸준히 해나갔음을 계속해서 상기시키고 있다. 질병은 그같이 끈기 있는 자세에 대립되는 요소로 언급될 뿐이다. “벌써 며칠 전부터 극심한 열이 그를 괴롭히고 있음에도 그는 전혀 멈춤없이 신의 일에 열중했다.” 이 같은 육신과 정신의 대립은 이야기 전반을 지배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기도와 철야로 밤을 보내던 그는 쇠약해진 육신이 정신을 섬기도록 만들었고….” 흔들림없이 기도에 열중하는 마르티누스를 묘사할때 쓰인 ‘인빅투스 스피리투스invictus spiritus’, 즉 불굴의 정신이라는 표현은 육신에 대한 궁극적 승리를 통해 죽음에 대한 승리를 보여주는 성인의 자세를 잘 요약하고 있다.--- pp.128-129 3-3 죽어가는 타인 앞에서 임종 환자와 살아 있는 인간 대 인간의 관계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죽음을 앞둔 사람과도 중요한 어떤 것을 아직 주고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사람을 돌보는 임무의 가치는 바로 여기서 확인된다. 죽어가는 시간, 마지막으로 주어지는 개인적인 시간에는 만남과 교류, 공유가 가능한 환경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게 좋다. 간호교육 기관에서 바람직한 행동 규칙으로 가르쳐온 ‘적절한 거리 두기’는 이제 윤리적으로 더 정당한 개념으로 바뀌고 있다. ‘적절하게 곁에 있기’의 개념이 그것이다. 다시 말해 임박한 죽음이 모든 관계를 위협하는 순간에도 타인을 정성껏 대접하고 도와주고 애정을 기울이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의료직 종사자들은 간호의 개념을 재발견하는 작업을 통해 개인적이고 제도적인 윤리적 참여의 의미와 가치를 보여주는 의료적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pp.141-142 의료 서비스 안에서 죽음을 생각하려면, 그리고 의료 서비스를 통해 죽음을 보다 잘 받아들이려면 의료행위의 의미에 관해 의문을 품는 일을 수용해야 한다. 또한 의료행위를 환자 개인과 그 가족, 의료진을 연결하는 관계의 연속성 안에 위치시켜야 하며, 의료행위가 인간에게 무엇보다도 기대와 희망을 주는 활동이라는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죽음을 앞둔 개인을 존엄한 방식으로 배려한다는 것, 그처럼 불확실한 시간에 개인이 겪는 일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은 그의 죽음을 미리 이야기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것, 그를 삶에서 앞서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 시간은 제한적이고 불확실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측정할 수 없는 의미를 지니며, 환자 개인과 구축하고 유지해야 할 관계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책임은 그래서 더 중요하다. 죽음을 앞둔 개인에게 인간 공동체의 가운뎃자리를 인정할 경우 우리는 존엄성이라는 개념의 원칙 자체에 다가가게 된다. 왜냐하면 그 개인에게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존재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 p.1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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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결한 필치로 그린 오늘날 죽음의 쟁점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특히 ‘죽음’의 불안은 더더욱 그렇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맞이할 수밖에 없는 그 사건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불안의 정확한 정체는 무엇일까? 어쩌면 현대인은 더이상 생명활동 정지 이후, 즉 사후세계나 구원 또는 환생 등에 대해서는 크게 고민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한줌 먼지가 되어 거대한 자연의 연쇄고리로 돌아간다, 고 가볍게 생각하면 그만이다. 의료과학기술 시대의 죽음이 불러일으키는 불안은 전통적 세계와는 그 결이 사뭇 다르다. 이 책은 죽음을 둘러싼 오늘날의 쟁점과 의문들을 다룬다. 의학과 생물학, 윤리학, 철학, 사회학 등 다양한 배경의 학자 일곱 명이 간결한 필치로 새로운 ‘죽음의 패러다임’을 모색해나간다. 사실 사회가 고도로 현대화되면서 죽음과 사후세계에 대한 풍부한 상상은 완전히 깨져버렸지만, 의료과학은 단지 기술적 수단을 동원해 죽음을 관리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죽음이 제기하는 질문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단지 숨을 쉬게 하고 심장박동을 뛰게 하는 것만으로 죽음이란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종교도, 의학이데올로기도 쟁점화하지 못하는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탐색한다. 이 과정에서 죽음을 정의하는 기준이 얼마나 세밀하고 복잡한 성격을 띠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제기하는 윤리적인 문제는 무엇인지 등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난다. 또 죽는다는 것에 관해 현대인들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죽음의 공포가 전통사회와 달리 어디로 이동했는지 등도 명료하게 알 수 있다. 아울러 과거 사회의 영웅이나 성인이 제시하던 ‘아름다움 죽음’을 대신할 새로운 ‘좋은 죽음’의 조건은 물론, 죽음을 앞둔 병실 침상 위의 사람들에게 주변인들이 어떤 태도와 원칙을 가져야 할지 등을 조언해준다. “늙는 것이 죽기보다 두렵다” 현대인들은 삶에서 죽음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 듯 보인다. 간혹 유명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화제가 되기도 하지만, 일상에서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를 중얼거리며 사는 이는 거의 없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자본주의사회의 상품에 휘둘려 삶에만 눈이 쏠려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현대 의료기술이 발달하면서 죽음에 대한 개념, 세계관이 바뀌어서일 수 있다. 이 책은 의료과학의 발전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탁월하게 보여준다. 두드러진 변화 중 하나는 ‘공포의 이동’이다. 이제 사람들은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자신을 동일시하기보다는 나이 많은 사람이 생명의 쇠퇴를 겪고 있는 모습에 자기를 투사한다. 죽음의 공포는 저세상의 지옥에 대한 두려움에서 이 세상에서의 고독사, 그리고 노쇠에 대한 두려움으로 이동했다. 젊음에 대한 갈망, 노후생활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오늘날 ‘죽음의 고뇌’를 채우는 실질적 내용들인 것이다. 신께 매일의 안녕과 내세에서의 구원을 기도하던 간절함이 오늘날에는 신체와 정신이 쇠퇴하지 않기를 소망하는 것으로 사고방식의 큰 변화가 일어났다. 또한 각종 ‘위험’에 대한 넘쳐나는 경고의 한 연원도 죽음에 대한 인식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위험한 것투성이다. 불량식품, 성폭행, 연쇄살인, 사이코패스, 화학물질, 미세먼지, 신종 전염병…. 뉴스의 헤드라인을 수놓는 사회의 위험 요소들은 실제로 위험하기도 하지만, 그것에서 ‘충격’을 받는 우리의 인식 배경에는 그것에 더한 무엇이 있는 것 같다. 바로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한 당혹감이다. 의료의 혜택이 확산됨에 따라 예전처럼 비명횡사하는 사람이 크게 줄면서, 점점 죽음은 “놀라운 일을 넘어 충격적인 일”로 여겨진다. 갑작스러운 죽음을 좀처럼 쉽게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사회의 보호체계를 강화하는 각종 대책을 강구하게 된다. 말하자면 이 책의 공저자가 지적하듯이 “고도로 현대화된 사회에서는 위험으로부터의 보호를 요구하는 것이 죽음을 거부하는 첫 번째 방법이 되어가고 있다.” 그들을 ‘살아 있게’ 하지 말고 ‘살아 가게’ 하라 신화와 종교의 시대에는 그에 걸맞은 나름의 죽음의 패러다임, 암묵적으로 매뉴얼화된 행동양식이 있었다. 이 책은 《일리아스》나 《오디세이아》와 같은 고전 텍스트를 통해 신화시대의 죽음에 대한 태도와 애도의식 등을 추론하는가 하면, 4?5세기경의 기독교 성인전聖人傳에 나타난 죽음의 패러다임을 세밀하게 분석하기도 한다. 이는 무엇보다 죽어가는 타인 앞에서 난처해하는 현대인들에게 비교 사례를 제공하기 위함이다. 사실 신화와 종교의 시대는 저물었지만, 그 자리를 의료과학이 완전히 대체하고 있지는 못한 상황이다. 우리가 죽음을 떠올릴 때 흔히 연상하는 이미지, 즉 차가운 병실에서 온갖 의료기기를 주렁주렁 매단 채 쓸쓸히 숨을 거두는 장면은 그런 상황의 문제점을 분명하게 나타낸다. 주류 의학이데올로기는 생명을 연장하는 일에는 강력한 의지를 드러내지만, 죽음을 앞둔 사람과 중요한 어떤 것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병원이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인간적으로 합당한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한 상황인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죽음의 장소는 다름 아닌 병원이라는 사실을 상기해볼 때 이는 매우 불행한 일이다. 인간에게는 단지 ‘살아 있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공저자 에마뉘엘 이르시는 호스피스 정신의 위대한 전통을 옹호하는 한편, 수십 년 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임종 간호에 대한 새로운 접근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는 의료의 궁극적 의미를 다시 한 번 성찰하도록 하는 동시에, 오늘날 환자와 그 가족과 의료인들이 ‘위로의 윤리’와 휴머니티의 원칙에 주목하도록 이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