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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 시인의 2주기에 출간된 세 번째 유고집. 그가 독일에 머물며 한국일보 지면 ‘시로 여는 아침’에 연재한 짧은 산문과 시 50편을 엮었다. 자신이 아끼는 시를 멀리 떨어진 한국의 독자들에게 실어 보내며 느꼈을 마음, ‘다른 이가 시와 함께 보낸 시간을 상상하는 데에서 오는 따스함’을 잘 알던 그가 보낸 따스한 마음을 느껴본다. - 에세이MD 김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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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4
The Last Train ― 오장환 14 감자에 싹이 나서 잎이 나서, ― 유형진 18 강우降雨 ― 김춘수 20 고생대 마을 ― 안현미 24 고향 ― 김종삼 28 과일가게 앞에서 ― 박재삼 30 국화꽃 그늘을 빌려 ― 장석남 34 그대 영혼의 살림집에 ― 최승자 38 그에게는 많은 손목시계가 있다 ― 류인서 40 꽃 ― 파울 첼란 44 꿈 ― 염명순 48 나무 ― 천상병 50 나뭇잎 배 ― 박홍근 52 눈물 ― 김현승 56 들 ― 안토니오 마차도 60 로렐라이 ― 하인리히 하이네 64 마늘밭 가에서 ― 안도현 68 마음의 그림자 ― 최하림 70 먼 후일後日 ― 김소월 72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 74 무밭에 서서 ― 최문자 76 물과 빛이 끝나는 곳에서 ― 이성복 80 바람에 날려가다 ― 밥 딜런 82 반지 속의 여자 ― 정은숙 86 밤 ― 두보 90 버들치 ― 차창룡 92 부빈다는 것 ― 김신용 96 빈녀음 ― 허난설헌 100 사랑 ― 김근 102 사랑 ― 김수영 104 서적 ― 조연호 106 속담 ― 옥타비오 파스 108 쇠귀나물 ― 황학주 110 수도에서 ― 에리히 프리히드 114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 신석정 116 양치기 30 ― 알베르투 카에이루 120 어느 날 나의 사막으로 그대가 오면 ― 유하 122 어느 해거름 ― 진이정 126 여승 ― 백석 128 여행 ― 나즘 히크메트 132 울고 싶은 놈 ― 이시하라 요시로 134 월식月蝕 ― 김명수 138 작은 비엔나 왈츠 ―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142 잡담 길들이기 3 ― 마종기 146 장미의 내부 ― 라이너 마리아 릴케 150 전생에 들르다 ― 이병률 152 전설 ― 에바 슈트리트마터 154 찻집 ― 에즈라 파운드 158 테렐지 숲에서 생긴 일 ― 이시영 160 호랑이는 고양이과다 ― 최정례 162 |
허수경의 다른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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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 시란 더이상 물러설 수 없는 삶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저에게 시인은 탄생과 탄생을 거듭하다가 어느 날 폭발해버리는 존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를 쓰고 시를 읽는 제 마음가짐은 언제나 같습니다. 한 편의 시가 쓰일 때마다 새 언어, 새 목소리가 나와야 한다는 생각이지요. 그렇지만 그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제가 저를 계속 베껴 쓰는 일만은 없기를 바랍니다.
--- 「시인의 말」 중에서 타인의 등에다 얼굴을 부비기, 나는 언제 마지막으로 했던가. 서로에게 짐 지우지 않고 가만가만 닿을 듯 말 듯 그렇게 타인에게 느슨하게 나를 기대고 있는 것. 우리들은 안개가 아니라서 “제 몸 풀어 자신을 지우”지는 못하지만 타인이 내 무게를 가만가만 받아내는 것을 살포시 느끼는 순간, 내가 마치 그대의 어깨를 가만가만 만져주는 자연의 안개가 된 듯 어떤 아우라가 된 듯싶은 순간, 그 순간에 나는 갑자기 가벼워지고 자유로워지고 그러다가 서글퍼진다. 이 순간이 쉽게 달아날 것 같아서. --- 「부빈다는 것―김신용」 중에서 시의 행과 행 사이에는 단어들만 존재한다. 그 단어들이 뿜어내는 향기만이 존재한다. 흔들린다. 공중에서. 그냥 은은히 흔들리며 그 공명을 공기 속에 줄 뿐이다. 그리고 너의 눈과 나의 눈은 꽃을 피우기 위하여 물을 준다. “내가 뒤따라갔던 공기 속의 그 돌”, 그건 아마도 어느 아침에 당신이 일어날 때 아무 이유 없이 눈앞에 떠오르는, 아무 이유도 없이 그저 눈앞에 어른거리는 그 무엇일지도 모른다. 유유히 공중에 떠 있는 시어 사이에 흔들거리는 당신의 존재, 그것 자체일지도 모른다. 첼란의 언어는 꼭꼭 씹어서 천천히 넘겨야 하는 불안한 위장병을 가진 이들의 언어이다. --- 「꽃―파울 첼란」 중에서 참 신기하기도 하지, 시 한 편 혹은 노래 한 곡이 한 세월을 손에 꽉 쥐고 있었다니. (……) 이십대가 끝나갈 무렵이라고 세계가 몰락하는 것도 아닐 텐데 어쩌면 그렇게 아찔한 비극의 이미지를 꼭 붙잡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 세월이 참도 좋다. 그때는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위하여 목숨을 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단호함과 매서움과 분노와 설움이 내게 있던 때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름다움에 매혹된 한 영혼은 영원히 촉촉했다. --- 「작은 비엔나 왈츠―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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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당신이여, 당신의 연인에게 오늘 이 시를 읽어주시기를!
“사랑의 순간이 우리 모두를 평화주의자로, 아름다움 앞에 고개를 숙이는 자로 변하게 하는 기이함을 되새기며 이 시를 읽는다.” 폐허가 된 옛 도시를 걸으며 사라진 것들의 영혼을 글로 남겼던 시인 허수경의 세번째 유고집 『사랑을 나는 너에게서 배웠는데』를 그의 2주기인 2020년 10월 3일에 선보인다. 독일에 살던 그가 2009년 한국일보 지면 ‘시로 여는 아침’에 연재한 짧은 산문과 시 50편을 엮었다. 지상을 떠나기 전 남겼던 원고 ‘가기 전에 쓰는 시들’ 속 ‘시’에 빗금을 긋고 ‘글’로 바꾸어 적었던 허수경 시인. 그에게 시란 “더이상 물러설 수 없는 삶의 내용”이었다. 『사랑을 나는 너에게서 배웠는데』는 “탄생과 탄생을 거듭하다가 어느 날 폭발해버리는” 존재인 시인들을 향한 허수경의 “개인적인 사랑 고백”이자 “이들의 시를 읽을 수 있는 영광의 시간에 대한 찬가”이다(「시인의 말」). 그가 전하는 50편의 시에는 ‘아린 무의 속살을 베어문 듯한 싱싱한 삶의 순간’이 있다. 1992년 늦가을 독일로 떠난 허수경 시인은 작은 방 하나를 얻어놓고 뮌스터 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했다. 한 인간의 마음속에는 자신이라는 게 하나만 존재하지 않는다던 그에게 모국을 떠나 낯선 타지에 사는 일은 전혀 몰랐던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발견한 수많은 나와 타자, 다양한 시간과 공간을 그는 시와 폐허가 된 사원의 침묵으로 들여다보았다. 몇 밀리미터의 지층으로 남은, 누군가가 지상에서 보낸 시간의 흔적을 찾아내고 그 속에 존재했을 무수한 감정들을 되짚어보는 작업을 통해 그는 새로운 시를 끊임없이 찾아냈다. 고고학에 대한 그의 열망, 사라진 존재를 기억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은 그가 시로, 글로 표현하고자 했던 바와 밀접하게 맞닿아 있었는지도 모른다. “작은 메모지에 베껴서는 어디를 가든 들고” 다녔던 시 속에는 “사라져가는 것들이 가장자리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107쪽). 수많은 발굴지를 다니며 지상의 삶과 지하의 삶이 맞닿아 있는 세상을 살아가던 허수경에게 시는 “땅속에서 여물어가는 것과 땅 바깥에서 허물어져가는 세상을 생각하는 시간, 그 시간 속에서 길러낸” 말들이었을 것이다(69쪽). 여물어가는 것 속에서 허물어져가는 것을, 사랑 속에서 이별을, 번영 속에서 쇠락을, 삶 속에서 죽음을, 존재 속에서 그 소멸을 보았던 그. 하지만 이는 허튼 것도 슬픈 것도 아니라 단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우리를 다독인다. 땅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철기시대 소년의 백골에게 속으로 말을 건네던 시인의 모습(『나는 발굴지에 있었다』), 잘게 썬 육회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이 소는 몇 살이었을까. 어떤 새벽과 아침과 낮과 저녁과 밤을 보냈을까” 생각하던 시인의 모습(『오늘의 착각』)을 기억하시는지. 그런 그이기에 시를 읽으면서도 “싹 자란 감자” “국화꽃 그늘” “울타리 싸리”에서 “서늘하고도 말할 수 없는 애잔함의 자리”를 짚어낸다(37쪽). 지나간 것들의 그림자를 항상 의식하며 살았던 그이기에, 번역될 수 없는 작고도 미세한 순간들은 그가 남긴 글 속에서 “선명하게, 그리고 사라질 듯 아련하게” 반짝이고 있다(71쪽). “꿈을 불어로 꾼 날은 슬프다/다시는 시를 못 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염명순, 「꿈」 부분)라는 시의 구절은 벗어던질 수 없는 유목민의 삶을, 지상을 떠나지 않는 한 일상은 ‘고향’보다 더 막막하고 집어치우고 싶은 성지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정은숙의 「반지 속의 여자」 속 “스무 살, 서울로 떠나는 내게/경제 비상용으로 끼워진 금반지”라는 구절에서는 자신이 독일로 떠날 때 들고 온 비상용 반지를 들고 전당포 앞을 서성거렸던 기억을 불러온다. 나이가 들어 굵어진 손마디에서 쉽게 빠지지 않던 반지를 겨우 빼냈을 때, 그 금빛이 비추던 것은 그것을 끼고 살았던 나날, 이제는 내 것이라고 할 수도 없는, “생의 하사품, 추억의 금빛 물결”이었다. 그런가 하면 그에게 시란 “순진한 희망”이 허용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현실에서는 결코 공존할 수 없는 “폭탄”과 “찐빵” “까삼 로켓”과 “따뜻한 베개”가 나란히 배열되는 글. “모든 것에 희망이 보이고 초라하던 것들이 따뜻한 모습으로 뒤바뀌”는…… “가자로 향하는 이스라엘 비행기들이 실은 것이 폭탄이 아니라 잘 쪄낸 찐빵이었으면 좋겠다. 이스라엘로 향하는 하마스의 폭탄이 까삼 로켓이 아니라 솜이 잘 든 따뜻한 베개였으면 좋겠다. 당신은 나에게 정말 순진하다고 말할 것이다. 얼마나 오래된 분쟁인데 그런 순진한 희망이 끼일 자리가 있겠는가, 라고. 그러면 나는 당신에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무슨 다른 방법이 있느냐고.” ―김종삼의 「고향」에 덧붙이는 글 중에서 “간절한 한 사람의 시간을 붙들고 있는 것, 그 시간을 공감하는 것, 그것이 시를 쓰는 마음”이라고 말하던 그. 시인 허수경에게 시를 함께 읽는 일은 “살아내기 힘든 지경까지 삶에 불행이 찾아왔을 때” 간절히 의지하고 매달렸던 무언가를 다른 이와 공유하는 일이었다(『가기 전에 쓰는 글들』). 그럼으로써 당신의 아픔은 내 아픔이 되고 내 아픔은 당신의 아픔이 된다. 시를 읽을 때마다 ‘다른 이가 시와 함께 보냈을 시간을 상상하는 데에서 오는 따스함’을 누구보다 잘 알던 그다. 자신이 아끼는 시를 멀리 떨어진 한국의 독자들에게 적어 보내며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자신이 힘들었던 순간마다 품에 가까이하던 시를 다른 누군가와 나누어, 자신의 간절함이 시의 마디마디마다 남긴 온기로 그를 다독여줄 수 있기를 바라진 않았을지. 이번 유고집에는 바다를 닮은 파란색의 옷을 입혔다. 어린 시절,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던 할머니가 그에게 “니 그, 바다 때깔, 보나, 니가 글을 쓸 줄 알게 되몬 그 때깔 이바구 먼저 써다고” 하던 날, 그 바닷빛을 가슴에 끌어넣으며 그 순간의 물빛을 기록해야겠다고 다짐했던 시인이다. 글을 쓸 줄 모르던 할머니가 봄날의 바닷빛을 바라보며 느꼈을, 글로 표현되지 못한 일렁이던 파랑을 바라보던 한순간을 가슴에 끌어넣었던 순간부터 그는 시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기록되지 못할 작은 순간들이 “이 지상에 존재할 수 있는 권리를 시로 붙잡아둔 시인”(『나는 발굴지에 있었다』)들의 평안을 빌던 허수경. 그가 사랑으로 읽은 50편의 시, 사랑으로 만난 50명의 시인을 따라 시라는 아름다운 폐허를 거닐어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