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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노예제도
1. 영국 정부와 노예무역 2. 미국 남북전쟁(Ⅰ) 3. 영국의 목화무역 4. 미국 남북전쟁(Ⅱ) 5. 트렌트 호 나포 소식이 런던에 미친 영향 6. 영국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감정 변화 2부 제국주의 7. 동인도회사, 그 역사와 결말 8. 선전포고, 그리고 동방문제의 역사 9. 러시아와 중국의 무역 10. 교역이냐 아편이냐? 11. 멕시코에 대한 간섭 3부 혁명과 전쟁 12. 중국과 유럽의 혁명 13. 스페인 혁명 14. 보나파르트 암살 미수 15. 어떤 역사적 비교 16. 시칠리아의 가리발디 4부 세계의 사회와 정치 17. 경기과열이 정치에 미치는 영향 18. 사형 19. 성직자와 10시간 노동을 위한 투쟁 20. 강요된 이주 21. 미국, 유럽 무대에 등장하다 22. 파업과 노동의 가치에 대하여 23. 노동문제 24. 영국의 중산계급 25. 공장 노동자들의 처지 26. 영국의 정신장애인 증가 27. 프랑스의 빵값 규제 정책 28. 러시아 농노해방 문제(Ⅰ) 29. 러시아 농노해방 문제(Ⅱ) 30. 러시아 농노해방 문제(Ⅲ) 5부 세계의 경제와 금융 31. 자유무역과 차티스트들 32. 빈곤과 자유무역, 그리고 다가오는 경제위기 33. 오스트리아의 파산 34. 영국의 무역위기 35. 유럽의 경제위기 36. 보나파르트의 재정 책략과 군의 압제 37. 제조품과 무역 |
Karl Heinrich Mar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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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마르크스, 저널리스트로 탁월했다
세계의 중심 런던에서 격동의 1850년대를 해부하다 칼 마르크스는 지금까지 경제학자, 철학자, 정치이론가로 널리 알려져 왔고 또 평가받아왔다. 그 전에 저널리스트로 활동을 먼저 시작했는데도 그간 이에 대한 평가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러시아와 동구권이 공산주의를 버림에 따라 한때 칼 마르크스의 이론도 덩달아 외면당했다. 그러다 서구 자본주의 사회에 최악의 경제위기가 닥침에 따라 칼 마르크스의 이론도 다시 조명을 받기에 이르렀다. 최근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Why Marx Was Right)라는 책이 나와 널리 읽히고 있다. 노동가치설이니 소외니 과학적 사회주의니 하는 마르크스의 이론은 무시하도록 하자. 칼 마르크스가 저널리스트로서 발표한 글들을 보면 이런 이론을 놓고 따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1850년대,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60년도 더 전인데도 그가 관심을 갖고 쓴 글들을 보면 인간사가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보면 별로 달라진 게 없다. 모두가 이기주의를 바탕으로 움직이고, 돈을 추구하고 있다. 이런 마당에 이론이 뭐가 그리 중요할까? 경제적 격변을 예측하지 못하기는 마르크스가 활동하던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데, 경제이론이란 것이 과연 있기나 하는 것인지 회의마저 든다. 마르크스가 저널리스트로 처음 기사를 쓴 것은 1842년 2월이었다. 1841년에 예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사회로 나와서 학계에서 자리를 얻으려고 노력하다 실패한 뒤의 일이었다. 독일 드레스덴의 신문인 ‘도이체 유르뷰허’(Deutsche Jahrbucher)에 기고한 것으로, 당시 프리드리히 빌헬름(Friedrich Wilhelm) 4세의 검열 조치에 항의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기사는 검열관의 반대로 신문에 실리지 못했으며, 이 신문은 결국 폐간되었다. 이어서 마르크스는 쾰른의 ‘라이니쉐 차이퉁’(Rheinische Zeitung)의 문을 두드렸다. 1842년 5월에 처음 기사가 실렸다. 지방의회가 언론의 자유를 놓고 벌이는 논쟁에 관한 글이었으며, 그는 이 글로 저널리스트의 자질을 충분히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권력 앞에서도 할 말은 하는 용기와 의지가 저널리스트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이 아닌가. 마르크스는 1842년 10월에 이 신문의 편집인을 맡는다. 이때도 그는 좌파 기자라고 해서 특별한 대우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며 이런 말을 남겼다. “연극비평 같은 글에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원칙 같은 것을 슬그머니 집어넣는 것은 부적절할 뿐만 아니라 부도덕하기도 하다. 그러니 공산주의에 대해 논하기를 원한다면, 적절한 방법으로 완벽하게 해주길 바란다.” 이렇듯 열정적으로 편집에 임했으나 이 신문도 1843년 3월에 폐간되는 운명을 맞았다. 그는 1848년에 쾰른에서 급진적인 신문 ‘노이에 라이니쉐 차이퉁’(Neue Rheinische Zeitung)을 창간했다. 그는 평생 독어와 영어로 기사를 많이 썼다. 그러나 그의 기사를 가장 많이 실은 곳은 바로 미국의 ‘뉴욕 데일리 트리뷴’(New York Daily Tribune)이었다. 마르크스의 이름으로 실린 것이 350건, 그의 평생 동지인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의 이름으로 실린 것이 125건, 두 사람의 공동 집필로 실린 것이 12건 등 총 487건의 기사가 실렸다. 마르크스와 ‘뉴욕 데일리 트리뷴’의 인연은 1848년 시작되었다. 전 유럽에 혁명이 휘몰아친 해였다. ‘뉴욕 데일리 트리뷴’의 편집자이던 찰스 A. 다나(Charles A. Dana)는 처음 쾰른을 방문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 ‘뉴욕 데일리 트리뷴’에 들어온 그는 1848년 유럽에서 일어난 혁명의 결과를 취재하기 위해 8개월 동안 유럽을 여행 중이었다. 당시 29세였던 다나는 독일어도 곧잘 했다. 그가 현지에서 급진적인 시인 프라일리그라트(Ferdinand Freiligrath)를 만났고, 이 시인이 다나를 칼 마르크스에게 소개시켰다. 마르크스는 당시 겨우 30세였지만 그해 초에 엥겔스와 함께 『공산당 선언』을 쓴 터라 독일은 물론이고 유럽 대륙의 사회주의 최고의 선전자가 되어 있었다. 그 만남이 있고 3년 뒤인 1851년에 다나가 마르크스에게 ‘뉴욕 데일리 트리뷴’에 1848년 이후 유럽의 변화에 관한 글을 시리즈로 써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호러스 그릴리(Horace Greeley)가 1841년 창설한 ‘뉴욕 데일리 트리뷴’은 진보성향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색채가 강했다. 동시대의 한 언론인은 이 신문의 정치적 입장을 “노예제도와 전쟁, 알코올, 흡연, 매춘, 술집, 도박 등에 반대하는 신문”이라고 요약했다. 창간 첫해부터 이익을 남긴 이 신문은 1850년을 전후해 새로운 도약을 위해 세계 정치의 주요 무대에 특파원을 둘 것을 고려하고 있었다. 당시 ‘뉴욕 데일리 트리뷴’이 독자를 20만 명 이상 거느린 세계 최대의 신문이었다는 점과 고정 수입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 동료 엥겔스에게 생계의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던 칼 마르크스의 구미를 당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뒤에 칼 마르크스가 ‘뉴욕 데일리 트리뷴’에 대해 ‘지저분한 누더기’(filthy rag)라고 혹평한 것으로 보아서 본사의 편집진과 마찰이 잦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뉴욕 데일리 트리뷴’은 초기에는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미국에 정치적, 경제적 동요가 있을 때마다 크게 흔들렸다. 특히 1857년의 금융위기가 ‘트리뷴’을 강타한 것으로 전해진다. 광고와 판매부수가 크게 떨어졌다. 신문에 게재되는 마르크스의 기사도 줄어들었고, 따라서 마르크스의 원고료도 줄어들었다. 이어 ‘트리뷴’이 재정적으로 회복의 기미를 보이자, 다시 미국 남북전쟁이 발발했다. 이때 신문사가 외국 특파원들을 모두 해고했으나 마르크스만은 예외로 했다. 그러나 그 관계도 오래 가지 않았다. 1862년 3월에 다나가 마르크스에게도 기사를 더 이상 송고하지 말라는 편지를 썼던 것이다. 이 신문은 1924년에 ‘뉴욕 헤럴드 트리뷴’(New York Herald Tribune)이라는 이름으로 ‘뉴욕 헤럴드’와 합병했으며, ‘뉴욕 헤럴드 트리뷴’은 1966년에 문을 닫았다. 마르크스의 기사들을 보면 현장성이 떨어지고 객관적인 시각이 다소 부족한 반면에 기사마다 역사적 분석은 아주 풍부하다. 하지만 당시 마르크스가 처했던 상황을 보면 어찌할 수 없었을 것 같다. 조국 독일은 물론이고 벨기에와 프랑스에서도 추방당했다가 영국에 정착해 시민권도 없이 지내던 마르크스는 현지의 저널리스트로서는 조건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혁명성이 강한 그로서는 다른 저널리스트와 여건이 같았다 하더라도 고위 관리들을 정보원으로 두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언론을 가까이 하려는 관리들은 뭔가 속셈을 품고 있을 개연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브리티시 뮤지엄’ 열람실에 앉아 외국 신문과 자료를 뒤져 중요 사건의 배경을 전한 것이 어쩌면 다른 저널리스트와는 다른 마르크스만의 강점일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미국 저널리스트 머레이 켐프턴(Murray Kempton)이 마르크스를 평가한 대목을 보자. “저널리즘에 대해 품는 환상들 중에서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이 정보원에 대한 접근에 관한 환상이다. …… 사건들에 정통한 사람들은 그 사건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으며, 알고 있을 때에는 거짓말을 하게 된다. …… 마르크스는 어떤 유혹도 느낄 필요가 없었을뿐더러 접근의 기회마저도 차단되어 있었다.” 정보원을 고의로 기피한 유명 저널리스트는 마르크스 외에도 많다. 탐사 보도 전문 저널리스트인 I. F. 스톤(Isidor Feinstein Stone)도 그랬고, 월터 리프만(Walter Lippmann)도 소재를 확보한 뒤에는 정보원을 애써 피한 것으로 유명하다. 마르크스의 기사들을 읽다보면, 세상 모든 일을 경제로만 접근하려 한다는 일반적인 평가와는 달리 적어도 언론에 발표한 글에서는 분석이 꽤 깊다는 인상을 받는다. 국내나 국제 정치판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사회적, 경제적 배경에 초점을 맞추고, 정치인과 정부의 발언이나 조치 뒤에 깔린 진짜 동기를 찾으려 애를 쓰는 흔적이 역력하다. ‘뉴욕 데일리 트리뷴’에 게재된 총 350건 중에서 이 책에 실린 37건의 글에서도 그런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사건을 단순히 전달하는 역할에서 그치는 글이 하나도 없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치면 ‘특파원 코너’ 정도로 보면 되겠다. 한 예로 미국의 남북전쟁을 보자. 우리에겐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노예제도 폐지를 내세우며 치른 전쟁으로 각인되어 있는데, 그의 기사를 보면 노예해방은 그 전쟁의 결과였을 뿐 그 목적은 연방의 존속인 것으로 확인된다. 당시 세계를 이끌던 최고 강대국으로 노예무역 폐지에 앞장섰던 영국이 남북전쟁 당시 노예제도를 이미 폐지했던 북부를 지원하지 않고 노예제도의 확대를 외치던 남부에 우호적이었다는 사실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영국의 진짜 목표는 미국 연방의 해체였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분석이다. 마르크스가 당시 강국으로 부상하던 미국에 대해 그다지 부정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묘한 기분이 들게 한다. 그는 10년 넘게 ‘뉴욕 데일리 트리뷴’의 특파원으로 활동하면서도 미국은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 영국 노동자들의 근로시간을 10시간으로 제한하자는 ‘10시간 노동법’을 둘러싼 이해 당사자들의 움직임을 분석한 기사도 흥미롭다. 당시에 영국의 많은 언론들은 그 법이 지배계층의 양심에 따른 결과라고 전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이 법의 통과에 있어서도 양심이란 것이 얼마나 제한적인지에 초점을 맞춘다. 예를 들어 같은 종교인이면서도 국교회 성직자냐 가톨릭 성직자냐에 따라 ‘10시간 노동법’에 대한 입장이 갈라진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것보다 교세가 더 중요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당시에 영국 사람들 중에서 유럽이 아닌 지역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보인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영국과 프랑스가 중국을 침략했을 때 그 진짜 목적이 아편무역을 강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영국에서 당당히 말할 수 있었던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잘은 모르지만, 마르크스에 대한 평가는 제대로 되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지금도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미국 신문발행인들 앞에서 다음과 같은 농담을 던지던 1961년과 비슷한 수준이 아닐까 싶다. “1851년에 ‘뉴욕 데일리 트리뷴’이 칼 마르크스라는 이름의 보잘것없는 저널리스트를 런던 특파원으로 고용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회당 5달러라는 괜찮은 원고료를 받으면서도 지속적으로 올려달라고 졸랐다는군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 친구는 다른 생계수단을 찾아 나섰고, 결국엔 ‘트리뷴’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이 세상에 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 혁명과 냉전의 씨앗을 뿌리게 될 그 사상에 풀타임으로 자신의 재능을 받치게 되었지요. 만일 뉴욕의 그 자본주의 신문이 그에게 원고료를 조금 더 올려주고 계속 특파원으로 활동하게 했더라면, 아마 역사는 크게 달라졌겠지요.” - 옮긴이의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