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대 합격 통지서를 손에 쥐자마자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피아노 학원 문을 두드렸다. 그렇게 군 입대를 앞둘 때까지 나는 1년 반 동안 피아노에 온 열정을 쏟았다. 이렇게까지 빠질 줄은 나도 몰랐다. 그림이고 나발이고 다 뒷전이었고 오직 피아노만 쳤다. ‘뭐 하나에 미쳐 봤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다면 이 시기의 피아노다. 미대보다는 음대에 더 자주 출몰해 도둑 연습을 일삼던 내게 이듬해 피아노과 신입생이 복도에서 90도 인사를 했을 정도였으니까. 나는 “그래, 대학 왔다고 너무 놀지는 말고.”라며 덕담을 건네고선 바이엘 악보를 옆구리에 끼고 홀연히 사라지곤 했다.
--- p.24
잘 해내고 싶은 마음뿐이다. 망하지 않아야 한다. 이야기가 필요하다. 요즘 유행하는 에세이 제목처럼 실패하고 상처받아도 괜찮다며 등을 토닥이는 이야기, ‘다들 그렇잖아요?’라며 무엇을 대차게 시도했다가 망한 이야기, 안 됐던 경험을 빌려 삶의 소소함을 공유하며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이야기 같은 건 다 필요 없다. 그런 이야기들 이제 지겹다. 노력하고 노력해서, 또 운도 따라 줘서 결국에는 누가 봐도 멋지게 목적을 달성하는, 그런 성공적인 서사가 내겐 절실하다.
(...) 어딜 둘러봐도 모두가 힘든 시대에, 불평등과 고통이 넘치는 세상에, 최근 읽은 소설의 한 구절처럼 ‘망함조차 없이 이어지는’ 총체적 허무의 세계에서, 나 정말 죄인의 심정으로, 오로지 독백으로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나는 내일이 기대돼. 그것도 아주.’
--- p.86~86
막대한 부담과 공포 속에서도 결국 내가 준비한, 하고 싶은 것을 다 했다. 마지막 음을 누르자 뭔가를 이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이지 이 순간은 죽을 때까지 기억날 거 같다. 팔짱 낀 무심한 관객이 아니라 나를 적극적으로 응원하고 지지해 주는 사람들의 따뜻한 눈빛이 가득했던 그 환대의 공간을 잊지 못할 것이다. (...)
공연 당일만큼이나 생생하고 소중한 기억이 있다. 홀로 공연을 준비하며 매일 피아노 연습실로 출퇴근했던 길이다. 퇴근하는 직장인들에 섞여 어둑해진 도시를 걸으며 생각했다. 불가능해 보이던 미션을 하나씩 채워 나가고, 단 하루의 미래를 상상하며 뭔가를 만드는 짓이 정말 행복하더라. 석양의 노란빛이 건반을 물들이는 8번 방 피아노 앞에서 버벅거리는 손가락이 제자리를 찾아가며 손에서 마침내 ‘음악’이 흐른다고 생각할 때마다 자주 희열을 느꼈다. 인생에서 행복과 불행의 총량이 결국 평균으로 수렴된다면, 곧 다가올 불행이 걱정될 만큼 과분한 행복을 느꼈던 한 해였다.
--- p.109~110
‘발전’이라는 개념을 삭제한 나는 ‘전문가’와 ‘취미생’이라는 두 테이블이 만나는 가운데에 앉아 그때그때 입맛에 맞는 음식만 골라 먹는 경계인의 포지션을 즐기기로 했다. 필요 이상으로 진지하지 않기로 작정한다. 피아니스트라는 직업이 부담이 되지 않도록 방어한다. 스트레스가 재미를 추월하지 못하게 그어 놓은 내면의 정지선에서 브레이크를 밟는다. 공연할 때는 그 어떤 프로 음악가보다 진지한 태도로 무대에 임한다. 다만 레슨받을 때는 취미생의 가벼운 태도로 돌변해 불리한 상황을 무마한다. 결정적으로 성인 취미반은 선생님에게 이런 멘트를 날릴 수도 있다.
“선생님, 저는 이제 이 연습이 좀 지겹습니다. 안 되는 것은 알지만, 지나가겠습니다. 이제 좀 다른 것을 하고 싶습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뭐 그런 의미가 있겠지. 없으면 말고.
--- p.136~137
“그냥 피아노 치는 게 좋아서.” 작업의 의미를 캐묻는 공격적인 질문에 ‘단지 좋아서’라고 대답하는 것은 왠지 아마추어 같아 보인다. 하지만 내 진심이다. 이어서 속내를 더 꺼낸다. “내가 돋보이고 싶어서요.”
많은 작가들이 그렇듯 나도 내 작업만으로 돈을 엄청나게 버는 것도 아니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가장 우선시할 마음은 내 행복이고 즐거움이다. (...) 공연을 준비하고 건반 앞에서 긴장하고 조급해하고 실수하고 얼떨결에 연주를 마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게 바로 ‘나’라는 사실이 좋다. 다른 이유는 필요하지 않다.
--- p.144~145
간밤에 말이 너무 많았나. 지난 술자리를 후회한다. 왜 갑자기 짧은 순간 열변을 토했나. 행동으로 실천하지도 않는 의제에 관해 마치 오랜 기간 숙고해 온 사람마냥 옳은 말들을 너무 쏟아 냈다. 책에서 본 내용들, 어디서 보기만 했거나 듣기만 했던 멋있는 말들, 국가폭력, 젠더, 장애, 성소수자 등 이런 문제가 중요하다고, 오직 말로만 이루진 세계 안에 편안하게 거주하는 스스로를 바라보며 묻는다. 너 그럴 자격이 돼? 20대 후반의 나는 골방 예술가를 벗어나 부당한 사회를 바꾸려 거리로 뛰쳐나온 현장 예술가를 동경했다. 내 방향도 그쪽일 거라 확신했다. 거긴 뜨거웠다. 그러나 뜨거움이 지나가자 내 진짜 모습을 보았다. 나는 요즘 좁은 방에 스스로를 격리시키고 피아노만 친다. 이런 나도 액티비스트일 수 있을까.
--- p.171
나는 창작인으로서의 삶에 더 근본적인 물음이 생겼다. 예술가로서 더 많은 사람들이 내 작품을 향유할 거라는 기대감, 예술가로서 셀럽이 되길 희망하는 욕구를 도대체 어느 기준까지 설정하고 살아야 할까? 명확한 기준이 없다면 불빛은 언제나 허상이 되지 않을까? 언제나 다음 불빛을 향해 끝없이 달려가는 피곤이 인생 전체를 지배하지는 않을까? ‘호오오오오옥시 모르니까!’라는 심정으로 쏟아붓는 노력, 더 잘될 거라는 가능성은 오히려 ‘가능성의 지옥’이 되어 족쇄처럼 삶을 불행으로 인도하지는 않을까?
나 역시 여전히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락스타’를 꿈꾸지만 겉으로는 달관한 척 위선을 자주 부리고, 그 쿨한 위선에 때론 진심이 묻어 있다. 사실 잘 모르겠다. 나는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안 괜찮은 것 같기도 하다. 특히 ‘신진’의 껍데기를 벗고 잡다한 경력이 꽤 쌓인 나와 같은 30대 창작인들은 영화를 보며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지… 실로 궁금하다. 당신의 불빛은 무엇인지, 어디인지.
--- p.207
예술가에게 주어진 불안정한 미래가 꼭 나쁘지만은 않다. 내년에 어떤 계획에 연루되어 무슨 작업을 하고 있을지 아무도 모르고, 나는 그 사실이 자주 기대되고 신난다. 그럼에도 불안은 어쩔 수 없을 때가 있다. 유난 떨고 싶을 때는 이 불안을 공유해 줄 이를 찾아 같이 덜덜 떨다가, 때가 되면 묵묵히 오랜 시간 작업해 보라는 것 이외에는 사실 할 말이 없기도 하다. 그러다 보면 꼭 누군가 손을 잡아 주더라.
--- p.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