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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폭의 빛

한 폭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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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11월 03일
쪽수, 무게, 크기 254쪽 | 264g | 120*188*15mm
ISBN13 9788932039145
ISBN10 8932039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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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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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온 네가 말했다. 너는 양손에 열매를 하나씩 쥐고 있었고 그중에 하나를 나에게 내밀었다. 비닐을 벗기자 잘 익어 빛깔이 선명하고 껍질이 단단한 열매가 보였다. 잠에서 깨어 한창 허기가 졌던 터라 입안에 금방 침이 고였다. 열매를 한 입 베어 물자 투명한 과즙이 팔뚝을 타고 흘렀다. 향긋한 향에 비해 열매는 여전히 시기만 했다.

그치만 열매는 맺지 않았으면 해.
진심을 다하고 싶지 않거든.
--- 「나의 마르멜로」

시계 방향으로 돈다. 그들의 오른편엔 언제나 아름다운 호수가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항상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호수를 바라본다. 왼편에 선 남자는 오른편에 선 여자의 뒷모습만을 본다. 오른편에 선 여자는 왼편에 선 남자의 얼굴을 잊었다. 손을 잡고 있지만 서로가 서로를 떠나고 있다. 그들은 호수를 떠나지 못해서 남겨져 있다. 시간이 흘러 구름이 걷히고 호숫가에 서서히 빛이 들어찬다. 처음과 같은 양의 빛이 호수를 비추고 있다. 어느새 연인은 사라지고 어디에도 없다. 그들이 있던 자리에 빛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
--- 「한 폭의 빛」

아버지는 그럴 때마다 괜찮다고 했다. 괜찮다고 말하면 정말, 다 괜찮아지는 법이니까.
참지 못하면 달아나면 된다. 사는 건 줄기차게 도망가는 것이다. 혹시라도 길을 잃으면 손뼉을 치렴. 그럼 찾으러 가마.
동생은 아버지의 말을 듣고 골똘히 생각하다가 이내 환하게 웃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괄호 안에 온갖 활자를 꾹꾹 눌러 담을 수 있었다.
--- 「( )」

나는 손차양을 하고서 앞을 바라봤다. 행렬을 두고 양쪽으로 갈라진 폐허가 전부였다. 어머니는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걸었다. 앞을 조심해라. 뒤보다는 앞을 말이다. 그렇게 말하며 왼손을 뻗어 자꾸만 허공을 휘저었다. 정말 앞에 뭔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인데요.
다 무너진다.
이미 무너져버렸는걸요.
--- 「행렬」

달라진 일과를 아이들은 여전히 함께한다. 아직 한참 자라나야 하기 때문에 서로를 떠나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 음과 음은 하나가 되었다가 여러 개로 쪼개지고 다시 원래의 형태로 되돌아오기를 반복한다. 새로운 음이 생겨나고 하나의 마디가 완성된다. 마디가 모여 짧은 곡이 되고 아이들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미완의 곡들이 떠오른다.
--- 「음,」

다만 그것이 텅 빈 수족관이었을 뿐이었지만.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수족관이 있는 이 집에 살게 되면서 자연스레 열대어를 기르게 된 것뿐이었다. 단순히 그런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수족관이 처음부터 거기 있었다. 아마 수족관이 없었다면 열대어를 기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 마음의 불안과 죄책감을 좀 덜어낼 수 있었다. 처음부터 다 정해져 있던 것처럼 여기다 보면 내가 벌인 일에 모든 책임을 다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괜찮게 느껴졌다. 그런 마음이었을까. 그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의 의미를 이제야 조금 알 것도 같았다.
--- 「푸른 열대어」

우리가 처음 열차를 타던 날,
그날 나는 나도 모르는 뭔가를 잃어버리고 만 거야.

그날을 회상하며 그녀는 그렇게 말하곤 했다. 당시의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로부터 멀리 지나와서야 나는 그게 일종의 징조가 아니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곤 했다. 지금의 도시로 떠나오고 나서부터 이 동네의 기억을 점차 지워갔으니까.
--- 「얼굴 없는 밤의 초상화」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이불은 여자의 몸 언저리에 축 늘어진다. 방금까지 이불을 쥐고 있던 것이 흔적도 없이 말끔히 사라지고 눈앞엔 텅 빈 허공만이 남아 있다. 다만 이불 끝자락에 살짝 주름이 져 있을 뿐이다.

달아나버렸어.
단지 뒤를 돌아보아서.
--- 「한 겹의 어둠이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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