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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장 ] 소설Q-14이동
이현석 | 창비 | 2022년 08월 1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9.3 리뷰 10건 | 판매지수 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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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8월 10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300쪽 | 384g | 128*194*20mm
ISBN13 9788936438791
ISBN10 8936438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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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경은 오래도록 파도를 타고 싶었다. 이외에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는 그만둬야 하는 날이 오겠지만 최대한 그날을 먼 미래로 미루고 싶었다. 그렇게 운동을 하는 사람으로, 또 운동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왔는데 이곳에서의 삶이 갑작스럽게 막을 내리고 있었다.
--- p.22

태경은 다영의 저 무심한 표정을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테이크오프를 시도하는 때에만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 표정은 벼랑 끝에 선 사람의 목덜미를 붙잡고 있던 어떤 끈이 갑작스레 풀려버린 것을 목격하는 듯한 기분이 들게 했다. 대범함을 품고 있지도, 만용을 품고 있지도 않은 그저 무연한 얼굴은 태경으로 하여금 수년 전 어느 하루를 자꾸만 떠올리게 했다. 저러다 다영이 죽지는 않을까 하는 극심한 공포에 휩싸였던 그날을 태경은 똑똑히 기억했다.
--- p.87

“괜찮아! 들어와!” 태경이 외치고는 몸을 뒤로 젖혔다. 속도를 늦춘 태경이 주행 방향 반대편으로 턴을 해 파도 아랫부분으로 내려갔다. 태경이 시간을 벌어준 사이 예카가 두 손으로 다영의 보드를 힘껏 밀었다. 테이크오프에 성공한 다영은 파도의 면을 따라 나아가다가 뒤를 돌아봤다. “시선!” 파도 윗부분으로 되돌아온 태경이 다영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앞으로 시선을 돌리는 다영의 얼굴에 웃음기가 언뜻 비쳤다. 그가 뒤를 돌아봤다는 자체가 규칙을 숙지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나의 파도에 한명만 타야 한다는 서평 제1명제는 가끔씩 이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깨질 때가 있었다. 제 파도에 다른 사람을 초대하는 일. 타인을 믿고 아량을 보이는 일. 여럿이 하나의 파도에 탄다고 해서 ‘파티웨이브’라고 부르는 이 행위는 신뢰와 교감의 표시였다.
--- pp.154~155

사실, 지나고 보면 모두 똑같았는데. 우리도, 다영도, 심지어 조미진도 다 똑같았는데. 물 마실 시간조차 없다고 출근하자마자 머그컵에 부은 맹물부터 마시던 우리. 화장실도 제대로 갈 수 없어 방광염을 달고 살던 우리. 점심시간이면 교대로 구내식당에 가서 코로 먹는지 입으로 먹는지 모르게 허기를 달래던 우리. 그러고도 늘 배가 고파 갹출한 과비로 군것질거리를 사오면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던 우리. 가짜 공복감이라는 걸 알면서도, 채워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밀려오는 허기에 허덕이던 우리.
--- p.171

태경은 생각했다. 누군가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웠을 시간을. 회복에 이른 것처럼 느껴졌으나 지워지지 않는 흉으로 남았을 시간을. 어쩌면 한순간도 잊을 수 없어 매 순간 잊으려 했을 시간을. 그 시간의 잔해 속에 내가 있다는 게, 그런 내가 네 앞에 서 있다는 게, 나의 기만이라는 게, 너와 내가 함께였으나 너를 외면하기만 했던 그곳에서의 일을 떠올릴 때마다 스스로를 방관자로만 규정하려 해온 나의 기만이라는 게. 태경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기만이 가리려고 했던 사실은 방관 또한 가해였다는 점. 아니라고, 그렇지 않다고, 나는 그저 가만히 있었을 뿐이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어보아도, 결코 가려지지 않는 사실은 그것이 비겁하디비겁한 가해였다는 점.
--- pp.227~228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보이기/감추기

추천평 추천평 보이기/감추기

이현석의 전작인 소설집이 다채롭고 넓은 세계를 유감없이 보여줬다면 이번 장편은 그 넓이가 그대로 깊이에 더해져서 돌아왔다. 가차 없는 현실에 한 인간이 마모되고 부스러지는 과정과, 생존을 위해 선택한 윤리적 기만이 영혼을 훼손하는 과정이 너무 생생해서 파도에 삼켜진 듯 자주 숨이 막혔다. 나는 이 책이, 삶을 열정으로 가득 채우는 사랑하는 일을 찾았다고 해서 그 모든 게 다 괜찮아지는 극적인 치유의 길로 가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해서 그 모든 게 네 잘못은 아니었다는 무턱 댄 위로를 건네지 않아서 더없이 미더웠다. 이런 작가가 말하는 희망이라면 믿어봐도 좋겠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자기 몫의 부채를 성실히 헤아리는 주인공이기에, 과거에 구해내지 못한 것을 구하러 가는 그의 마지막 헤엄이 눈부시게 뭉클했다. 읽고 나면 간절하게 기도하게 되는 책이다. 부디 모두가 적절한 순간에 ‘outside!’를 외칠 수 있기를. 모두 무사하기를. 너무 애쓰지 않고도.
- 김혼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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