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22년 08월 2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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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176쪽 | 228g | 128*188*20mm |
ISBN13 | 9791167521859 |
ISBN10 | 1167521854 |
발행일 | 2022년 08월 2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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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176쪽 | 228g | 128*188*20mm |
ISBN13 | 9791167521859 |
ISBN10 | 1167521854 |
글을 시작하며 Part 1 2021. 7. 25(일) 스위스 안락사 동행 제안을 받았습니다 8. 10(화) 영혼의 내시경 8. 13(금) 스위스행 항공권을 받다 8. 21(토) 생애 마지막 생일 8. 22(일) 죽으러 가기 위한 코로나 검사 8. 23(월) 죽음의 대기 번호 ‘444’ 8. 24 새벽(화) 네덜란드를 경유하여 스위스로 8. 24 오후(화) 드디어 그를 만나다 8. 25(수) 귀천을 하루 앞둔 날 8. 26(목) 조력사로 생을 마감하다 Part 2 죽음을 두렵지 않게 맞는 방법 죽어가는 사람과 함께한 5개월 내가 만난 큰 바위 얼굴 무덤들 사이를 거닐며 두 가지 문제 삶과 죽음의 맞선 자리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나 죽고 그대 살아서 죽음을 쓰는 사람 막상 내 죽음이 닥쳐 봐, 그게 되나 영성의 배내옷, 영성의 수의 죽음은 옷 벗기 인간이 된다는 것, 그것이 예술 나의 영끌리스트 죽음 앞의 소망 사후 세계의 확신 신이 뭐가 아쉬워서 글을 마치며 |
살고 죽는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는 아무도 없다. 건강상 별 문제없이 지내는 와중에도 이따금 나이 드는 내 자신을 살피게 되고, 나의 죽음에 대한 고민도 하게 된다. 언제, 어떠한 형태로 겪게 될지는 모르나, 아직은 멀었다고 믿고 싶다. 많은 이들의 사정도 비슷할 것 같다.
판단을 잠시 중단키로 했다. 감정이 격해지고, 자칫 세상을 떠난 이를 향한 비난의 말이 튀어나올 수도 있겠다 싶어 조심스러웠다. 저자의 태도에서도 이를 느낄 수 있었다. 다만, 그는 죽음을 경험함으로 인해 삶을 향한 강고한 신념을 지니게 된 듯했다. 결코 스스로 삶을 내려놓아서는 아니 된다는, 이는 특정 종교에 기반한 믿음이기도 하였고, 동시에 남은 식구들을 바라보며 피어난 생각 같기도 하였다.
살다 보면 가까운 이의 죽음을 목도하는 일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허나 저자의 경험은 독특했다. 비슷한 경험이 없길 바라는 마음이 강하기도 했다. 오랜 논란 끝에 더는 진전 없는 치료의 과정을 중단하는 게 서서히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아직까진 그리고 향후 오래도록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얻어 제 삶을 끊는 행위가 정당하게 여겨지는 일은 없을 터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돌아가신 분과 저자의 관계 또한 오묘했다. 혈연이나 지연, 학연 따위로 엮이지 않은 작가와 독자. 그것도 호주 교민. 머나먼 스위스로의 여행경비를 부담하면서까지. 오래도록 교류가 있어 왔으니 자신의 마지막 순간에 초청을 했겠지만 이해가 쉽지 않았다. 애초부터 이해하려 들었던 게 잘못일 수도 있다. 오래도록 그를 괴롭혔을 통증, 좀체 나아지지 않는 몸 상태로 인한 좌절과 절망을 안다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죽음으로의 초청 역시 내겐 매우 어려웠다.
그저 과정을 따랐다. 스위스에 가기로 결정을 해 놓고도 끊임없이 흔들리던 마음, 출국을 위한 코로나19 검사를 받으며 양성이 뜨길 바란 저자의 심정이 담담하게 그려졌다. 함께 비행기에 오른 이들은 자신들의 설득으로 죽음을 바라보던 한 생명이 뒤돌아설 수 있으리란 일말의 희망을 지닌 상태였다. 정작 당사자는 저승사자를 자신이 직접 찾아 나선 것에 불과하다며 별다른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누군가는 죽음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와중에도 저자는 밥을 먹고 잠을 잤다. 일상이 계속 전개된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심한 자괴감을 안겨다 주었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함께 있는다 하여도 죽음은 오롯이 홀로 치뤄내야 할 과업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죽음을 결코 제 것마냥 끌어안을 수 없고, 그저 불편을 느꼈으며 불안을 호소하는 모습이, 초청에 응한 이들에게 주어진 역할은 손님임을 분명히 말해주었다.
죽음에 어울리는 장소가 과연 있을까. 예전에는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일이 잦았으나 이젠 아니다. 모두가 집 떠나 병원에서 객사(!)하는 시대다 보니 저자 또한 정갈을 뛰어넘어 고색창연함을 풍기는 병원을 상상했다. 그러나 이들을 데리러 온 사람의 모습은 우리가 장례식장에서 흔히 보곤 했던 정장 차림이 아니었으며, 들어선 공간 또한 죽음과는 동떨어져 보였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죽음의 순간이었다. 단지 묘사의 힘이었을까. 평소처럼 쏟아지는 졸음에 눈꺼풀이 감기듯 상대는 떠났다.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스스로 레버를 잡아당김으로써 생을 마감한 이의 명복을 빌 따름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이와 같은 죽음은 아직까지 보편적이지 못하다. 떠난 이의 아내는 호주에서 죽음의 이유를 설명해야만 하는 순간을 만날 때마다 힘겨워했다. 사정을 잘 모르는 이들이 무심하게, 때론 배려하는 말투로 던지는 물음이 화살이 되어 심장에 박혔다. 애도가 쉽지 않은 죽음, 어떠한 죽음도 쉬울 리 없지만 안락사는 특히 그랬다.
종교에 대해서는 깊지 읽지 않았다. 이 문제는 설득의 문제일 수 없고, 특정 종교에 귀의한다 하여 해결될 성질의 것도 아니라는 판단에서였다. 대신 나는 다시금 묻기로 했다. 마지막 순간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게 행운일 수도 있지 않을까. 혹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마저 상실할 정도의 상황에 놓였다면, 그래도 나는 살고 싶을까. 아직은 모르겠다. 왠지 그 순간이 되어도 자신있게 답을 하긴 힘들 거 같다.
1990년 가을에 1900년을 출생연도로 삼은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추석 연휴와 겹쳐 5일 동안 장례를 치렀다. 쌍문동에 있는 병원 장례식장이었는데, 당시의 여자 친구가 찾아왔을 때 함께 만화방에 갔다 왔다. 5일은 꽤 긴 시간이었다. 그때 아버지가 우는 장면을 처음 보았다. 군인을 직업으로 삼은 아버지가 우는 것을 그 전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담배를 태우는 것도 그때 처음 보았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조력사는 안락사와 함께 인위적으로 생명을 중단하는 방법이지만, 안락사는 타인에 의한 생명 중단으로, 의사가 약물을 투여하는 적극적 안락사와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소극적 안락사로 나뉩니다. 한편 조력사는 외부의 도움을 받되 스스로 치사량의 약물을 마시거나 주사를 놓는 자살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2018년 연명의료결정법 시행 이후 소극적 안락사는 합법입니다.” (p.5)
할머니의 죽음 이후 나는 바로 지금, 가장 죽음 가까이에 있다. 죽음을 직감, 같은 것이 아니라 죽음을 실감, 한다고 보는 것이 맞다. 아버지는 4월 초 코로나에 걸렸고, 그때 이후 급전직하로 건강이 나빠졌다. 이미 3년 전부터 폐암을 앓고 있었지만 기적에 가깝게 관리가 되고 있었다. 그러나 코로나 이후 현저한 인지기능저하가 발생하고 말았다. 아기의 울음처럼 많아진 아버지의 울음을 겪어내는 중이다.
“이 세상에 오래도록 머무르고 싶다거나 극적으로 증상이 호전되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루빨리 떠나고 싶지도 않습니다. 불안하거나 두렵지도 않습니다. 저 같은 중환자들은 의료진의 말 한마디, 검사 결과에 생사가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따라서 환자 대부분은 긴장, 초조, 그리고 두려움 속에서 결과를 기다리게 되는데 어느 순간부터 저는 의외로 담담했습니다...” (pp.13~14)
인지기능저하와 함께 여러 신체기능저하도 뒤따랐다. 애초에 기능이 많이 떨어져 있던 신장이 나빠진 이후 회복되지 못하였다. 지지난 주부터 투석이 시작되었다. 폐가 아닌 다른 곳을 발원지로 하는, 피부암의 일종인 메르켈세포암이 생겼다. 예후가 좋지 않은 휘귀암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이것 또한 지지난 주의 일이다. 콧잔등에 도드라진 종양을 없애는 방사선 치료가 10회차를 넘어섰다.
“거기까지 간 사람 중에서 막상 닥쳐서는 마음을 바꾸고 다시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고 해요. 70%는 마음을 돌린다지요? 우리가 잘 설득해서 한국으로 모시고 옵시다. 한국에서 치료받도록 잘 말씀드려 보지요. 의료의 질적 면에서, 특히 암 환자 치료는 한국이 호주보다 앞서 있다고 봐야죠.” (p.48)
죽음에 가까이 있는 동안 죽음과 관련한 책을 읽으며 마음을 다스리고자 하였다. 《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는 ‘조력자살 한국인과 동행한 4박5일’이 부제가 붙어 있다. 부제 그대로이다. 몇 년 전, 까페 여름의 선배와 안락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선배는 생각보다 안락사 비용이 크게 들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대신 그쪽에 보낼 편지를 영문으로 작성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고도 하였다.
『“마음의 준비가 되면 밸브를 손수 돌리세요. 그러면 수 초 안에 편안히 잠드실 겁니다.”
설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분이 밸브를 돌렸습니다. 순식간의 일이었습니다. 설명을 하던 남자도 흠칫 놀랐고 우리의 입에서도 짧은 탄식이 나왔습니다.
“아 졸리다...”
그 말을 끝으로 5~8초 남짓한 사이에 고개가 옆으로 떨어졌고, 입가에는 희미하게 미소가 떠올랐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스스로 밸브를 돌려 약물을 주입, 삶과 죽음의 경계를 찰나로 넘던 그 순간, 저는 그분의 발이 식어갈 때까지 잡고 있었던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p.97~98)
오래전 젊은 시절 묘비명을 생각해본 적이 있다. 태어날 때는 내 의지가 아니었으나, 죽을 때는 내 의지대로 간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이런 요지의 문장을 떠올렸다. 죽음이 가까이 있으니 죽음에 관한 책이 잘 읽힌다. 지금부터 우에노 지즈코라는 일본의 사회학자가 쓴 《집에서 혼자 죽기를 권한다》라는 책을 읽을 생각이다. 아내와 나는 자식을 두지 않기로 작정하였고 그렇게 했다. 아버지의 죽음 가까이에서 내 죽음을 함께 생각한다.
신아연 / 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 책과나무 / 174쪽 /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