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노는 몸을 수그려 첫 번째 줄 의자에 앉는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눈꺼풀 밑에서 기억이 일렁인다. 눈 더미 속으로 엉덩방아를 찧는 아버지. 카드식 목록이 들어 있는 서랍을 잡아당겨 여는 사서. 흙먼지를 손가락으로 긁어 가며 그리스 문자를 쓰는 포로수용소의 한 남자.
섀리프가 아이들에게 세 개의 서가 뒤에 마련한 분장실을 보여 준다. 소품과 무대 의상 들이 가득한 곳에서 올리비아는 라텍스 모자를 잡아 빼 제 머리에 뒤집어쓰고 대머리 분장을 하고, 크리스토퍼는 대리석 관처럼 보이게 색칠한 전자레인지 상자를 끌고 무대 중앙까지 나오고, 앨릭스는 손을 뻗어 그림 속 탑을 만지고, 내털리는 책가방에서 노트북 컴퓨터를 꺼낸다.
메리앤의 휴대폰이 진동한다. “피자가 다 준비됐네요.” 그녀가 지노의 성한 쪽 귀에 대고 말한다. “제가 가서 가지고 올게요. 눈썹 휘날리게 다녀올게요.”
“니니스 선생님?” 레이철이 지노의 어깨를 톡톡 두드린다. 붉은 머리칼은 뒤로 모아 땋아 내렸고, 어깨 위의 눈은 녹아 물방울 졌고, 두 눈은 크고 맑다. “이 모든 걸 다 만드신 거예요? 저희를 위해서?”
--- pp.30~31
광장에 가니 다들 긴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 앞에서 사람만큼이나 까마귀 한 마리, 갈까마귀 한 마리, 그리고 큰 후투티 한 마리가 춤을 추고 있는 것을 보자 겁이 났습니다. 알고 보니 온순한 새들이었고, 그중 두 친구가 땅과 하늘 사이 구름 속에 지을 계획인 경이로운 도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인간들의 아귀다툼에서 참으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오로지 날개를 단 자들만 이를 수 있는 곳이며, 그곳에선 누구도 고통을 알지 못하고 모두가 현명하다고 했습니다. 내 마음에 하나의 환상이 뛰어들었으니, 구름 위 황금 탑들로 이루어진 궁전과 그 주변을 맴도는 송골매와 붉은발도요와 메추라기와 쇠물닭과 뻐꾸기 들, 물 꼭지마다 고깃국이 강물처럼 뿜어져 나오고, 거북들이 꿀 케이크를 등에 이고 빙글빙글 돌며, 길 양편 수로에 포도주가 흐르는 나라의 모습이었습니다. 두 눈으로 이 모든 광경을 보고서 나는 벌떡 일어나 말했습니다.
“저기 갈 수 있는데 왜 여기 가만히 있어야 하지?” 나는 포도주 병을 던지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곧바로 테살리아를 향해 길을 떠났으니, 모두 알다시피 그곳은 마법이 횡행하는 나라로, 나를 변신시켜 줄 마녀를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 pp.47~48
바람이 그의 손가락 밑 책첩에서 종이 한 장을 날리자 안나가 얼른 달려가 잡아 먼지를 턴 다음 다시 그의 무릎에 올려놓는다. 리키니우스는 오래도록 눈꺼풀을 들어 올리지 않는다. “보고(寶庫).” 마침내 그가 입을 연다. “이 말을 아니? 안식처. 문서─한 권의 책─는 앞서 산 사람들의 기억이 담긴 안식처야. 영혼이 먼 길을 떠난 후에도 기억이 그 자리에 영원히 남게 하는 방법이지.”
다음 순간 그의 두 눈은 활짝 열리고, 그는 거대한 암흑 속을 들여다보는 것만 같다.
“하지만 책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죽는다. 불에 타거나 홍수에 쓸리거나 벌레들의 먹이가 되기도 하고, 또 변덕스러운 폭군을 만나면 죽기도 한다. 보호하지 않으면 책은 세계 밖으로 빠져나가 버려. 그리고 책이 세계 밖으로 사라질 때, 기억은 다시 한번 죽는다.”
--- pp.77~78
산그늘 너머엔 어떤 모험이 날 기다릴까, 하루도 상상하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지금 그가 원하는 건 여기 외양간 장작더미에 이렇게 등을 기대고 쭈그려 앉아 있는 동안 계절이 바뀌고 지금 저 방문객들도 과거의 기억이 되고 모든 것이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안 갈래요.”
“옛날에,” 할아버지가 한마디 하고는, 마침내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본다. “모두가, 거지부터 푸주한은 물론 나라님까지 하느님의 부르심을 거역하다 돌이 된 도시가 있어. 도시의 모든 사람, 여자도 아이도, 하나도 빠짐없이 돌이 되어 버렸지. 이건 거역해선 안 되는 거야.”
이 벽 너머에 나무와 달빛이 잠들어 있고, 두 녀석의 갈빗대가 동시에 올랐다가 내려가는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넌 명예를 얻을 거다.” 할아버지가 말한다. “그런 후 집으로 돌아오는 거야.”
--- p.96
두 사서의 고개가 정확히 같은 각도로 갸웃한다. 한쪽이 그를 벽난로 앞에 놓인 창살 등받이 의자에 앉히고, 다른 쪽은 책장들 사이로 사라지더니 클로스 장정을 한 레몬색 표지의 책 한 권을 들고 돌아온다.
“아,” 언니 쪽이 말한다. “탁월한 선택.” 그리고 둘은 그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앉고, 책을 가져온 쪽이 말한다. “이런 날은 으스스하고 습해서 추위가 가시지 않는 법이지. 그럴 땐 그리스어를 읽는 것만으로 해결되기도 해.” 그녀는 책에서 낱말들이 빽빽이 들어찬 페이지를 그에게 보여 준다. “널 데리고 훨훨 날아 저 멀리 덥고 돌 많고 쨍한 곳으로 데려다줄 거야.”
불이 일렁이고 색인 카드 서랍의 황동 손잡이가 그윽하게 빛나는 가운데 지노는 두 손을 허벅지 밑에 깔고 앉고, 쌍둥이의 동생 쪽이 책을 읽기 시작한다. 이야기 속에서 고독한 뱃사람,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남자가 뗏목을 타고 십팔 일을 헤매다 무시무시한 풍랑을 만난다. 뗏목은 박살 나고 그는 벌거벗은 채 바닷물에 휩쓸려 어느 섬의 바위투성이 해변으로 떠밀려 간다. 그런데 아테나라는 이름의 신이 물동이를 인 여자아이로 변장하고선 그를 마법에 걸린 도시로 인도해 간다.
--- pp.105~106
이이-이이? 이이-이이-이잇?
시모어는 팔에 난 털이 죄다 꼿꼿이 일어서는 것 같은 느낌이다.
올빼미는 감쪽같이 위장하고 있어서 세 번 더 울고 나서야 소년의 눈은 그를 찾아내고,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힌다.
올빼미가 눈을 세 번, 네 번 깜빡인다. 나무껍질에 드리워진 그늘 속에 있어서 눈꺼풀을 닫고 있으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다. 다시 눈을 뜨면 이 피조물은 본래의 형상을 되찾는다.
크기가 토니 몰리너리의 덩치만 하다. 눈동자는 테니스공 색깔이다. 지금 시모어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
키 큰 고목 밑둥치에 서 있는 시모어는 고개를 들어 위를 보고 올빼미는 굽어보고 숲은 숨 쉬는 가운데, 무슨 일인가가 일어난다. 깨어 있는 동안 소년의 의식 가장자리에서 끊임없이 웅얼거리던 불편한 소리─절규─가 잦아들고 있다.
이곳엔 마법이 깃들어 있어. 올빼미가 말하는 것 같다. 가만히 앉아 숨을 쉬며 기다리면 마법이 널 찾아낼 거야.
시모어는 자리에 앉고 숨을 쉬며 기다리고, 지구는 본래 궤도를 따라 또 한 번 1000킬로미터를 돈다. 소년의 내면 깊은 곳에서 날 때부터 단단하던 매듭이 느슨해진다.
--- pp.126~127
“그리고 노아와 책을 실은 우리의 방주 이야기에서 홍수는 뭔지 아니?”
안나는 고개를 흔든다.
“시간이야. 하루하루, 일 년 또 일 년, 시간은 이 세계에서 오래된 책을 지워 버린단다. 네가 저번에 우리에게 가져다준 필사본 있지? 로마 제국 시대에 살았던 학자 아에리아누스가 쓴 거였단다. 이 방에 있는 우리에게, 바로 이 시간에 도착하기 위해, 그 책 속의 문장들은 십이 세기를 견뎌야 했어. 어느 필경사가 그 책을 필사해야 했고, 수십 년이 지나 두 번째 필경사가 첫 번째 사본을 또 한 번 필사했고, 두루마리였던 것을 책으로 다시 묶었고, 두 번째 필경사가 땅에 묻혀 뼈만 남은 후로도 긴 세월이 흐른 뒤에 세 번째 필경사가 나타나서 또 한 번 필사했고, 그러는 내내 그 책은 발굴되었어. 성질 고약한 수도원장 한 명, 바지런하지 못한 수사 한 명, 이 땅을 침략한 야만인 한 명, 쓰러져 버린 초 하나, 배고픈 벌레 한 마리만으로도 저 수 세기의 세월이 날아가 버려.”
가느다란 초의 불이 깜박인다. 그의 두 눈은 방 안의 모든 빛을 끌어모으는 듯하다.
“얘야, 세상에 변치 않을 것처럼 보이는 것들 ─산, 부, 제국─이 있지만 영원함이란 환상에 지나지 않아. 그것들이 늘 그대로일 것처럼 보이는 건 우리 삶이 너무 짧기 때문이야. 신의 눈으로 볼 때 지금 이 도시도 개미집처럼 잠깐 있다가 사라지지. 젊은 술탄이 지금 군대를 소집하고 있어. 그는 새로운 전쟁 기계를 갖고 있는데, 그걸 가지고 성벽을 무너뜨려 공기처럼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할 수 있다는구나.”
안나는 배 속이 요동치는 기분이다. 히메리우스가 탁자에 놓인 동전들을 향해 살금살금 다가온다.
“방주가 암초에 부딪혔단다, 얘야. 그래서 밀물이 밀려 들어오고 있어.”
--- pp.239~240
“그래, 얘야. 베타 Oph2의 대기는 지구의 대기와 비슷하고, 지구처럼 액체 상태의 물이 있고, 몇 가지 타입의 숲이 있을 거라고 너도 나도 다 알고 있지. 하지만 우리가 살아서 그것들을 눈으로 보는 날은 절대 없을 거야. 여기 있는 누구도. 우리는 다리를 놓아 주는 세대, 중간에서 연결해 주는 존재, 후세대가 맞이할 수 있도록 앞서 준비하는 사람들이란다.”
콘스턴스는 양 손바닥을 책상에 대고 힘주어 누른다.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만 같다.
“진실은 받아들이기가 참 버겁지. 나도 알아. 아이들을 도서관으로 데려오는 것도 그래서야. 너희가 받아들일 수 있을 나이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플라워스 부인이 상자에서 종이 한 장을 집어 들고 뭔가 적는다.
“이리 오렴. 보여 주고 싶은 게 하나 더 있단다.” 부인이 종이를 투입구에 넣으니, 잠시 후 너덜너덜하게 해지고 17호 격실 입구만큼이나 폭이 넓고 긴 책 한 권이 책장 두 번째 단에서 비치적거리며 빠져나와 맥없이 몇 번 펄럭거리고는 그들 앞까지 날아 내려와 펼쳐진다. 페이지가 새까만 것이, 깊이가 가늠이 안 되는 구렁의 가장자리에서 막 열린 출입구 같다.
“아틀라스.” 플라워스 부인이 말한다. “안타깝게도 좀 오래 전 거야. 도서관의 날을 맞이한 아이들 모두에게 소개해 줬는데, 나중에 보면 다들 좀 더 매끈한, 좀 더 몰입이 잘 되는 것들을 더 좋아하더라고. 만져 봐.”
콘스턴스는 페이지 속을 손가락으로 쿡 찌르고 거둔다. 그런 후 한 발을 내민다. 플라워스 부인이 손을 잡자 콘스턴스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마음을 다잡고, 둘은 함께 그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 pp.285~286
창고 벽 틈새로 보이는 산 위에 별들이 걸려 있다. 지노는 싸늘한 등을 지그시 눌러오는 렉스의 몸을 느낀다. 둘 다 살가죽과 뼈가 붙을 정도로 깡말랐다.
θεο?는 ‘신들’이라는 뜻으로, 주격 복수형이야.
?πεκλ?σαντο는 부정 과거로 ‘그들은 실을 자았다’라는 뜻이야.
?νθρ?ποι?는 ‘인간들’, 여격 복수야.
지노는 숨을 쉬고, 불은 타닥거리고, 창고 벽은 서서히 멀어지면서, 그의 정신 속 주름 사이에서 감시병도 굶주림도 고통도 가 닿지 못할 그 문장의 의미가 수백 년의 세월을 뚫고 솟아오른다.
“그것이 신들의 업이다.” 렉스가 말한다. “그들은 인간의 삶을 피륙 삼아 폐허의 실을 잣고, 그 모든 것이 이후에 올 세대에게 들려줄 하나의 노래가 된다.”
렉스는 널빤지에 쓴 그리스어를 보고, 다시 지노를 보고, 다시 그리스어를 본다. 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아, 정말 위대해. 정말, 징글징글하게 위대해.”
--- p.3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