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키오 궁전을 바라보고 선 다음, 왼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거기에 당당한 자세의 청동 기마상이 보입니다. 코시모 대공이라고 불리는 코시모 1세 데 메디치(Cosimo I de' Medici, 1519~1574)의 상으로, 잠볼로냐(Giambologna, 1529~1608)의 작품입니다.
이 기마상의 주인공인 코시모 1세는 코시모 대공, 혹은 토스카나 대공(Grand Duke of Tuscany)이라고도 불립니다. 정치적으로는 알레산드로 데 메디치(Alessandro de' Medici)의 후계자로서 정권을 물려받았지만, 실제로는 ‘검은 부대의 조반니’라고 일컬어지는 전설적인 용병대장 조반니 달레 반데 네레(Giovanni dalle Bande Nere)의 아들이었습니다. 알레산드로 메디치가 아들이 없는 상태에서 암살당했기 때문에 코시모 1세가 후계자가 되었던 것이지요. 이 기마상을 ‘피렌체의 국부(國父)’란 칭호를 받았던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i Giovanni de' Medici, 1389~1464)의 것으로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들은 전혀 다른 인물입니다. 코시모 데 메디치는 겸손하고 소탈한 사람이라 당나귀를 타고 다녔다고 하지요.
-P32 「코시모 1세 청동 기마상」 중에서
로자 데이 란치의 여러 조각 작품들 중에서 관람객의 눈길을 가장 많이 빼앗는 작품은 아마도 ‘메두사의 목을 벤 페르세우스’가 아닐까 합니다.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의 작품이지요.
이 작품을 이해하려면 페르세우스가 누구인가와 그가 메두사의 목을 베게 된 사연이 무엇인가를 알아야겠군요. 먼저, 페르세우스란 인물에 대해 알아봅시다. 페르세우스(Perseus)는 제우스의 아들입니다. 제우스가 아르고스(Argos)의 공주 다나에(Danae)를 사랑하여 얻은 아들이지요. 바람둥이 제우스는 애인과 사랑을 나눌 때 모습을 바꾸는 경우가 많았는데, 다나에를 만날때는 황금의 비로 변했습니다. 제우스가 그렇게 몸을 바꾼 까닭은 그녀가 청동 탑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나에의 아버지 아크리시오스(Akrisios)가 외손자의 손에 죽임을 당하리라는 신탁을 듣고 딸을 탑 안에 가뒀거든요. 외손자가 태어나는 일이 없도록 하려고 그런 것이지요.
-P57 「메두사의 목을 벤 페르세우스」 중에서
피렌체와 시에나는 오랜 세월 동안 라이벌이었습니다. 군사적 요충지였던 키안티(Chianti) 지방을 둘러싼 재미있는 일화를 통해서도 그들의 치열한 대립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13세기의 일입니다. 키안티를 차지하기 위해 오랫동안 싸우던 피렌체와 시에나는 전쟁이 아닌 평화로운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로 약속했습니다. 두 공화국의 기사(騎士)가 새벽 닭 울음소리에 맞춰 출발하여 달린 뒤, 두 사람이 만나는 곳을 국경선으로 삼기로 한 것입니다. 피렌체 사람들은 검은 수탉을 정해 굶겼고, 시에나 사람들은 흰 수탉을 정해 배불리 먹였습니다. 피렌체 사람들이 닭을 굶긴 것은 배가 고프면 일찍 울 거라고 생각해서이고, 시에나 사람들이 배불리 먹인 것은 힘차게 울어서 잠을 깨워주기를 바라서였습니다.
다음 날 새벽, 배가 고픈 피렌체의 닭이 먼저 홰를 쳤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피렌체의 기사는 일찍 출발할 수 있었고, 더 멀리까지 달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피렌체와 시에나의 중간에 위치한 키안티가 피렌체의 차지가 되었다는 것이며, 이런 전설을 뒷받침하듯 키안티에서 생산되는 와인의 상표에 검은 수탉이 그려져 있습니다.
-P90~91 「베키오 궁전」 중에서
브루넬레스키의 쿠폴라는 역사적으로 보거나 문화적으로 보거나, 매우 독특한 아름다움을 갖는 중요한 건축물입니다. 그러나 건축공학적으로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는 구조물이므로 여기서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브루넬레스키는 ‘거대한 쿠폴라의 무게를 어떤 방법으로 어느 정도까지 줄일 수 있느냐’에 공사의 성패가 달려있다고 보고, ‘이중 골조 구조’라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방법을 고안해냈습니다. 이중 골조 구조란 마치 달걀 껍데기를 이중으로 씌운 것과 같은 형태로, 두 벽 사이가 비어 있어 무게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으면서도 양쪽 벽이 서로 잡아당기는 역할을 하여 훨씬 안정적으로 지탱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새로운 건축방식은 초기 르네상스 건축의 기적으로 불리며, 이후 수백 년 동안 비슷한 규모의 돔이 건축되지 못했을 만큼 독창적이면서 성공적인 방식이었습니다.
-P268~269 「브루넬레스키의 쿠폴라」 중에서
메디치 가문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코시모 데 메디치의 아버지)는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결정을 합니다. 폐위된 교황 요한 23세에게 거액을 대출해주기로 한 것입니다. 그것은 받을 가능성이 별로 없는 위험한 거래였지요. 그리고 실제로도 돌려받지 못합니다. 인질에서 풀려나 피렌체로 돌아온 요한 23세가 일 년 뒤 사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반니 디 비치는 거액을 날린 것에 연연하지 않고, 도리어 그의 영묘를 산 조반니 세례당에 만들면서 당대의 유명한 장인들에게 작업을 맡긴 것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어리석어 보이는 그의 결정이 메디치 가문을 피렌체 제일의 명문가로 만들었습니다.
메디치 가문이 몰락한 교황 요한 23세에게 끝까지 의리를 지키는 것을 보면서 로마의 교황청이 메디치 은행을 주거래 은행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교황청의 주거래 은행이 되면서 메디치 가문의 사업이 승승장구하기 시작하였으니, 조반니 디 비치의 투자는 고도의 계산 끝에 결정한 승부수였던 셈입니다.
-P354~355 「산 조반니 세례당」 중에서
__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