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시대 50대의 공자가 이룬 지천명을 우리는 육십에 이뤄도 늦지 않습니다. 0.8의 비율을 적용해 본다면, 63세에서 74세까지가 지천명을 이룰 나이입니다. 그러니 40대의 나이라면 비로소 이립이 완성되는 시기입니다. 50대라면 한창 흔들리는 유혹의 시기입니다. 삶에 흔들리고 돈에 흔들리고 사람에 흔들리는 시기입니다. 인생의 천명을 몰라도 문제없습니다. 환갑이 되어도 자신의 천명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63세부터 서서히 인생의 천명을 찾아 정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가려진 나의 길을 찾아야 할 때」중에서
공자의 제자 자하가 ‘거보’라는 지역의 읍재가 되어 공자에게 정치에 관하여 물었을 때, 공자께서 정치란 빨리빨리 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며 작은 이익에 눈을 돌려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주 명료합니다. 빨리하려고 하면 목표를 달성하겠지만 원래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작은 이익을 돌보게 되면 큰일을 달성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시작하는 마음을 끝까지 유지하는 정치인은 거의 없습니다. 처음에는 그 어떤 어려운 일도 다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처럼 호언장담하지만, 용두사미로 그치기 일쑤입니다.
---「서두르지 말고 작은 이익을 돌보지 마라」중에서
공자보다 약 70여 년 전에 태어난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는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타인에게 충고하는 일이며,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자기를 아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며 올바른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타인을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현실주의자 공자께서도 말했습니다. ‘군자는 잘못의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으려 노력하지만, 소인은 타인에게서 찾으려 한다’고 했습니다. 리더는 원인을 자기 내부에서 찾으려 하지만 보통 사람은 원인을 외부로 돌리려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타인을 책망하거나 원망할수록 발전은 멀어져 갑니다. 스스로 되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점점 뒤처지게 됩니다.
---「오십에는 나에게서 찾아야 한다」중에서
《논어》의 마지막 어구, 세 문장에는 중요한 기준이 들어 있습니다. 목적 있는 삶, 바르게 사는 삶, 함께하는 삶의 원칙입니다. 오십에 더 의미 있게 다가오는 삶의 기준입니다.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철학자가 될 필요는 없지만, 공자께서는 나이 오십에 그것을 정확하게 알아차렸다고 했습니다. 공자의 천명은 주나라 초기처럼 만백성이 모두 행복한 대동 사회로의 회복을 위해 자신의 삶을 걸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소명을 알고 예를 알고 말을 안다는 것」중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성공 기준에서 벗어나 내가 중심이 되는 성공 기준을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보낸 시간만큼이나 앞으로의 시간이 더 남았습니다. 인생 전반에는 자꾸 심중의 뜻이 흔들렸습니다. 작심삼일이 많았습니다. 심중의 뜻과 목표가 자꾸 바뀌었습니다. 남들 따라가기에도 바빴고 더 좋아 보이는 것들을 따라 해 봤지만, 결과는 늘 처음의 기대와 달랐습니다. 이제는 꺾이지 않을 꿈을 가져 볼 때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뜻을 세워 볼 때입니다.
---「꺽이지 않을 뜻과 흔들리지 않는 뜻」중에서
나는 유덕자인가? 나는 덕이 있는 사람인가? 오십을 넘기면서 자문해 봅니다. 덕을 열 개의 단어로 풀어쓰면 인, 의, 예, 지, 신, 자, 우, 공, 효, 용입니다. 이를 모두 아울러 덕이라 합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 상대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사람, 바르게 행동하는 사람, 예의를 지키는 사람, 지혜로운 사람, 어떤 일을 해도 믿을 만한 사람, 아랫사람에게 자상한 사람, 친구 간에 우정이 돈독한 사람,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 손윗사람에게 공손한 사람, 용기 있는 사람이 덕을 가진 사람입니다. 덕 있는 사람의 도덕적 기준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덕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외로울 리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을 누가 싫어하겠습니까?
---「단 하나의 덕이라도 있으면 된다」중에서
평범했던 공구가 위대한 성인 공자가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호학 정신이었습니다. 성실과 믿음의 바탕 위에 그 누구보다도 배우기를 좋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논어》 전체를 통해 그 어떤 자랑도 하지 않았던 겸양지덕의 공자께서도 호학만큼은 당당하게 자랑하고 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 하나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는 공자의 말은, 누구든 배움에 집중하면 그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을 은유하고 있습니다.
---「나만큼 배우기를 좋아하는 이는 없다」중에서
재능이나 사상 등을 열어 주고 피게 해 일깨워 주는 걸 계발이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공자의 독특한 교육 방법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공자는 학생 스스로가 궁금한 걸 밝혀 내지 못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아직 때가 아니라 생각하여 일깨워 주지 않았습니다. 전전긍긍하지도 않는 학생에게 미리 가르쳐 봐야 조장만 될 뿐 크게 득 될 게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학생 스스로가 잘 표현하고 싶어 더듬거리는 상태가 되지 않으면 밝혀 주지 않았습니다.
---「밀려온 삶에서 밀어 가는 삶으로」중에서
가끔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내가 내 일을 선택할 용기가 있었던가, 지금까지의 일들이 정말 내가 선택하고 내 의지대로 해 온 것인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신념으로 내가 살아가는 건 아닌지, 보이지 않는 시스템에 의해 내가 조종당하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 보게 됩니다.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일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는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당연한 일이 아닌데도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겼다면 지금이 바로 변화할 시기라는 것이며,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하고 있었다면 행복한 인생을 확인하는 셈이 됩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하라」중에서
학이불사. 불편함 속에서도 풀어내야 할 숙제처럼 50대의 공부는 전문성을 높이는 성인 학습이 주가 되어야 합니다. 생각 없이 공부해서는 안 됩니다. 단 한 권의 책을 읽더라도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목적을 위한 공부이며 독서인지를 분명하게 정해야 합니다. 어떤 분야의 전문성이 왜 필요한지를 꼭 알아야 합니다. 인생 후반전은 그것에 의해 결정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중에서
오십에 《논어》를 읽는 것도 좋았지만 쓰는 것도 좋았습니다. 《논어》를 한 자씩 쓸 때는 공자의 말이 제 안에 깊이 들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전에 집필 했던 《오십에 읽는 논어》 역시 《논어》를 쓰면서 작게나마 제 삶에 적용했기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 p.8
사람의 본성이나 천성은 사실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생을 살다 보면 어떤 사람은 잘살고 어떤 사람은 못살게 되는데, 공자는 그 이유가 사람의 본성이 나 천성, 또는 가지고 태어나는 것에 있지 않고 사람의 습(習)에 있다 했습니다.
性相近也 習相遠也
(성상야상 원야습근)
본성은 서로 비슷하지만 반복함에 따라 서로 멀어진다
연습, 복습, 학습, 꾸준한 반복에 있다고 했으니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공자께서 만약 그 원인이 아버지의 재력, 학력, 미모에 있다고 했다면 보통의 많은 사람들은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지금까지의 삶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그것은 ‘습’ 때문입니다. 5년 후의 삶이 마음에 든다면 그것 역시 지금부터의 ‘습’ 때문일 것입니다. 《논어》 필사는 반복하며 무르익는 삶의 시작점이 될 것입니다.
--- p.9
힘들지 않은 세대가 없듯 오십, 지천명의 세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생 오십 즈음에 공허함을 느끼는 이유는 무언가 조금 더 채우고 싶은 마음 때문인지 모릅니다. 비움을 안다 는 것은 더 채울 수 있는 공간을 찾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오십의 공허함은 빠르지도 늦지도 않아 다행입니다. 인생을 미처 알기도 전에 느끼는 공허함은 사치일 수 있고, 인생 말년에 느끼는 공허함은 채우기가 어렵기에 그렇습니다. 오십은 한 번 더 시작하기에 그리 늦지 않은 나이입니다.
--- p.15
55세는 30세와 80세의 중간입니다. 55세는 인생을 정리하는 시점이 아니라, 후반 25년 을 새롭게 꾸며갈 시작점입니다. 지난 25년의 삶이 힘들었다면 앞으로의 25년은 덜 힘들게 살아야 합니다. 지난 25년의 삶이 재미없었다면 앞으로의 25년은 조금 더 재미있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삶을 조금이라도 더 재미있고, 쉽고, 유익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모두에게 합당한 그런 정답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는 가끔 고전 속에서 그런 삶의 노하우를 접하게 됩니다. 고전 중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논어》를 쓰면서 깊이 생각해 본다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논어》가 될 것입니다. 쓰는 속도로 생각하고, 생각하는 속도로 다시 쓰면서 《논어》가 주는 성찰과 묘미를 느껴보면 좋겠습니다.
--- p.45
《논어》의 첫 문장은 學而時習之不亦說乎(학이시습지불역열호)로 시작합니다. ‘배우고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뜻입니다. 공부에도 학습에도 균형이 필요합니다. 읽으며 배움(學)이 시작되고, 쓰면서 익힘(習)이 시작됩니다. 배움은 익힘을 통해 실행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니 배움의 결과는 실행과 실천에 있습니다.
배움이 많아도 익힘이 적으면 배움만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많이 알아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다면 배움을 실행에 옮기기에 어려움이 생깁니다. 그러니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는 익힘의 과정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학습의 익힘은 쓰기로부터 시작합니다. 복습, 연습, 학습은 모두 쓰기가 바탕이 됩니다. 읽고 쓰고, 쓰고 또 쓰는 일이 바로 학습, 복습, 연습입니다. 논어도 마찬가지입니다.
--- p.75
다산 정약용 선생은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편지에 양서의 글을 베껴 쓰는 초서(抄書)의 장점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쓰기는 그냥 쓰기가 아닙니다. 쓰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몸으로 익혀가는 과정입니다. 다른 사람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학습 방법입니다.
--- p.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