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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를 위한 루바토
김선오
아침달 2022.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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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D 한마디

[알 수 없는 것들은 아름답고] 시집 『나이트 사커』, 『세트장』 등을 발표한 시인 김선오의 첫 산문집. ‘시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는 고백으로 시작하는 그의 이야기는 시와 피아노, 프랑스 교환학생 시절의 기억에 이르기까지 자유롭게 펼쳐지고, 그의 리듬에 맞춰 사유의 흐름을 따르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에 달한다. -에세이 PD 박형욱

책소개

목차

1부

사실 나는
부드러운 반복
시작하기 전에 시작되어 있는
영혼과 반영
미래로의 회귀
여름의 시퀀스
자막 없음
Nasa Live Stream - Earth From Space : Live Views from the ISS

2부

미지를 위한 루바토
생각, 연습
타인의 풍경
불과 녹
달걀과 닭
없는 개
토코와 나
메모들

3부

어떤 얼굴들
흉터 건축
전생에 대하여
누락된 꿈의 조각들
논바이너리적 시 쓰기
팬데믹
진짜와 진짜
죽음 연습
K에게

저자 소개1

199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좋아하는 것이 많지 않지만, 무한히 변주되고 갱신되는 피아노와 시만큼은 자신 있게 좋아한다 말하는 시인. 시집 『나이트 사커』와 『세트장』, 에세이 『미지를 위한 루바토』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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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11월 01일
쪽수, 무게, 크기
163쪽 | 232g | 122*200*20mm
ISBN13
9791189467708

책 속으로

시인이 별로 되고 싶지 않았다. 현대시에 매혹되어 닥치는 대로 시집을 집어 읽었던 고등학생 시절에도, 시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처음으로 글자를 적어 내려갔던 순간에도 시인은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가 시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문학소녀, 문학소년, 그런 말들은 특히 싫었다. 친구들에게도 내가 시를 쓴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야자 시간에는 공부를 하는 척하며 교과서에 실린 한용운과 백석의 시를 필사했다. 아름다워서 울 것 같았지만 비밀이었다.
---「사실 나는,」중에서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은 시는 없다. 쓰는 사람은 쓰는 순간 자신이 쓴 시의 독자가 되기 때문이다. 쓴 사람이 있다면 읽은 사람도 있는 셈이기에 독자 없는 시는 세상에 없다. 궤변처럼 들리겠지만 존재하지 않는 시만이 독자 없이 존재하는 특권을 누린다. 종이 위에 활자로 남겨지거나 입 밖으로 말해지기 전 누군가의 상상으로만, 혹은 착상으로만 존재하는 시의 상태. 그것을 시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러한 상태의 시가 쓰기나 말하기 혹은 다른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육체를 거쳐 세상에 나온 시보다 더 좋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쓰이지 않은 시에는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조야한 아름다움과, 부드러운 새 살과, 무한한 가능성 자체가 내재하기 때문이다.
---「시작하기 전에 시작되어 있는」중에서

똑같은 루바토가 두 번 연주될 수는 없다는 점은 클래식 음악의 큰 매력이다. 아직 루바토를 완벽히 구현할 수 있는 기계는 없기에 인간만의 영역이라는 것도(이는 곧 감정을 완벽히 구현할 수 있는 기계가 발명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연주자에게 곡이 실체적으로 다가오는 순간, 그 곡이 가진 감정에 완벽히 감응하게 되는 순간, 루바토는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어떤 음의 시간을 빼앗아 어떤 음에게 주어야 하는지, 곡에 대한 몰입도가 높을수록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는 사실은 음악의 신비로움이다.
그리고 나는 오직 시의 초고를 쓸 때 루바토와 비슷한 감흥을 느낀다.
---「미지를 위한 루바토」중에서

근본 없는 방법으로나마 일주일에 서너 번 꾸준히 명상한 지 어느덧 2년이 다 되어간다. 명상을 할수록 알게 되는 것은, 죽음은 기나긴 명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메모들」중에서

나는 시를 쓸 때 의식적으로 성별 이분법적 대명사를 사용하지 않는다. 성별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들을 가능한 배제한다. 사용하는 경우에는 고정관념을 뒤엎거나 새롭게 배치하는 방식을 경유한다.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영화에서도 드라마에서도 책에서도 자아를 투영하거나 롤모델로 삼을 만한 인물을 찾을 수 없었다. 모든 콘텐츠에서 그려내는 남성의 입장에도, 여성의 입장에도 온전히 몰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성으로서 겪은 고통과 그 위치에 대해 자연스럽게 발화하는 사람들을 보면, 언어화가 가능한 젠더에 소속된다는 것 역시 일종의 특권이라는 생각을 한다.

---「논바이너리적 시 쓰기」중에서

출판사 리뷰

시인이 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게 되어버리고 만 이가
솔직하게 써 내려간 자유로운 단상들

시인이 별로 되고 싶지 않았다. 현대시에 매혹되어 닥치는 대로 시집을 집어 읽었던 고등학생 시절에도, 시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처음으로 글자를 적어 내려갔던 순간에도 시인은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내가 시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사실 나는,」 부분

『미지를 위한 루바토』는 김선오 시인의 이러한 뜻밖의 고백으로 시작된다. 시를 싫어한 것도 아니고, 시집을 닥치는 대로 읽고 남들 몰래 시를 쓰면서도 시인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니, 아마도 그만의 이유가 있었을 듯하다. “세상 속에 섞여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언어라는 매체를 경유하는 것”이 “너무나 나약하고 허망하게 느껴졌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에게 시는 일종의 이상한 놀이였다. 분명히 놀이이지만, 잘 놀면 상도 주는 놀이. 그는 이 놀이를 너무 사랑했지만, 세상 그 자체가 아니라 그저 언어로 표현했을 뿐인 세상을 두고 숨은 진실을 향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들은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그는 시가 가진 일말의 진실, 즐거움이라는 진실을 위해 “놀려먹기 좋은 진지한 문학주의자”가 되었다. 김선오는 농담과 진지함 사이, 한없는 사랑과 뒤틀린 마음 사이를 오가는 와중에 문학을 향한 지나친 숭배의 시선과 자연스레 멀어진다. 그러한 거리두기를 통해 그의 생각은 더 자유로운 곳으로 이동한다. 존재하는 시가 존재하지 않는 시보다 좋을 수 없다는 도발적인 의견, 미지의 에너지를 그대로 두기 위하여 격렬한 퇴고 과정에서 초고로 되돌아오는 과정 등은 그의 문학이 어떤 방향을 가고자 하는지를 알려준다.

아마 앞으로의 모든 여름 내내 그럴 것이다. 음악과 함께 감정은 도래할 것이다. 음악이 촉발하는 여름의 영원 회귀다.
―「여름의 시퀀스」 부분

음악이나 미술을 좋아했기에 재능만 있었다면 그것들을 하고 싶었다는 그의 말처럼, 특히 음악은 그의 일상에서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김선오는 건반을 생각하면 피아노가 잘 쳐지지 않고 언어를 생각하면 시가 잘 써지지 않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자신을 비워내는 몰입의 순간을 명상하고, 존 케이지의 저 유명한 연주 없는 음악 작품의 핵심을 통해 부재의 없음을 사유한다.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연주로써 시작하기 전에 이미 시작되어 있는 예술을 감지하고, 음악을 통해 여름날에만 찾아오는 감정을 다시 맞이한다. 세 살 무렵 처음으로 피아노 건반을 누르며 “여기가 내 세계”라는 것을 알았다는 시모어 번스타인의 일화를 거울로 삼아, 도서관에서 시집을 읽으며 무언가 돌이킬 수 없게 되었음을 깨닫는 열일곱 살의 자신을 비추어본 경험까지, 리듬감 있게 이어지는 그의 생각과 문장에는 언제나 음악이 배경으로 깔려 있다.

『미지를 위한 루바토』는 이 밖에도 오늘날 세상을 살아가는 시인의 다양한 경험과 인식으로 가득하다. 여기에는 교환학생 신분으로 좀처럼 프랑스처럼 느껴지지 않는 도시에서 지낸 경험을 시로 쓰다가 타자가 취하는 과장과 낭만성을 의식하는 자기 반성이 있다. 짧은 시간 동안 여러 서툰 언어들을 통해서야 서로에게 다가갔던 사랑이 있고, 논바이너리라는 정체성 안에서 만들어가려는 시 쓰기에 관한 생각들도 담겨 있다. 여기에 묶인 것들은 장차 더 울창하게 뻗어나갈 수 있는 사유의 씨앗들이다. 앞으로도 자신의 시들이 ‘알 수 없음의 좋음’을 가진 채 지속되기를 바란다며, 안개 낀 허공을 헤매는 일의 즐거움을 논하는 시인 김선오. 그의 즐거운 생각이 우리의 일상 또한 생동감 있게 움직여주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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