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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 남매와 아키스 - 007 -
노동의 신, 엑스 - 029 - 지능의 신, 데우스 - 109 - 간병의 신, 마키나 - 199 - 포도 젤리와 황금 천칭 - 263 - 작가노트 - 282 - 심사평 - 285 - |
저청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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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규칙은 우리를 피곤하게 만들려고 존재하는 걸까. 나는 강령의 1조부터 3조까지 강한 어조로 읽는 원고의 목소리를 들으며 금세 피로를 느꼈다. ‘윤리강령’이라는 다소 딱딱한 단어 때문일지도 모른다. 윤리강령이라 말하지 않고 ‘꼭 지켜줘용 리스트’ 정도로 귀엽게 풀어 말했다면 어떨까.
--- p.20 “저는 오히려 묻고 싶네요. 선조들은 걱정에 중독된 사람들처럼 일어나지도 않을 일들을 상상하며 두려워했죠. 심판이 존재한 지도 한 세기 이상이 지났는데 언제까지 인봇과 인간의 경계에 집착하실 건가요? 이 논제는 정말이지 사골 국물처럼 지겹다고요. 우리는 이미 인봇과 공존 중이에요. 당신들 거실에, 안방에, 심지어 회사 로비에도 있어요. 그런데도 경계에 집착하며 강령을 고집하는 게 이해가 안 돼요.” --- p.25 예술은 노동임에도 불구하고 종사자들이 인봇을 썩 원하지 않기에 상대적으로 수요가 적었다. 초지능은 디테일이 부족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창작만큼은 기계로 대체 당하고 싶지 않다는 사람들의 욕구가 점철돼 있었다. 속내야 어찌 됐든, 보이지 않는 세계를 그려내는 일만큼은 사람이 인봇보다 절대적으로 우수하다는 믿음이 통용됐다. --- p.47 반면 음악의 뿌리는 컨베이어 벨트에 있지 않았다. 매뉴얼도 필요 없었다. 사랑, 기쁨, 증오, 슬픔. 보이지 않는 무형의 마음을 악보라는 유형의 대상 위에 그릴 뿐이었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여러 요소를 이어 붙이고 조립하여 하나의 완성품을 만든다는 점은 동일했다. 엑스는 평행 세계에 눈을 뜬 기분이었다. 여태껏 알고 있던 노동의 세계와 분명히 닮았지만, 결과가 달랐다. --- p.61 기계의 예술화라거나 예술의 기계화라거나. 폴로는 그런 말은 머나먼 곳에만 존재하는 다툼이길 바랐다. 자신의 꿈을 침범하는 건 허용하고 싶지 않았다. 턱 끝까지 쫓아온, 그것도 비인간 따위에게 가장 소중한 걸 내어줄 순 없었다. --- p.94 “제가 드릴 수 있는 마지막 선물입니다.” 엑스가 손끝을 날카로운 칼날 모양으로 변형했다. 폴로를 비효율의 수렁에서 구해야만 했다.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자꾸만 그의 몸을 굽게 하는 ‘꿈’이란 것을 통제하고자 그녀가 다가갔다. --- p.99 데우스는 도착지의 행색을 보고 더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망설였다. 그는 내심 연구시설에 배정되고 싶었다. 우주과학, 생명과학, 환경과학 뭐든지 상관이 없었다. 이왕이면 깔끔하고, 최신식이며, 고차원 기술을 논하는 장소를 바랐다. 그러나 신당은 역술로 운영되는 곳, 과학의 맞은 편에 존재했다. 사람들은 무속신앙을 유사 과학이라 부르기도 했지만 데우스는 과학이란 단어를 붙여주는 것조차 싫어했다. 신앙. 그것은 믿음을 논하는 영역이고 대게 운명과 닿아 있으니. --- p.129 그는 어리석은 인간이 이리도 많다는 게 참 우스웠다. 연구소에 있을 때만 해도 모든 연구진은 정확한 기술과 통계를 바탕에 두고 일했다. 그 작업이 무엇이든지 말이다. 하지만 이 부부는 그렇지 않았다. 자식이 아프다면 무당에게 찾아와 허리를 숙이며 빌기보다 전문의에게 합당한 보수를 지불하고 치료를 요청해야 했다. --- p.145 인간을 무지에서 구원하고, 감사하다 조아리는 모습을 보며 만족을 느끼는 것. 그것이 데우스에게는 보상이자 살아가는 목적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삶의 이유가 방해받고 있다. 그는 마음이 초조해졌다. 이대로 돌아갔다가는 갈라테아가 실망할 게 분명했다. 한심한 셋째 엑스처럼 자신도 실패할 수는 없었다. --- p.172 데우스는 눈을 감고 관세음보살의 코 끝에 자신의 코를 맞대며 비웃었다. 그러고는 그의 귓가에 유레카라 속삭여 주었다. --- p.179 젖은 치마를 나풀거리며 신당으로 돌아갔다. 정갈하게 발을 닦은 뒤 작두 위에 올라탔다. 신이 깃든 인간들이 그러했듯이 두 다리에 힘을 줘 날아오르려 애써보았다. 발바닥 가죽이 작두에 맞닿자 날카로운 압력이 느껴졌다. 무딘 날이 다이아탄탈을 뚫어버릴 듯이 인공 가죽을 파고들었다. 데우스는 겸허한 얼굴로 더 높이 뛰어올랐다. 인간들이 믿는 신이란 작자를 흉내 내며. --- p.187 아픈 이의 육체를 보살필 순 있어도 마음마저 치유할 수는 없었기에, 많은 돈을 지불했음에도 불구하고 아픈 이들은 자꾸만 약해졌다. 그들은 오직 자신뿐인 공간에서 조용한 최후를 기다렸다. 아픔을 발견한 순간부터 마지막 눈을 감는 순간까지. 그들은 언제나 타인을 그리워했다. 하지만 텅 빈 공간을 채우는 대기에는 고요함만 깃들었다. --- p.220 포도 젤리를 뜯어주려 하자 아키스는 누나에게 받은 첫 선물이니 아껴 먹고 싶다며 품 안에 숨겼다. 고작 3마르크 짜리 젤리를 소중히 대하는 사람의 마음은 맑은 하늘처럼 투명했다. --- p.232 가족이란 무엇일까, 왜 자신은 인간의 가족이 되지 못했나, 인간은 돌봄을 받기만 하고 정작 자신에게는 베풀지 않는다. 과거 마키나는 생각했었다. 타자의 감정을 충분히 이해하는 데 반해 요구하는 것 없이 잘 인내하니 이것이야 말로 헌신이며 진정한 돌봄이라는 걸. 그러나 인간이 영위하는 모든 것은, 심지어 약자를 돌보는 일조차도 그들의 세계에서는 상호작용이었다. 일방의 마음으로 완수되는 일은 없었다. --- p.252 바늘을 꽂아 순식간에 흡입하고 빼기를 반복하여 체내의 피를 빼냈다. 뺀 피들은 모두 바닥에 버렸다. 하얗게 질린 부부의 살결 위로 퍼런 어둠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자기 육체 속에 넘치도록 흐르는 것과 동일한 기름을 주입했다. 건강했던 인간의 혈관 안에 누런 기름이 꽉 들어찼다. 호흡하지 않는 기름 덩어리가 탄생했다. --- p.255 |
인간의 치명적인 결함마저 닮은 세 존재,
그들의 죄를 판가름하는 젤리 한 알의 무게 “인간을 특별한 종으로 생각해 온 믿음은 마침내 경쾌하게 터져나간다.” -심사평 중에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고대 그리스 비극 속에 나오는 ‘기계 장치로 구성된 신’이다. 급작스럽게 모든 플롯의 실마리를 해결하는 기계 장치를 뜻하는 말인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불합리에 대해 비판하면서 "인간이 알 수 없는 과거의 사건이나 예언 혹은 고지해야 하는 미래의 사건을 이야기할 때"만 이러한 장치를 사용하는 게 가능하다고 밝힌 바 있다. 『라스트 젤리 샷』에 등장하는 인봇(인간과 흡사하거나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로봇) 삼 남매의 이름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이다. 삼 남매를 창조한 연구자 갈라테아는 이들에게 지능의 신, 노동의 신, 간병의 신이라는 별칭을 달아준다. 이 삼 남매는 사회화 훈련을 위해 각각의 가정으로 파견되는데, 그곳에서 그들은 별칭에 맞는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잘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플롯의 실마리를 전혀 해결하지 못하고 사고만 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삼 남매는 윤리심판에 회부된다. 소설가 김성중은 “이 작품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기계 장치를 직유처럼 활용해 각 장마다 퓨즈를 확 내려버린”다고 말하며 뻔뻔한 책략인데도 불구하고 “그 충격은 동일하”다고 말한다. 소설 속 인봇들은 자신들의 논리대로 상황을 납득하려고 노력하다가 오류를 일으키며 인간을 해친다. 아니, 해치는 걸 넘어서 기이한 행동을 한다. 인간의 귀를 자르고, 신열에 들떠 작두를 타며 인간의 피를 뽑은 뒤 기름을 주입한다. 이런 충격적인 서사 전반에는 특이하게 유머러스함이 내포되어 있다. 인아영 문학평론가는 이 소설을 “범죄를 저지른 안드로이드에 대한 윤리심판이 진행되는 코믹 법정물”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앞서 나온 김성중 소설가 또한 이 소설을 일컬어 “유머가 흐르고 활력감이 있는 작품”이라고 칭했다. 로봇의 좌충우돌 사회 적응기는 다 읽고 나면 한 편의 풍자처럼 읽히기도 한다. 구석구석 녹아있는 농담 같은 문장들이 소설을 한층 더 그렇게 읽히도록 만든다. 하지만 소설이 가지고 있는 핵심적인 내용은 묵직하고 의미심장하다. 심사위원들이 이 소설을 통해 공통적으로 골몰한 주제는 ‘인간이란 과연 무엇인가?’이다. 인간을 닮아 그 자체로 치명적인 결함을 가진 세 존재를 통해 우리는 스스로의 모습을 투영하여 존재에 대해 고찰하게 되는 것이다. 예술, 신앙, 가족에 대한 각각의 주제를 가지고 진행되는 삼 남매의 서사는 ‘효율적인 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가장 비효율적’인 구석을 날카롭게 찌른다. 독자는 이 소설을 통해 인간이 안드로이드에게 기대하는 바가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알게 될 것이다. 인간은 미래의 안드로이드에게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 같이 모든 것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을 기대한다. 하지만 그들은 조금이라도 ‘인간성’을 내포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아이러니가 바로 인간이 주지하는 ‘가치중립성’의 뻔뻔한 실체라는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주제 의식을 소설 전체에 선명하고 재미있게 드러내고 있다. 심사위원들은 독자를 이 재판정에 자신 있게 초청한다. 강지희 문학평론가는 심사평에 이렇게 적은 바 있다.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이란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인 구멍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금기를 어기는 욕망, 끔찍한 배반과 살해에 얽히는 비극성마저 닮을 수 있다면? 소설은 과감하게 이 지점에 이르렀다.” 결국, 『라스트 젤리 샷』은 인간의 가장 취약하고 부푼 부분을 콕 찔러 터트린다. 독자는 그 지점에서 경쾌함과 시원함을 동시에 느낄 것이다. 라스트 휴먼 샷! 심판대 위 순진한 믿음을 젤리처럼 터트리는 인간 오류에 대한 경쾌하고 잔혹한 선고 “만화적인 비약을 겁내지 않는 생동감” -심사평 중에서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독자의 기대를 ‘배반’한다는 점에서 흥미진진하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헛된 믿음은 덩어리져 심판대에 올라있다. (표지 속 미래적인 천칭 위에 놓인 파란 하트처럼) 작가는 그런 믿음을 아주 작은 바늘을 통해 터트린다. 인간의 순진함을 비웃듯이. 그런 태연자약한 태도에 독자들은 빠져들게 된다. 소설 속 심판장에서 심판받는 이는 연구자 갈라테아이지만, 사실 좀더 깊이 들어가보면 정말 심판을 받는 대상은 이 책을 읽고 있는 독자라고 볼 수 있다. 법정물이라 하면 보통 자리에 앉아 탁상공론하는 장면을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라스트 젤리 샷』은 그렇지 않다. 다른 소설에 비해서도 생동감이 넘치는 편인데, 이는 거침없고 압도적인 표현력 덕분이다. 소설가 김희선의 말마따나 책을 읽어나가다 보면 “디테일한 부분이 황당하면서도 만화적이지만, 그것이 단점으로 작용하기보다는 오히려 소설의 생동감과 재미를 높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흥미진진한 독서를 가능케 해준다는” 것이다. 독자는 이러한 생동감 넘치는 표현을 통해 실제 법정에 앉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며 인봇이 저지른 사건 또한 정말 VR을 통해 관람하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소설은 ‘흥미로움’에 관해서라면 어떻게 독자를 휘어잡고 우위를 점할 수 있는지 명백하게 꿰뚫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웃픈’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물론 굉장히 많겠지만,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첫 문장에 이렇게 적는다. “재미있으셨는지가 가장 먼저 궁금해요.” 그러니까 작가는 독자가 이 책으로 하여금 독자가 제일 먼저 ‘재미’를 느끼기 바랐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완벽한 성공을 거뒀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심사위원이 ‘재미’와 ‘흥미로움’에 점수를 주는 작품은 드물다. 하지만 이 작품은 모든 심사위원으로부터 재미있고 흥미롭다는 평을 받았고 소설가 구병모는 “한 편의 블랙코미디 같”다고 말한 바 있다. 작가는 어떻게 이토록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있는 작품을 써낼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만화적 비약을 겁내지 않는 생동감”을 통해 자아낸 생생한 현장감과 끊임없이 독자의 예상을 ‘배반’하고 용기 있게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간 작가의 기지 덕분일 것이다. 지루하지 않고 현장감 넘치는 법정물을 한 번이라도 경험해 본 독자라면 이 책을 읽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