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층에 정원과 나무가 내다보이는, 사색의 공간으로 설계한 방이 있다고 말했다. 미닫이창을 열고 좁은 책상에 앉아 돌과 나무와 하늘을 바라볼 수 있다고. 가끔은 잠시 멈추고 그간 일어난 일을 생각해도 좋은 것 같다고, 어쩌면 슬픔을 생각하는 게 정작 행복을 느끼는 길인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 p.24
결국 언니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딸이 며칠이고 같은 옷을 입게 두고, 필요할 때 아랫단을 꿰매 달아주고, 저녁때 따뜻한 음식을 해 먹이고, 부족한 이해심으로 딸을 바라보고, 온갖 불충분한 방법으로 위로해주는 것뿐이라고 했다.
--- p.33
나는 모네의 걸작으로 꼽는 그림을 여태 보고 있는 엄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엄마는 음악에 몸을 흔들 듯, 또는 몹시 피곤한 듯 가볍게 휘청이고 있었다. 나도 미술관에서 보거나 책에서 읽은 것이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다고 엄마에게 말했다. 의견이나 관점이 있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의 압박감을 안다고, 더욱이 그 의견을 명료하게 말할 수 있어야만 할 것 같은데 거기에는 대개 특정한 교육이 선행되어야 하기 마련이라고. 역사와 맥락에 대해 말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런 교육은 여러 면에서 외국어와 같다고 했다. 나는 오랫동안 이 언어를 믿었고 그에 유창해지려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가끔은, 아니 실은 점점 자주, 이런 종류의 반응 또한 허위이자 하나의 연기라고 느끼게 되었다고, 그리고 이 역시 내가 찾는 게 아니라고 말했다. 때로 나는 그림을 보며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다. 느끼더라도 그건 직관이고 반응일 뿐이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럴 때는 그저 그렇다고 말해도 된다고 나는 말했다. 중요한 건 열려 있는 것, 듣는 것이라고, 말할 때와 말하지 않을 때를 아는 것이라고.
--- pp.62~63
그런 날이면 수영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정원과 나무마다 꽃이 피고 오솔길은 날빛으로 환한 가운데 나를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내 몸이 나의 것이라는 감각, 힘있고 햇볕에 그을린 내 몸이, 내가 열심히 애쓰는 한은 내가 원하는 뭐든 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이어 세계가 거대한 깔때기처럼 활짝 열렸고, 땅에 발을 딛고 있던 내가 나무 잎사귀 틈과 그 너머 하늘로 솟아오르는 감각이 몸에 충만했다. 그런 순간이면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거나, 뭐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생각을 했다. 이런 순간이 지속하는 적은 없었다. 느닷없이 닥친 만큼 느닷없이 사라졌고, 그 급작스러움 때문에 실제로 일어나기나 한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만 가던 길을 다시 가야 했다.
--- p.100
남자가 드디어 말을 멈췄고, 나는 주방으로 돌아가 빈병을 분리수거함에 넣었다. 그때 느낀 감정을 당시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는데, 그 사람이 내게서 무언가를 앗아간 기분이었다. 수영장에서 홀로 누리는 행복감과 맞닿는 무엇, 그 그림을 보며 느낀 기분의 언저리에 있는 무엇을. 이런 것들은 소중했고 내게는 아직 신비였는데, 이제 그로부터 내가 더 멀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행주와 쟁반을 챙기러 무릎을 꿇었다. 다시 몸을 일으켜 연회실로 돌아가 그사이 일이 심하게 뒤처진 걸 확인하고는 서둘러 거들기 시작했다.
--- p.111
로리와 나는 늦은 시간까지 책을 봤고, 그러다 설핏 잠이 들면서 나는 로리가 책을 읽다 말고 속속들이 잘 아는 격의 없는 상대를 바라볼 때 가능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음을 감지했다.
--- pp.123~124
나는 엄마를 생각했고 언젠가 그러니까 아직 오지 않은 어느 날, 한 번도 보지 못한 엄마 집에 단 한 가지 임무를 위해, 엄마가 한평생 쌓아온 소유물을 정리해 모두 치우고 꾸리러 언니와 함께 가게 될 것을 생각했다. 그 집에서 발견할 온갖 것들을 생각했다. 패물과 사진 앨범과 편지와 같은 사적인 물건도 있겠고, 꼼꼼하고 잘 정돈된 삶의 표지도 있겠지. 계산서와 영수증, 전화번호, 주소록, 세탁기와 드라이어 사용 설명서 같은. 욕실에 있을 반쯤 쓴 향수와 크림이 든 유리병과 용기. 엄마가 매일 치르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보이길 그리도 꺼리던 의식의 흔적. 언니는 어김없이 질서정연한 자세로 임하며 간직할 것, 기증할 것, 쓰레기로 처리할 것, 세 가지 더미로 모든 걸 정리하자고 말할 것이다. 난 동의하겠지만 끝내 아무것도 간직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다. 다만 그 이유가 감상이 지나쳐서일지 부족해서일지는 알 수 없었다.
--- pp.126~127
일본에 가면 뭘 보러 가고 싶으냐고 내가 여행 전에 물으면 엄마는 뭘 봐도 기쁠 거라고 종종 대답했다. 한번은 겨울에는 눈이 올 정도로 추운지 내게 묻기도 했는데, 그게 눈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엄마가 한 유일한 질문이었다.
--- pp.135~136
시간이 조금 지나자 더이상 춥지 않았고, 대신 엄청난 피로가 덮쳤다. 어쩌면 모든 걸 이해하지 않아도 괜찮고, 그저 보고 보듬는 것으로 충분할 수 있겠다는 둔탁하고 고단한 한 줄기 생각이 스쳤다.
--- p.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