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동물’은 경과적 개념이다. 코끼리와 연어와 개구리와 뱀과 제비와 오징어와 전갈과 모기와 지네와 해삼과 산호와 지렁이와 플라나리아를 ‘동물’이란 한 단어로 퉁칠 수 있다고? 동물은 동물의 실체를 온전히 표상할 수 없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성의 없게 느껴졌다. 하지만 동물(정확히는 존재하는 존재자)은 동시에 최종적 개념이기도 하다. 자연과학, 그중에서도 계통분류학이라는 이성의 정점이 동물의 정상성을 만들었고 그 정상성에 기대어 지금의 인간중심주의가 득세할 수 있었다. 현실에서 비인간동물은 더 이상 아무런 수식어 없이 정립되지 않는다. 우리는 농장동물, 전시동물, 반려동물, 실험동물, 야생동물 등 인간이 정의한 구획 안에만 동물이 존재하는 정상동물 이데올로기의 시대에 살고 있으며, 이는 자본주의 체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어떤 미사여구를 갖다 붙이든 동물이 인간의 필요에 의해 음식, 장난감, 사냥감, 장식품, 무기, 도구로 나뉘는 순간 정상동물 이데올로기는 작동한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중심적 분류에 따라 ‘정상적’으로 대하는 모든 행위는 자연스럽게 정당화된다. 심지어 죽이는 행위까지도.
--- p.11~12, 「들어가며: 정상동물 이데올로기와 편들기」 중에서
우리에게 ‘피타고라스의 정리’로 친숙한 수학자이자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제자들에게 동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신의 창조물이고, 윤회를 통해 인간도 동물이, 동물도 인간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채식, 절제, 침묵을 통해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의 이름을 딴 공동체에 입회하려면 수년간 채식, 절제, 침묵의 계율을 지키고 훈련해야 했다. 영혼이 인간과 동물을 구별 없이 오간다고 생각했기에 지위에 차이를 두지 않았고, 그런 점에서는 가장 급진적인 동물권 사상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그로부터 700년 뒤, 피타고라스의 유산을 이어받은 플루타르코스는 〈육식에 대하여(Of Eating Flesh)〉에서 “(잠시의 쾌락을 얻기 위한) 약간의 살점을 먹기 위해 우리는 그들에게서 태양과 빛을, 즐기려고 태어난 삶과 시간을 빼앗는다. 그리고 그 동물이 우리에게 보내는 비명소리는 불명확한 소음일 뿐이라고 여기며, 그것이 항의와 간청과 애원의 소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썼다. 그는 동물도 이성을 지니고 있다는 철학을 공유하며, 오히려 동물이 인간보다 용기·절제·지혜 면에서 나은 존재라고 설파했다.
--- p.35, 「고통받지 않을 권리 너머」 중에서
우리는 흔히 동물에게는 동물이 사는 고유한 방식이 있고, 그 습성을 최대한 존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미 인간의 생활과 너무 밀착되어 인간과 동일한 사회 구조에서 ‘유사인간’으로 살고 있는 동물들에게 당장 필요한 세계는 인간의 현실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런 환경을 지속하자거나 동물복지를 증진하면서 지금과 같은 관계를 유지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경마는 물론이고 낙농업과 축산업은 모두 종식되어야 한다. 다만 앞에서 보았듯 의인화는 다른 종의 경험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이라는 종의 경험을 활용하는 유용한 도구라는 점과, 인간이라는 종은 많이 연구되었으므로 다른 동물을 이해하기 위한 좋은 모델임을 상기하면, 이런 의문이 든다. 왜 우리는 동물이 해방되고 동물권이 향상될수록 인간이 해방되고 인권이 향상될 거라고 이야기하면서, 200여 년에 걸쳐 연구하고 발전시켜온 인권의 유익함을 동물에게 적용하는 것을 주저할까? 생각해보면 지금의 현실도 전부 상상의 산물이었는데 말이다.
--- p.161~162, 「일하는 동물: 《자본론》 다시 쓰기」 중에서
돌고래는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괴롭다’, ‘아프다’라는 사람의 언어로 표현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의 말로 표현해야만 그들이 괴로움과 아픔을 겪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는 오히려 인간의 지능과 교감능력을 얕보는 태도다. 공리주의 학자들이 고통에 천착한 것도 동물과 인간을 막론하고 가장 알기 쉽게 드러나는 감정이 고통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돌고래의 정형행동을 보고도 돌고래의 고통을 알 수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알 수 없다기보다 알고 싶지 않은 게 아닐까.
--- p.176, 「동물원, 복지원, 보호소」 중에서
캐럴 애덤스Carol J. Adams는 《육식의 성정치》에서 ‘고기’라는 텍스트가 그 동물에 대한 제도화된 억압과 폭력을 가리는 훌륭한 언어적 수단이 된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한국에서는 죽은 소의 살을 ‘소고기(소+고기)’, 죽은 돼지의 살을 ‘돼지고기(돼지+고기)’라는 복합어로 가리키고, 영어권에서는 소의 살은 ‘cow meat’가 아닌 ‘beef’, 돼지의 살은 ‘pig meat’가 아닌 ‘pork’라는 전혀 다른 단어로 대체된다. 이뿐만 아니라 동물이 죽을 때의 연령과 성별, 조리법에 따라 수없이 많은 이름을 갖게 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은연중에 ‘소’와 ‘돼지’라는 독립된 실체를 망각한다. 소가 없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소고기’는 ‘고기’의 이미지만 남기고 고기에 앞선 존재인 소의 이미지는 지운다. 학교에서는 소의 실루엣에 선을 그어 안심, 등심, 양지, 사태 등 해체된 부위로 나누어 가르친다. 게다가 갈비찜, 불고기, 제육볶음, 두루치기, 보쌈, 족발, 스테이크 등 메뉴판 속 이름들도 그가 한때 살아 있는 동물이었다는 사실을 감춘다. 애덤스는이처럼 도살을 경계로 안심, 등심이나 불고기, 제육볶음이라는 ‘고기’로 불리면서 지워진 동물을 부재 지시 대상absent referent이라 명명한다. 동물의 이름과 신체는 ‘고기’에는 부재하는 ‘무엇’이다. 동물이 없다면 고기를 먹을 일도 없고, 살아 있는 동물은 고기가 될 수 없다는 점을 상기하면 ‘고기’는 ‘고기화’ 과정(정확히는 대상화-절단-소비의 과정)을 통해 살아 있는 동물을 대체한다. 다시 말해 모든 육식 뒤에는 ‘고기’가 가리는 ‘동물의 죽음’이라는 부재가 존재한다.
--- p.221~222, 「동물권과 포식의 정치」 중에서
조이는 육식주의를 분석하기 위해 사람들이 어떤 동물을 먹고 어떤 동물은 먹지 않는지 그 이유를 파헤친다. 캄보디아의 타란튤라 튀김, 이탈리아의 구더기 치즈 카스 마르주Cas Marzu, 아이슬란드의 숫양 고환 절임, 필리핀의 부화 직전의 오리알을 삶은 발룻Balut을 기꺼이 먹을 한국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조이는 우리가 소, 돼지, 닭을 먹는 것은 실제로 영양과 편의 면에서 식용으로 적절해서라기보다는 사회적·문화적·역사적으로, 즉 후천적으로 습득한 스키마schema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스키마란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정리하고 분류하여 신념, 생각, 인식, 경험을 구조화하는 일련의 범주이며, 스키마에는 당연히 동물에 대한 것도 있다. 조이는 먹을 수 있는 동물과 먹을 수 없는 동물을 나누는 것을 이분화라고 표현하지만, 나는 사유의 범위를 더 넓혀 정상동물 이데올로기라는 표현을 사용하고자 한다. 인간은 일정한 시공간에서 인간과 맺는 관계에 따라(실은 인간의 편의에 따라) 동물을 임의로 구획하여 일정한 역할을 부여하고, 이를 당연한 것으로 믿는다. 개, 고양이는 반려동물, 토끼, 쥐는 실험동물, 소, 돼지, 닭은 식용동물, 돌고래, 원숭이는 전시체험동물, 기린, 사자는 야생동물 같은 식이다. 물론 중첩되는 동물들도 있다. 가령 원숭이는 거의 모든 분류에 해당하고, 야생동물이 전시체험동물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따라서 하위 스키마 또는 교차 스키마로 범주화할 수도 있다. 반려동물로 범주화된 동물은 인간과 ‘가족’이 되고, 실험동물이 된 동물은 ‘값진 희생양’이 되며, 군견이나 경찰견처럼 특수목적 동물이 된 동물은 ‘숭고한 영웅’이, 전시·체험동물이 된 동물은 ‘훌륭한 교육 자료’가, 축산동물이 된 동물은 ‘맛 좋은 영양분’이 된다.
--- p.227~228, 「동물권과 포식의 정치」 중에서
‘달 뜨는 보금자리’의 다섯 소(미나리는 부상을 당했다가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들은 이제 만 4살이 되었다. 농가의 남성 얼룩소들은 보통 24개월을 넘기지 않고 도살장에 보내지기 때문에, 동물해방물결 활동가의 말처럼 “존재 자체만으로 축산업에 균열을 내는 우리 꽃풀소”들을 보면 뭉클하고 때로 웅장해지기도 하다. (실은 축산 피해 동물이라 칭하는 것이 더 걸맞는) 농장동물이 학대나 착취가 없었다면 살아갈 수 있었을 삶, 가질 수 있는 권리에는 ‘자연사할 권리’ 가 있을 텐데, 지금으로선 이 ‘꽃풀소’들이 한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자연사할 수 있는 소들이다. 이들은 ‘고기가 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라고 온몸으로 외친다. 그래서일까, ‘달 뜨는 보금자리’에 찾아가 이들과 눈을 맞추는 것만으로, 그저 한 공간에서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만으로 감동했다가 슬퍼졌다가 결연해진다.
--- p.300, 「위기들의 시대, 동물과 공생하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