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1월, 옹동화의 주선으로 강유위의 응소를 황제가 친람. “하문하심에 응해 나라의 활로에 대한 방책을 아뢰겠나이다. 일찍이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는 변복하고 유럽을 돌아보며 배움을 얻어 국가를 근대 제국으로 개조했으며, 변방의 섬나라 일본은 서구화 유신 25년의 부국강병으로, 중국이 전쟁으로 이길 수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청일전쟁의 치욕에 이어 올해(1898년) 유럽 4개국에 요항들을 뜯기는 수모를 당했으니, 유신의 대업을 어찌 한시라도 미루겠나이까!! 조국 근대화 ㄱㄱ!!”
--- p.22~23, 「제2장 무술변법」중에서
1898년 9월 19일, 서태후가 자금성으로 환궁. 같은 날, 서태후 측 금군이 강유위 자택 급습. 강유위의 동생 강광인이 잡혀간다. “그렇게 정리되었으니, 주상은 이제 호수에서 머리 좀 식히고 있도록 하시오.” “…이 나라의, 청조의 명줄을 구할 마지막 심폐소생술 기회를 이렇게 뭉개버리십니까?!” “이 나라의 명줄이 다한다면 청조의 근본을 지킨 채 죽어야지, 뭔 사이비 선비의 잡탕 광대 놀음판을 임종 삼을 순 없소이다.”
--- p.53~56, 「제4장 무술정변」중에서
1898년 10월 15일, 독립협회 총대위원들이 중추원 관제 개정안(의회 설립안)을 정부에 제출하며 의회 설립 논의 시작. “명확하게 말하자면, 중추원을 서양의 ‘의회’로 만들자는 겁니다. 우리 중추원은 일단 서양 의회의 상원 역할을 추구하도록 합니다. 그리하여 중추원이 정부의 정책과 법안을 ‘의정’토록 하는 겁니다.” “헉; 나왔다!! 데모크라시;;”
--- p.122~124, 「제10장 입법의 가을」중에서
11월 4일 밤. 근왕 수구파 대신단 긴급 입궐. “…요원들이 4대문 순찰 중에 이 벽보를 발견해 뜯어 가져왔사오니… 내일 선거를 통해 박정양을 대통령으로, 윤치호를 부통령으로 뽑아 공화제를 선포하자는 역모 선동 벽보이옵니다!!” “데모크라시 시위꾼놈들! 역심 돋는 거 진작부터 그럴 거 같더라!! 바로 시국 사범 체포 작전을 진행토록 하라!!” 1898년 11월 5일 새벽, 경무청 포박대 출동. 집에서 자고 있던 이상재, 남궁억 등 독립협회 지도부 17명 전격 체포. 11월 5일 아침, 선거를 위해 독립관으로 모여든 백성은 大충격. 분노한 군중이 경무청 앞에 집결. 만민공동회는 철야로 이어지고.
--- p.142~146, 「제11장 반전의 아침」중에서
11월 21일 밤늦게까지 계속된 폭동으로 서울의 보부상 상무소와 황국협회 간부들의 집, 근왕파 대신들의 집이 모두 파괴된다. “헉;; Demo가 이제 Riot으로 발전한 건가;;” 11월 22일 밤~23일에 걸쳐 서양 공사들이 경운궁에 머물며 황제의 신변을 보호한다. “…백성이여, 독립협회 다시 허용해줄 테니 캄 다운~ 캄 다운~ ㅎㅎ;;” 11월 22일, 독립협회 복설. 1898년 11월 23일, 만민공동회와 정부 간 협상 성사.
--- p.161~165, 「제13장 Riot-무술민란」중에서
그 와중인 1898년 12월 15일에 어찌어찌 중추원 개원. “한반도 최초의 근대 의회가 시작됩니다!!” 12월 16일, 최정덕 등 독립협회계 의관들이 첫 안건을 내놓기를- “정부를 새로 구성할 대신 후보 명단을 작성해 윗전에 올립시다!” 독립협회계 의관들의 표를 중심으로 대신 후보 명단이 작성되었으니. “박영효”
--- p.175~176, 「제14장 친유 & 의회 개설」중에서
을미사변의 심정적 공범으로 여겨지는 박영효는 황제의 역린을 긁는 이름이었고. 민심은 독립협회의 박영효 구명 운동에 크게 실망해 돌아섰고. 군심도 크게 동요했으니. 1898년 12월 21일, 황제 선포. “인내는 끝났다!! 역적 박영효 옹호하는 놈들일랑 싹 다 잡아들여라!! 국외 도망자에 대한 사면은 결단코 없을 것!!”
--- p.179~187, 「제15장 적의 친구」중에서
“아무래도 뒤탈이 없도록 말 잘 듣는 아이로 황제를 교체할 필요가 있다. (…) 단왕 재의는 애비와 달리 충용하고 똘똘한 부분이 있지.” (단왕 재의는) 서태후의 눈에 들어 서태후의 친조카와 결혼. 그 결혼으로 아들 부준이 나온다. “…느그 아들 부준을 다음 황제 시켜야겠다.”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아, 그게, 저, 그건 좀 재고해주십사 하는 중신들의 우려가 있사온데…” 단왕 재의와 그 당파는 극단적 배외주의자들. 이에 비해 영록과 그 일당이 무술변법을 박살 내긴 했지만, 서구 문물 도입 자체는 계속 추진해오고 있다. 결정적으로 서구 열강 공사들도 부준의 황위 계승을 비토. 부준이 황제 대행으로 주관하는 1900년 새해맞이 행사 참석을 거절한다.
--- p.282~288, 「제20장 기해건저」중에서
“아니, 솔직히 의화권 자체는 그냥 권법 수행일 뿐이잖아요? 지역 주민과 교회 간의 분쟁도 따지고 보면 교회 쪽 잘못이고. 무조건 나쁜 놈들이라고 잡아 족치는 건 해결책이 아니지요. 오히려 의화권 단체들을 정식 ‘단련’으로 공인해주는 게 저들을 제어하는 상책!! 요지는, 저렇게 인기몰이 중인 플로우에서 적대하고 있는 목표가 서양 교회, 서양 문물, 서양인- 서양 그 자체라는 거죠. 그리고 서양 앞잡이인 양무파 또한 원수로 여긴다는 것! So, 이들의 정치적 이용 가치가 있을지 어떨지… 알아볼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1898년 2월, 청 조정은 의화단 단련 인정 조칙 발표.
--- p.305~310, 「제21장 매화와 주먹」중에서
“뭣보다, 엊그제 베이징에 들어온 양놈들 해병대 병력이, 사실은 황제와 변법당의 쿠데타를 지원하기 위한 병력이라는 소문이 있습니다만. 황제와 양놈들이 그리 수작 부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의화단의 머릿수를 활용하는 압박이 필요할 듯하옵니다.” “뭬야?!?! 자식 된 백성이 충량한 뜻을 품고 어머니를 찾아온 어여쁜 마음을 어찌 외면하겠는가! 의화단의 베이징 입성을 허락한다!” 1900년 6월 7일, 의화단이 베이징 입성.
--- p.323, 「제22장 6월의 광시곡」중에서
6월 20일, 독일 공사 케텔러 남작이 소수의 수행원과 함께 자금성行. 가던 도중 감군 병사들과 시비가 붙는다. “며칠 전 독일 공사관 경비병이 중국인 쏴 죽인 거 사죄하시오!!” “어, 그거, 내가 공사관 접근하는 폭도는 바로 사살하라고 명령했다! 사이비는 죽어야 치료되지!” “어, 우리도 양귀 바로 사살 ㄱㄱ!!” “외교관을… 살해?!” 그렇게 사태는 돌아올 수 없는 강 너머로. 1900년 6월 21일, 청조는 선전포고. “구차하게 살아남아 만고에 수치를 남기겠는가!! 한번 일어나 자웅을 겨뤄보자!!!”
--- p.343~344, 「제23장 교전 돌입」중에서
6월 23일, 의화단이 영국 공사관 공격을 위해 한림원에 불을 지르며 본격적인 공세 시작. 서쪽 수비선은 영국군과 러시아군이 맡고, 동쪽 수비선은 프랑스군과 일본군, 오스트리아군이 맡는다. 그리고 공사관 구역을 내려다보는 남쪽의 베이징 내성 성벽. 성벽 위 동서 양방향을 각각 독일군과 미군이 맡는다. 구역 내로 피신한 3천여 명의 중국 기독교인은 바리케이드 구축과 각종 수송 업무를 맡는다.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는가!!! 갈 때는 탄약고에 불붙여서 놈들과 함께 갑시다!!”
--- p.374~379, 「제26장 55 Days in Summer」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