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스름한 달빛이 세상천지에 그득 고여 있었다. 걸을수록 짙어진 농밀한 달빛은 한움큼 손으로 움켜쥘 수도 있을 듯했다. 쌓이자마자 녹기 시작하는 이른 봄의 폭설처럼 달빛이 그의 발을 쑥쑥 잡아당겼다. 그 서늘한 촉감에 진저리를 치며 건우씨는 잠에서 깨어났다. 푸르스름한 여명의 빛이 창호지 문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작은집에 맡겨진 이래 육십년을 한결같이 그는 달빛에 발목이 붙들린 채 눈을 떴다. 누이가 새벽 단잠에 취한 그의 몸을 흔들었던 바로 그날 새벽의 달빛이 그러했다.
--- p.8, 「못」중에서
아버지와 어떤 세월을 보냈든 그는 아버지의 자식으로 태어나 아버지의 품 안에서 하나의 인간으로 성장했다. 먼 여행을 할 때마다 어린 그가 부모님의 품에 안겨 칭얼대며 잠들었듯 어머니는, 아버지는 그의 차에서 여행의 피로를 못 이겨 잠들어 있었다. 그들이 그의 생명을 키워냈듯 이제는 그가 그들을 품어 그들이 세월에 빚진 생명을 온전히 놓고 죽음으로 떠나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는 것이다. 받은 것은 반드시 돌려줘야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냉정한 생명의 법칙이었다.
--- p.62~63, 「봄빛」중에서
내 새끼, 그래 한시상 재미났는가?
그의 귀에 와닿은 것은 분명 어머니의 음성이었는데, 순간 놀랄 시간도 없이 묵은 기억 하나가 기억의 어두운 심해에서 전기뱀장어처럼 하얀 불빛을 반짝이며 의식의 표면으로 꿈틀꿈틀 솟아나왔다.
어매, 나가 왜 세상에 나왔는 중 안가?
바삭바삭, 경쾌한 소리가 좋아 멍석에 깔린 콩대 위를 팔짝팔짝 뛰어다니던 그가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는 멍석 한편에서 콩대를 두드리는 중이었다. 낭자한 머리에 허옇게 먼지를 뒤집어쓴 어머니는 일손을 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왜 나왔는디?
어매 배 속에 있는디 되게 심심허잖애. 시상에 나가먼 먼 재밌는 일이 있능가 글고 얼릉 나와부렀제.
아직 젊었던 어머니는 땡볕에 까맣게 그을긴 했으나 지금과 달리 윤기 흐르는 얼굴 가득 웃음을 피워올리며 물었다.
내 새끼, 그래 시상에 나와봉께 재미난가?
이.
--- p.92~93, 「풍경」중에서
보급투쟁을 성공리에 마치고 노래와 춤이 어우러진 오락회가 열렸다. 흥이 무르익어갈 무렵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온 그는 풀대궁을 뽑아 피리를 불고 있었다. 세상에서 뭐가 제일 좋으냐는 이현상의 질문에 그는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꽃이 제일 좋그만이라. 꽃이라 …… 피어 있을 때야 좋지만 질 때는 허망하지 않소? 사내자식이 좋아한다는 게 고작 꽃이라고 비웃을 것 같아 그렇지 않아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던 그는 시상 사는 게 다 그러니께요, 꽃도 사램도 짐승도 어차피 다 죽을 목심이잖애라, 꽃이 지는 걸 보믄 워짠지 맴이 짠허고, 글다보믄 나도 짠허고 넘도 짠허고, 글그마요, 이현상의 질문에 더 한심한 대답을 주절대고 말았다.
--- p. 142~43, 「순정」중에서
“나가주세요.”
주인의 허락도 없이 소파 깊숙이 몸을 묻은 여자에게 내 딴에는 목청을 높인다고 높였지만 한 옥타브 올라간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리는 바람에 공포에 질린 도둑고양이의 새된 비명 같은 소리가 났고, 순간 여자의 얼굴근육이 부드럽게 펴지는 것을 나는 느꼈다. 여자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더 강하다는 것을 느낀 듯했다. 여자가 내 영역을 휘젓기 전에 나는 서둘러 덧붙였다.
“당신이 원하는 걸 다 줄 테니까 빨리 나가요.”
왼쪽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여자는 …… 웃었다.
“참 이상한 부부네. 이렇게 쉬운 걸 왜 웅현씨는 일년씩 말도 못하고 끙끙거렸나 몰라. 사랑하는 것도 아니라면서.”
--- p.162, 「양갱」중에서
길은 어디에나 있다. 사람이 쉬 접근할 수 없을 것 같은 높고 험준한 산에도, 보잘것없어 누가 오를까 싶은 시시한 산에도, 버려진 들판에도, 허물어진 폐가 언저리에도. 언젠가부터 김은 길에 끌렸다. 아니 길이 김을 이끌었다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김이 길과 처음으로 대면한 것은 근 십년 전, 몽골에서였다. 길과 처음으로 대면했다는 표현은 어폐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김은 그렇게밖에 표현할 도리가 없다. 그의 기억이 생성되기도 전부터 길은 있었을 것이고, 마을 고샅길부터 서울로 향하는 대로에 이르기까지 지난 칠십여년 동안 그는 숱한 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밟고 걷는 길을 의식해본 적은 없었다. 그가 본 것은 길이 아니라 그 길 너머의 보이지 않는 무엇이었다.
--- p.242, 「길 1」중에서
영감, 그 좋아하던 소주도 인자 싫소? 제우 한잔 묵고 마다요? 차라리 잘됐소. 맛난 것도 잊아불고, 좋던 것도 잊아불고, 그립던 것도 다 잊아불고, 올 때맹키 홀가분히 가씨요. 징헌 기억일랑 쩌 아지랭이맹키 날레불고 말이어라. 영감, 보이요? 민들레 꽃씨가 날리그만이라. 모르제라. 우리맨치 징헌 세월을 산 워떤 영감의 징헌 기억이 꽃가루로 날린가도 말이어라. 자요, 영감? 그리 자고 또 자요? 거그는 워떻소? 꿈도 없이 다디단 이녁의 잠 속은 워떤게라? 나도 잠 델꼬 가씨요. 나도 이녁이랑 한날 한시에 갈라요. 혼자된 딸년이 걸리기는 하제만 인자 다 컸응게 원도 한도 없소. 항꾼에 갑시다. 가설랑은 다시 안 올라요. 암만 존 시상을 준다개도 나는 싫어라. 이녁 각시로도 싫어라. 무정한 이녁이 싫어서는 아니고라. 이만허먼 됐소. 말로는 못해도라, 나는 알 것만 같그만이라. 생명이란 것의 애달븐 운멩을 말이어라. 헥멩도 뭣도 아니고라. 생명은 말이고라, 살아봉게 애달프요. 짠허고 애달프요
--- p.319~20, 「세월」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