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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아는 이렇게 말했다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

김혜순 저 / 이피 그림 | 문학동네 | 2016년 03월 1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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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6년 03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424쪽 | 696g | 152*225*25mm
ISBN13 9788954639835
ISBN10 8954639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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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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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록(AEROK)*에서 쓴다.
겨우 여기에서 쓴다.
여기에서 살다가 여기에서 죽을 거다.
겨우 여기에 이렇게 머물다 가려고.
미장원, 고시원, 병원, 은행, 식당, 휴대폰 판매상, 과일 가게, 늘어선 거리에서 머물다가 돌아와 다시 쓴다.
몇 번 버스를 타고, 몇 권의 책을 읽고, 몇 편의 영화를 보고, 몇 번 술을 마시고, 몇 번 엄마를 더 보고, 몇 번 울…… 것이 남았는가.
여기, 애록에서. ‘더이상 원하는 것이 없음’마저 넘어서. ‘더이상 살 수 없음’마저 넘어서.
껍데기로 휘황한 가설무대의 도시에서.
가설무대의 나라에서.
분홍색 보푸라기 돋은 스웨터의 털이나 가다듬으면서.

우주에 홀로 떠 있는 지구별의 고독.
이 고독한 별 한 귀퉁이에 붙은, 조그마한 뼈대 같은 산맥들을 품은 나라, 애록. 우주에서 유배 온 어느 곤충들처럼.

물 없는 우물에서 되돌아오는 메아리에 취한 것처럼, 고독에 취해 쓰는 것일까.

여기서
살아가기가.
사랑하기가.
---「애록에서」중에서

세상에서 시가 사라져간다.
이미 무형문화재급이다.

시는 사라지고 시인의 신화, 시에 대한 풍문이 남았다.
시는 사라지고 유행가, 타령, 잠언, 수필, 소문의 진위, 간신히 비유만 남았다.
시는 사라지고 시집과 시 잡지만 남았다.

시는 사라지고 신변잡기, 일갈, 처세술만 남았다.
시는 사라지고 낭만적, 감상적, 목가적인 노래가 남았다.
시는 사라지고 시 교육, 시 집단, 옛 시인들만 남았다.
시는 사라지고 시인이 시 밖에서 한 말들만 남았다.
시는 사라지고 시인에 관한 소문만 남았다.
시는 사라지고 반복, 재생산, 또 반복, 또 재생산이 남았다.
시는 사라지고 넘치는 센티멘털과 포즈가 남았다.
시는 사라지고 시의 호용, 시의 쓰임, 시의 이용만 남았다.
시는 사라지고 시인 되기 프로젝트 가동만 남았다.

시를 쓴다.
그 사라짐 속에서 쓴다.
---「사라지는 장르」중에서

시 축제에 초대받은 시인 중엔 에리트레아 출신 여성시인이 있었다. 에리트레아는 1993년에 독립했다.
에리트레아의 국기는 초록, 빨강, 파랑으로 되어 있다.

초록은 농업과 숲
빨강은 독립을 위해 흘린 피
파랑은 홍해
올리브 가지 문양은 희망

을 뜻한다고 했다.
시인은 에리트레아에서 살 때 감옥에서 고문과 학대를 받았다. 유럽 여러 나라에서 불법 체류자로 살다가 최근에야 이탈리아에서 망명이 받아들여졌다. 이 여성시인은 어디를 가나 자신의 트렁크를 끌고 다닌다. 가방은 방에 두고 나오세요 해도 절대 그 큰 가방과 떨어지지 않는다. 시를 낭독할 때도 트렁크를 끌고 무대에 올라간다. 마치 오디션 프로그램 [슈퍼스타K] 패자 부활전에 올라온 아이들처럼. 그녀는 트렁크와는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다. 늘 곁에 두거나 줄에 끌고 다니는 비만 강아지 같다. 다 같이 차를 마시러 갈 때도 끌고 가고, 시인들이 밤에 춤추러 갈 때도 끌고 간다. 한번은 그 안에서 조그만 돌 다섯 개를 꺼냈다. 우리에게 공기 시범을 보이더니 할 줄 아는 사람 모이라고 했다. 신기하게도 모두 공기놀이를 할 줄 알았다. 마지막에 점수를 올리는 꺾기 방법만 조금씩 다를 뿐. 공기 대회에서 아프가니스탄, 인도, 남쪽 애록에서 온 시인이 제일 점수를 많이 땄다.
에리트레아에서 온 여성시인이 가방과 함께 무대에 올라가 시를 읽었다. 아니 울었다.

롤롤롤롤롤롤롤롤롤롤롤 롤롤롤롤롤롤롤롤

에리트레아 숲에서 우는 새가 분홍 꽃잎 같은 혀를 울려 내는 소리 같았는데 통역도 필요 없고, 영어 자막도 필요 없었다.
문학이라는 제도 밖에서 우는 새소리였다.
---「반려 가방」중에서

포에트리 파르나서스에 갔다. 올림픽에 참석하는 202개국의 시인들이 왔다. 시인들 중 절반은 감옥 출신이다. 세계의 각 나라들은 모두 나름 분쟁중이다. 시인들은 않아에게 물었다. 풀타임 잡 있어요?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 ‘있어요.’ 않아는 그들의 사진을 찍어주면서 그들의 신발도 덤으로 찍었다. 시인들 중 절반은 신발이 헐었다. 구겨진 운동화를 신고, 헐어버린 샌들을 신고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기선을 타고, 런던으로 모여들었다. 부유한 북반구 나라들에서 신발은 그 신발을 신은 사람의 경제 수준, 유행 감각, 직업 선호도, 성 개방성, 심지어 정치적 성향까지도 알려준다고 에티오피아에서 칠레의 티에라델푸에고까지 세상에서 가장 긴 도보 여행을 한 폴 살로팩이 말했다. 아프리카에서는 수백만 명이 공평하게 똑같은 샌들을 신는다고도 했다. 부자일수록 동물의 신생아 가죽으로 만든 구두를 신으리라. 않아는 감옥에 묵어보지 못했다. 않아는 신발이 헐지 않았다. 그리하여 않아는 시인일까? 않아는 이후 시인들의 신발을 자주 관찰해보게 되었다.
---「않아는 이렇게 말했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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