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08년 09월 0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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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27쪽 | 428g | 148*210*30mm |
ISBN13 | 9788987203959 |
ISBN10 | 8987203956 |
발행일 | 2008년 09월 0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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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27쪽 | 428g | 148*210*30mm |
ISBN13 | 9788987203959 |
ISBN10 | 8987203956 |
소개의 글|지금 이 순간으로의 안내 독자 여러분께|깨달음은 우리 안에 있다 1. 나는 내 마음이 아니다 깨달음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당신 자신을 마음으로부터 자유롭게 풀어놓으라|깨달음이란 생각의 사슬에서 벗어나는 것|감정이란 마음에 대한 몸의 반응이다 2. 고통에서 벗어나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과거에 집착하지 말라|마음이 만든 허구에서 벗어나라|두려움은 어디에서 오는가|에고는 온전함을 찾아 헤맨다 3. 현재 속으로 침잠하기 마음속에서 나를 찾지 마라|시간에 미혹되지 말라|지금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영적인 차원으로 가는 열쇠는 현재에 있다|지금 이 순간의 힘|심리적인 신간에서 놓여나라|심리적인 시간의 광기|부정적 감정과 고통은 시간에 뿌리내리고 있다|삶 자체에 주목하라|모든 문제는 마음이 만드는 환상이다|무지 혹은 망상에서 벗어나기|당신은 이미 완전한 존재이다 4. 마음은 지금을 교묘히 회피한다 ‘지금’의 상실, 그것이 가장 교묘한 속임수다|일상적 무의식과 깊은 무의식|불안이 부작용을 부른다|일상적인 무의식에서 벗어나기|불행으로부터의 자유|지금 여기에 생생하게 깨어 있으라|인생 여정의 내적인 목적|과거는 현존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5. 지금 여기에 깨어 있다는 것 현존이란 무엇인가|기다림의 숨은 의미|아름다움은 현존의 고요함에서 생겨난다|순수 의식의 실현|당신의 신성한 현존에 대한 실재, 그리스도 6. 몸 안에 뿌리내리기 당신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말 자체에 집착하지 말라|보이지 않는 실재로서 당신 자신을 인식하라|내적인 몸과의 만남|몸을 통한 깨달음|내면의 몸을 통해 신과 하나가 되라|안으로 깊숙이 뿌리내리기|몸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용서하라|보이지 않는 세계와의 연결|노화가 늦추어진다|면역체계가 강화된다|호흡을 통해 몸 안으로 들어가기|마음을 창조적으로 사용하기|듣는 기술 7. 현시되지 않은 세계로 들어가는 문 형체 없는 영역에서의 진정한 자유|기(氣)의 근원|꿈 없는 잠|또 다른 문|침묵에 귀 기울이라|공간을 인식하라|공간과 시간의 진정한 본질|깨어 있는 죽음 8. 성숙한 인간관계 지금 여기로 들어가라|사랑과 증오|중독된 사랑과 완전함에 대한 추구|중독 관계에서 성숙한 관계로|영적 수행자로서의 관계|왜 여자가 깨달음에 더 가까이 있는가|여성의 집단적인 업장 녹이기|당신 자신과의 관계를 버리라 9. 행복과 불행을 넘어선 곳에 평화가 있다 선악 너머에 있는 더 지고한 선|삶이라는 드라마의 끝|인생의 무상함과 순환|부정적 감정은 이용하고 버리라|자비의 본질|참된 현실을 향하여 10. 내맡김의 지혜 ‘지금’을 받아들이라|마음의 에너지에서 영적 에너지로|인간관계에서의 내맡김|질병에서 깨달음으로|재난이 닥쳤을 때|고통에서 평화로|십자가의 길|선택의 의미 추천의 글|생생한 경험에서 나온 깨달음의 지혜 |
닥치고 명상
백화점에서 발렛파킹 한 지 10일이 넘었다. 어제 한 동료는 벤츠 뒷 범퍼 긁어서 자기 월급에서 50만원 게냈다. 나도 S클래스(거의 2억짜리) 이상 탈 때는 완전 긴장한다. 20대 직원이 나한테 무전 제대로 못 듣는다고 갈궜다. (그날 무전기 첨 잡았는데..) 또 나이 많은 신입이 어린 직원한테 “밥 많이 먹어~” 라고 반말했다고, 그 직원이 정색하고 소장한테 꼰질렀다. 그 신입 행님은 그 다음날부터 출근 안 했다. 그 후 나는 20대 애들한테도 꼬박꼬박 존댓말을 쓴다. 텃새가 더럽게 심하다.
내가 이 지하 주차장에서 뭐하지 모르겠다. 차 긁을까봐 노심초사하며 백미러 보고 있을 때가 아닌데.. 원래라면 나는 지금 맞춤정장 입고 강연하고, 이동진처럼 팟캐스트 녹음하고, 책 쓰고, 인세 받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결국 돈이 없어서 여기서 일하고 있다.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일이 끝나면 기진맥진하여 아무 것도 아무것도 못한다. 오늘은 쉬는 날이라 도서관에 이러고 있다.
모든 희망이 막혔다는 생각이 들 때가 가장 힘들었다. 책을 출판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는 것 같다. 아침에 눈 뜰 때마다 살기가 귀찮아서, 살기 싫다는 느낌을 아는가? 알람은 왜 맞추고, 머리는 왜 감고, 옷은 왜 입어야 하는가? 양치는 왜 해야 하는가? 극단적인 생각이 나를 힘들게 했다. 난 이제 어디서 희망을 얻어야 할까
너무 힘들어서 3년 만에 우울증 약도 꺼내 먹었다. 그랬더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역시 약의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그때 나는 내 친구가 했던 ‘그래봤자 죽기밖에 더하겠나?’ 이 말로 버텼다. 하지만 이것도 한계가 있었다. 더 강력한 한방이 필요했다. 그래서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그래 차라리 죽자!
대신 사람들한테 기억에 남을만한 작품 하나만 쓰고 죽자!! 윤봉길도 도시락 폭탄 멋지게 한방 던지고 죽었고, 이봉창도 일본 천왕 타킷으로 폭탄 던지다 죽었다. 그런 죽음은 멋진 거다. 죽음도 신의 일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건 신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나도 그 정도 임팩트 있는 멋진 죽음을 생각해보자. 이제 죽음은 피할 대상이 아니라 바람의 대상이었다. 이 세상의 모든 부정적 생각의 뿌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란 걸 안다. 이제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김도인도 자주 ‘죽음명상’을 한다고 한다. 매일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미련을 버리고, 욕심을 버리고, 암튼 맘에 걸리는 모든 것들 다 털어버리고 죽음을 상상하면 된다. 그러면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자유를 얻는다. 암에 걸린 사람이 죽음 명상을 통해서 병을 완치했다는 사례가 학회에 자주 보고되었다. 이 세상이 아이러니라는 사실을 알면 우리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게 내 마음은 다시 자유를 얻었다.
라깡의 인간학, 그 두꺼운 책을 읽었는데 결론은 결국, 공(空), 혹은 죽음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내가 바라는 모든 것들이 아무 근거가 없음을 알고, 결국엔 꽉 잡고 있던 것을 놓을 때 정신병이 치료가 된다는 것이다.
(에크 하르트 톨레의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우연히 한 권의 책을 더 읽었다. 그 책에는 모든 희망은 우리 삶 속에 ‘이미’ 있다고 하였다. 성공하거나, 책이 만 권 쯤 많이 팔리거나, 어쩌다 어른에 나갈 만큼의 스타 강연자가 되거나, 하연수 닮은 애인을 만나거나 하는 이벤트 따위에 행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금 우리 부모님, 친구들, 라디오 소리에 이미 행복이 스며있다고 하였다.
그 말이 사실일까? 믿을 수가 없다. 지금 내 일이 하나도 안 풀리고 있는데 무슨 명상을 하고, 현재를 느끼란 말인가? 이 순간에 모든 희망이 있다고? 그러면 나는 이제 행복하기만 하면 되는 걸까? 그러면 다음 달 내 카드값은 어떻게 메꾸란 말인가? 그 돈 누가 대신 내주나? 시험은? 녹음은? 해야 할 일 투성이인데 무슨 명상 같은 소리를 하고 있나
책에는 우리가 느끼는 압박은 모두 ‘환상’이라고 했다. 현재를 느끼지 못한 상태에서 억지로 하는 일은 우리를 더 불행하게 만든다고 하였다. 즉, 우리가 충분히 현재를 느끼는 것이 일빠따이고, 그래서 행복한 상태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지, 정신없이 이 일 저 일 끌려 다니면서 노가다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건 노예의 삶이다. 어차피 할 일은 해야 한다. 그 방식은 두 가지.
1. 억지로 하는 것.
2. 하고 싶어서 하는 것.
그 책에서는 명상을 할 때는 미래의 걱정 따위는 집어치우라고 한다. 오직 현재에만 충실하면, 그 에너지와 우주의 힘(책에서는 이런 표현을 많이 쓴다)을 느끼게 되고, 그 행복을 지속시키고 싶어지고, 그러면 일에 끌려다니는 것이 아닌, 일을 하고 싶어서 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게 바로 주인의 삶이다. 미래의 골치 아픈 일을 (수단으로써) 처리하면 내가 행복하니깐 결국 다 하게 돼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깐 제발 현재의 음악소리에 집중하고, 촉각, 후각, 미각에만 집중하라는 것이다. 의식적으로 현재에 있는 시간을 늘리자. 그러면 저절로 성공한다.
지금 행복하지 않으면 결국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 책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궁극적으로 모든 외부적 목적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물은 소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외부적인 목적이 우리에게 영구적인 만족을 주지 못하다는 사실을 빨리 깨달을수록 좋습니다’
그래, 외부적인 행복은 결국 공(空)이다. 내 잘생긴 얼굴에도 결국 주름이 생길 수밖에 없다. 사람은 결국 늙고 병든다. 작가로 성공해도 그 순간만 행복하지, 그 다음 작품을 고민할 것이다. 성공이 주는 행복은 영원하지 못하다. 외부적 목적은 끝자락이 선명하다. 모든 행복은 지금 이 순간에만 있다. 이 사실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하지만 답은 현재에 모든 행복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밖에 없다.
나는 이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닥치고 명상’이다. 명상이 모든 답을 줄 것이다. 내가 명상하는 방식은 독특하다. 나는 메모를 하고, 입으로도 명상을 한다. 호흡에 집중하고, 감각에 집중한다. 그래서 우주와 신의 힘을 얻고 시작한다. 눈치 챘겠지만 죽음 명상은 일종의 페이크이다. 진짜 내가 죽겠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내 멍청한 뇌는 내가 노트에 ‘죽겠다’ 라고 적으면, 그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구별을 못한다. 이성은 나의 뇌(腦)를 쥐락펴락 할 수 있다는 면에서 우월한 위치에 있다.
우리는 이성의 힘을 믿어야 한다. 감사일기를 적으면서 이 순간이 기적이고,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내게 주어진 ‘선물이다’라는 세뇌를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에 대해서도 대답할 ‘의무’가 있다. 이 짜증나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하는 발렛파킹을 해야하고, 돈을 벌어야 하고, 틈틈이 글도 써야 한다. 물론 양치질도 해야 한다. 이런 사소한 일도 모른척 해서는 안 된다. 이성이 한발 먼저 내가 좋아서 이런 일을 한다고 무의식에 말을 건네야 한다. 내가 우울하거나, 불안하다면 자신의 무의식에 되물어야 한다. ‘그렇게 슬퍼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냐고’ 어차피 해결방식은 하나다. 행복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다. 이성은 절대 태만하면 안 된다. 이 귀찮은 일들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다 좋게 해석할 수 있다. (돈 벌면 좋지 뭐)
이 패턴에 익숙해지면 내가 나 자신을 멀리서 지켜볼 수 있게 된다. 나는 그것을 ‘관찰자 시점’이라고 표현한다. 나 자신이 관찰자 시점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유혹적인 외형이나, 외부적 환상, 성공에 이끌리지 않고, 오직 내 행복에만 집중하면서, ‘오직할뿐(just do it)’ 이란 태도로 골치 아픈 일도 잘 처리할 수 있다. 우리 삶의 진정한 목적(혹은 신이 원하는 것도)은 외부적 행복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 의 몰입에서만 나온다. 그 사실을 분명하게 무의식에 알려야 한다. 어차피 무의식이 바라는 것도 나와 같다.
에크하르트 톨레의 영적인 가르침....
깨달음이란 결국 마음너머에 있는 근원적인 존재와 연결 되어 있는 現存을 보는 것...시간과 마음이 만들어 내는 우리의 정체성이란 환상에 휘둘리지 않는 것...
지금 껏...마음공부를 하기 위해 노력한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 된 설정이었다. 마음은 결국 몸을 받아 이 삶에 나오는 그 개체마다에 고유하게 주어져 세상 경험을 가능케 해주는 초점이고 감정은 그 마음에 반응하는 육체의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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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의 가르침>
어떤 말에 너무 집착하지 마십시요. 말이란 가능하면 빨리 건너가야 할 징검다리에 불과합니다....고대종교들은 지나치게 외부적인 문제들로 덧칠 된 나머지 그 영적 본질이 거의 가려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가르침들이 지닌 심오한 의미는 더 이상 이해되지 않고, 우리를 변화시키는 힘 또한 잃게 되었습니다.
마음을 부리지 못하고 부림을 당하는 것이 곧 병입니다. 나를 내 마음이라고 믿는 것은 환상이요 기만입니다.......마음이 당신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무의식적으로 마음을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음이란 당신이 유산으로 물려받은 집단적인 문화의 소산일 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이 겪은 과거 역사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과거의 눈을 통해 현재를 보고 판단하면서 완전히 왜곡된 시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은 도구이며 연장입니다. 마음이란 특별한 과업에 사용되기 위해 거기 존재하는 것입니다. 일이 끝나면 내려 놓아도 됩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생각중에서 80~90퍼센트는 반복적이고 부질없는 잡념에 불과합니다.....자기 자신을 마음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생각에 중독될수 밖에 없습니다. 마음의 내용물과 활동이 곧 자기자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멈추면 자신의 존재 또한 끝장 날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성장함에 따라 개인적이고 문화적인 조건에 기초해서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어 냅니다. 이런 거짓 된 자아를 '에고'라고 합니다. 에고는 마음의 활동으로 이루어지며 끊임없는 생각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습니다....에고에게는 현재의 순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과거와 미래만을 중요하게 여길 뿐입니다. 이는 진리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일이 아닐 수 없는데, 에고로 존재하는 한 우리의 마음은 부작용을 일으킬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에고는 항상 과거에 집착하고 과거를 살아 있게 하려고 합니다. 과거가 없으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에고는 또한 스스로를 미래에 투사함으로써 계속적인 생존을 보장받으려하고 거기에서 어떤 해방이나 만족감을 얻으려고 합니다.....
마음이란 단지 생각만을 일컫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은 생각뿐 아니라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무의식적인 반응까지 포함합니다. 감정은 마음과 몸이 만나는 곳에서 일어 납니다. 감정이란 생각에 대한 몸의 반응입니다. 몸속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반영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겁니다.
마음이 하는 주요한 과업중의 하나는 이런 감정적인 고통에 대항하여 싸우거나 그것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그토록 분주한 것은 바로 이를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마음은 기껏해야 일시적으로 고통을 덮어두는 정도의 성과밖에 거두지 못합니다. 사실, 마음이 고통을 없애려고 싸우면 싸울수록 고통은 점점 더 심해집니다. 마음은 결코 해결책을 찾을 수 없으며, 당신으로 하여금 해결책을 찾도록 허락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음 자체가 문제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기쁨과 평화는 '감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감정 너머 훨씬 더 깊은 차원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감정을 완전히 의식하고 느낄 수 있어야만 그 너머의 것들도 느낄 수 있습니다. 감정이란 문자 그대로 '교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emotion은 '교란하다'라는 뜻의 라틴어 emovere 에서 유래 된 말이다) 사랑과 기쁨과 평화는 존재의 심오한 상태입니다. 자신의 진정한 존재와 내적으로 연결 된 상태인 것입니다. 그런 상태는 마음 너머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대립이 없습니다. 반면, 마음의 일부인 감정은 이원성의 법칙에 따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악이 없으면 선도 없습니다. 마음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경험하는 '기쁨'이란 고통의 반대편에 있는 쾌락에 지나지 않아서 오래가지 못합니다. 거기에 사로 잡혀서는 쾌락과 고통이라는 극단을 오갈 수 있을 뿐입니다. 쾌락은 항상 외부에서 오지만 기쁨은 내면에서 일어납니다. 오늘 즐거움을 주는 바로 그것이 내일은 고통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쾌락이 떠난 자리에는 고통이 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잠시 동안은 즐겁고 흥미로울 수 있겠지만, 위태롭고 중독적인 집착이기 쉬워서, 스위치를 한번 누르기만 하면 완전히 거꾸로 뒤집히고 맙니다.
모든 탐욕은 순수한 존재의 기쁨대신 외부 세상과 미래에서 구원이나 만족을 추구하는 마음입니다. 나와 나의 마음을 동일시하는 한 그러한 탐욕, 욕구, 바람, 애착, 혐오에서 벗어 날 수 없지만, 그런 것들과 분리되면 '나'는 존재하지도 않게 됩니다.......은총의 상태에서 떨어져 나온 인간들은 시간과 마음의 영역에 묶여 충만한 존재의 상태를 잃어 버리고, 영겁의 세월동안 고통의 손아귀에 있었습니다. 스스로 근원과 이어지지 못하고, 서로에게 이어지지 못한 채, 우주를 떠도는 무의미한 조각들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마음을 자신이라고 여기는 한, 다시 말하자면 영적으로 깨어나지 못하는 한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우선 감정적인 고통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고, 감정적인 고통은 육체의고통과 질병의 원인이 되었을 겁니다.....쾌락이나 감정적인 도취는 고통의 씨앗을 함께 내포하고 있어서 언젠가는 반대쪽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쾌락은 결국 고통으로 변하게 됩니다. 즐거움의 원천이 되어 주었던 인간 관계 또한 그렇게도 덧없이, 그렇게도 쉽사리 고통의 원인이 되어 버립니다.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부정과 긍정은 동전의 양면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느 쪽이든, 마음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에고의 상태로 있는 한 잠재적 고통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고통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지금 만들어 내는 고통과 마음과 육체 속에 아직 살아 남아 있는 과거의 고통이 그 것입니다.
지금의 순간이 담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당신이 그것을 선택한 것으로 받아 들이십시요. 언제나 '지금 이 순간'과 함께 움직이면서 거기에 저항하지 마십시요. '지금'을 적이 아닌 벗이나 동맹자로 삼으십시요.
심리적인 두려움은 구체적이고 즉각적인 위험과는 구분됩니다. 그것은 불안, 근심, 초조, 긴장, 공포, 등의 등의 모습으로 찾아 옵니다. 이런 심리적인 두려움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장차 일어 날지도 모를 일에 대한 것이기 십상입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으면서도 마음은 늘 미래에 가 있곤 합니다. 그래서 조바심이 생겨나는 겁니다. 자신을 마음과 동일시하여 '지금' 이 지닌 힘과 단순성을 잃어버리고 있는 한, 그러한 조바심은 절친한 친구라도 되는 양 우리를 따라 다닐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대해서는 언제나 대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만들어낸 미래에 대해서는 어떻게도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감정이란 마음에 대한 몸의 반응이란 점을 상기하십시요. 마음에 의해 만들어진 에고가 우리 몸을 향해 끊임없이 내보내는 메시지는 어떤 것일까요? 바로 자신이 위협을 받고 있다는 위기의식입니다. 이런 메시지를 계속 받다보면 어떤 감정이 들겠습니까? 그것은 두말할 나위없이 두려움입니다....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든 두려움은 죽음과 소멸에 대한 에고의 두려움입니다. 에고의 한 구석에는 언제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숨어 있습니다. 마음을 자신과 동일시 하는 상태에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삶의 구석구석에 영향을 미칩니다.
에고의 마음이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한, 우리는 진정으로 편안할 수가 없습니다. 원하던 것을 얻었을 때나 갈구하던 것을 손에 넣었을 때 잠시동안을 제외하면, 진정한 평화와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에고는 자아를 느끼려고 하는 마음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자신을 외부에 있는 것들과 동일시 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방어하고, 무언가로 배를 채워야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도 물질과 직업, 사회적 지위와 인정, 지식과 교육, 외모, 특별한 능력, 인간관계, 개인의 경력과 가족의 내력, 믿음체계 등을 추구하고, 정치, 국가, 인종, 종교 등의 집단에 소속되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어느것도 진정한 우리 자신은 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을 우리는 버려야 합니다. ....아무리 늦어도 죽음이 임박해 올 무렵이면 그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가 아닌 모든 것을 벗겨내고 말테니까요. 삶의 비밀은 '죽기 전에 죽는'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마음 자체가 본질적으로 잘 못 된 것은 아닙니다. 마음은 훌륭한 도구입니다. 마음이 부작용을 일으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마음 안에서 찾고 그것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인줄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에고의 마음이 되어 우리의 삶 전체를 차지해 버리고 맙니다.
시간이라는 망상을 끝장내는 것입니다. 시간과 마음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마음에서 시간을 제거하면 마음은 멈추어 버립니다. 마음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 한다는 것은 시간의 덫에 갇히는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기억과 기대감을 통해서만 충동적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과거와 미래가 자리를 꿰차고 들어 앉아서 현재 순간을 존중하고 인정하지 않으며, 현재 순간이 존재할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과거는 우리에게 우리의 정체성을 선물하고, 미래는 어떤 식으로든 구원과 성취를 약속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환상입니다....시간이란 환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그리는 미래의 모습은 늘 현재와 비교 대상이 되기 마련입니다. 지금보다 더좋은 미래거나 나쁜 미래인 것입니다. 더 좋은 미래를 상상할 때는 희망이나 즐거운 기대감에 가슴이 벅차고, 더 나쁜 미래를 상상 할 때는 근심과 걱정에 잠기게 됩니다. 하지만 두 경우 모두 신기루 같은 것일 뿐입니다.
미래의 천국에 대한 믿음이 현재의 지옥을 만들어 내는 무시무시한 실레입니다.....당신은 항상 지금 있는 곳이 아닌 다른 어느 곳으로 가려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당신이 하는 일의 대부분이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언제나 만족을 추구하면서 섹스, 음식, 술, 마약, 혹은 흥분이나 스릴과 같은 잠시 잠깐의 즐거움에 얽매여 있지는 않나요? 항상 무언가가 되려하고, 무언가를 성취하려하고,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해 집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새로운 스릴이나 즐거움을 쫓고 있지는 않습니까? 더 많은 것을 얻으면 좀더 만족스럽고 행복해질 수 있다거나, 심리적으로 완전해질 것이라고 믿고 있지는 않습니까? 당신의 삶에 의미를 가져다 줄 남자나 여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미래의 무언가가, 혹은 누군가가 우리를 구원해 주거나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는 헛된 기대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삶의 상황 속에 놓여 있는 한, 당신에게는 성취해야 할 일이나 필요한 일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눈에 보이는 형상의 세계요, 얻기도 하고 잃어버리기도 하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더 깊은 차원에서 보면 당신은 이미 완전합니다. 당신이 이를 깨닫는다면, 당신이 하는 일의 밑바닥에는 즐거움과 기쁨이 흐를수도 잇습니다. 심리적 시간에서 해방되면 당신은 더이상 두려움이나 분노, 불만족, 혹은 무엇이 되려고 하는 욕구에 아등바등 매달리지 않게 됩니다....문제 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형상은 태어나고 죽지만, 당신은 그 형상 밑바닥을 흐르는 영원성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 무엇도 위협당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에고는 분리감에 의해 살아갑니다.
'지금 여기'를 참을 수 없다면 불행해집니다. 우리에게는 세가지 선택권이 있습니다. 그 상황을 벗어나거나 변화시키거나 전적으로 받아 들이는 것입니다. 만일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싶다면 지금 당장 이 세가지 중에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 결과를 받아들이십시오. 자신의 내면을 변명, 부정적 감정, 오염된 마음이 없는 깨끗한 공간으로 유지하십시오.
뭔가를 걱정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미래 상황을 상상하면서 두려움을 만들어 내는 마음과 동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미래 상황과 맞서 싸울 방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음의 환영에 불과합니다.......당신이 현실에서 해결해야하고 대처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순간'입니다......우리는 언제나 현재에 대처 할 수는 있지만 미래에 대처 할 수는 없으며 그래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현재의 순간에 대해 감사하면서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이야 말로 더없는 행복입니다. 그것은 미래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고 나면 언젠가 행복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 앞에 드러날 것입니다. 당신은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부족한 현실 때문에 좌절하거나 화가 나서 부자가 되기로 마음먹고 많은 돈을 벌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내면적으로는 부족함을 느낄 것입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여러 가지 흥미로운 경험을 할 수 있겠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다시 허전함을 느끼고, 그래서 더 많은 육체적, 심리적 만족을 추구하게 될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현재에 살면서 충만한 삶을 구가하는 진정한 행복은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기다림이라는 마음상태를 버리십시오. 기다림 속에 빠져드는 자신의 모습이 포착되면 거기서 자신을 끌어 내십시오. 현존의 순간으로 들어가서 거기 있으면서 존재를 즐기십시오. .......불행한 거짓 자아는 마음과 동화 된 채 시간에 의해 살아갑니다. 거짓 된 자아는 현존의 순간이 자신의 죽음이라는 것을 알고는 매우 위협적으로 느낍니다. 그래서 우리를 시간에 붙들어 두려고 안간힘을 쓸 것입니다.
삶의 여정에는 외부적인 목적과 내면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외부적인 목적은 목표나 목적에 도달하고, 계획한 것을 달성하고, 이런저런 일을 성취하는 것으로, 말할 나위도 없이 이는 미래를 암시합니다. 그러나 미래에 너무 전념한 나머지 지금 내딛는 걸음보다 목적지가 더 중요해진다면, 우리는 내면적인 목적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여행의 내면적인 목적은 우리가 어디를 가는지, 무엇을 하는지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그것은 미래가 아닌 지금 순간의 의식수준과 관계가 있습니다. 외부적인 목적은 공간과 시간의 수평적인 차원에 속해 있습니다. 내면적인 목적은 영원한 현재의 수직적인 차원으로 깊이 들어 가는 것입니다. 외부의 여행은 수많은 발걸음을 포함합니다. 내면의 여행은 오로지 하나, 지금 내딛는 걸음 뿐입니다. 그 걸음을 좀더 깊이 인식하면, 거기에 이미 목적지뿐 아니라 다른 모든 발걸음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그 한 걸음이 아름답고 훌륭한 행위로 변화되고 완벽해 집니다. 그것은 우리를 현존속으로 데려가고, 현존의 빛이 그것을 통해 비쳐 나올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내면여행, 자기 자신 속으로의 여행목적이자 완성입니다.
내면의 목적을 깨닫고나면 외부적인 목적은 단지 우리가 그것을 즐기기 때문에 계속하는 게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한 외부 세계에서는 완전히 실패 했지만 내면적인 목적에서는 완전한 성공을 거두는 것도 가능합니다. 오히려 겉은 부자이면서 내면이 가난하다거나, 예수가 말한대로 '세상을 얻고 영혼을 잃는'일이 실제로는 더 흔합니다. 물론 궁극적으로 모든 외부의 목적은 조만간 실패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물은 소멸 할 수 박에 없기 때문이죠. 외부적인 목적이 우리에게 영구적인 만족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빨리 깨달을수록 좋습니다. 외부적인 목적의 한계를 알았을 때,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리라는 비현실적인 기대감을 포기하고 내면적인 목적을 우선시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존재'를, 신의 본질을, 어느 정도의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돌맹이조차도 미미한 정도나마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 할 수 없으며, 원자와 분자로 흩어질 것입니다. 모든 것은 살아 있습니다. 태양, 지구, 행성, 동물, 인간 등 만물은 다양한 의식의 표현이요, 모습을 갖고 물질화된 의식의 표현입니다. 세상은 의식이 사고 형태와 물질적 형태를 취하면서 생겨납니다. 이 지구상의 수많은 생명체를 보십시오. 바다 속에서, 땅 위에서, 대기중에서, 생명체가 오랜 세월동안 되풀이해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도대체 그 목적이 뭘까요? 누군가가, 혹은 무언가가 형태를 갖고 게임을 하는 것 아닐까요? 고대 인도의 선지자들은 스스로에게 그런 질문들을 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살이란 신이 벌이는 신성한 게임 같은 것(릴라 lila)이라고 보았습니다. 그 게임에서 개별적인 생명체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게 분명합니다. 바다 속에서는 대부분의 생명체가 태어난지 몇분도 되지 않아서 죽고 맙니다. 인간의 형태 역시 꽤 빠른 속도로 먼지로 변하며 언제 존재했느냐는 듯이 사라집니다. 이것이 비극적이거나 잔인한 것일까요? 우리가 스스로 분리 된 개체라고 느끼는 한 그것은 진실입니다. 저마다의 의식이란 신의 본질이 형상 속에 스스로를 표현하고 있는 것임을 잊고 지내는한, 인생은 분명 비극입니다.하지만 당신이 당신 자신안에 있는 순수 의식으로서의 신의 본질을 깨닫기전에는 진정으로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 것이 비극인 이유는 당신은 역동적인 과정에 있는 하나의 단편, 하나의 분자가 추는 춤을 보고 거기에서 분리 된 개체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의식은 형상들 안에서 자기 자신을 완전하게 잃어 버릴만큼의 복잡성에 이를 때까지 여러가지 형태로 변장합니다. 오늘날의 인간들에게 있어서 의식은 그렇게 변장 된 형태의 것과 동일시 되었습니다. 자신을 오로지 모습으로만 알고 있으므로, 육체적이고 심리적인 모습이 소멸 될까봐 두려워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에고의 마음이며, 그로 인해 심각한 부작용이 일어 납니다. 마치 진화 과정에서 무언가가 심각하게 잘못 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 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신이 하는 게임의 일부입니다. 결국 이러한 명백한 부작용에 의해 만들어지는 고통의 중압감으로 말미암아, 의식은 모습과의 동일시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고, 자신이 형상일 뿐이라는 꿈에서 깨어나게 될 것입니다. 결국은 자의식을 다시 찾게 되지만, 그 자의식은 그것을 잃어 버릴 때보다 훨씬 차원이 깊어 질 것입니다.
에고의 마음은 침몰하는 배와도 같아서, 거기에서 내리지 않으면 배와함께 가라앉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쉴 수 있는 유일한 출구가 있다면, 가끔씩 생각을 멈추고 그 아래에 있는 의식차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잠을 자면서 매일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이든 말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말은 진리가 아니며 진리를 가리킬 뿐입니다. .....내가 사용하는 단어는 모든 언어가 그렇듯, 예전부터 사용되어 왔고 저마다 쓰임새가 있지만, 단어로서 전달하는 의미와는 별도로 현존의 고주파 에너지를 전달합니다. 침묵은 현존을 전달하는 훨씬 더 강력한 도구입니다.
변화는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몸을 통해서 일어 납니다.
용서란 불만을 버리고 슬픔을 떠나 보내는 것입니다. 일단 당신의 불만이 거짓 자의식을 강화할 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만 하면 자연스레 그렇게 됩니다. 용서는 삶에 저항하지 않고 삶이 당신을 통해 살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통과 괴로움을 느끼고, 삶의 에너지 흐름이 극도로 제한되며, 그 결과 육체적인 질병이 생기곤 합니다.
평소, 마음에 갇혀있는 상태였던 당신이 몸안에 머물면서 '지금'에 현존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면, 당신의 물리적인 몸은 즉시 가벼워지고, 투명해지고, 더 활기차 집니다. 몸 안의 의식이 증가하면 몸의 분자 구조가 실제로 덜 조밀해 집니다. 의식이 증가하는 것은 물질성에 대한 망상이 줄어 든다는 의미입니다. 당신이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내면의 몸과 동화되고, 현존이 당신의 일상적인 의식이 되어 과거와 미래의 지배를 받지 않으면 당신의 정신과 육체 속에는 더 이상 시간이 축적 되지 않습니다. 심리적인 부담을 주는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의 축적은 신체 세포의 회생 능력을 크게 손상 시킵니다.만일 당신이 내면의 몸 안에 거주한다면 외형적인 몸도 따라서 훨씬 더 천천히 노화 될 것입니다.
대부분의 인간관계는 주로 마음의 교류입니다. 존재와 존재의 교류인 진정한 영적 친교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는 어떤 관계도 성장 할 수 없으며, 그래서 수많은 갈등이 빚어 지는 것입니다.
당신은 현시되지 않은 세계와 현시 된 세상 사이에, 신과 이 세상 사이에 놓인 다리가 됩니다. 이렇게 근원과 연결 된 상태를 우리는 '깨달음'이라고 합니다....당신은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잠에 들 때마다 현시 되지 않은 세계속으로 여행을 합니다. 근원과 합해 지는 것입니다. 그 근원으로부터 잠시 동안 당신을 지탱해 주는 생명 에너지를 얻고 현시 된 세상으로 돌아 옵니다.
당신은 당신의 내면에 시간과 공간의 진정한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공간은 무심의 평온하고 끝없이 깊은 영역이며, 시간은 현존, 즉 영원한 '지금'에 대한 인식입니다. 그 둘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공간과 시간이 내면에서 무심과 현존이라는 현시되지 않은 세계로 인식 될 때, 외부적인 공간과 시간은 여전히 당신에게 존재하긴 하지만, 훨씬 덜 중요해집니다. 세상은 계속해서 존재하지만, 당신을 더이상 속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궁극적인 목적은 세상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초월하는 데 있습니다. 공간 속에 물체가 없으면 공간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나타나지 않은 세계를 깨닫기 위해서는 나타난 세상이 필요합니다. 붓다는 '환상이 없다면 깨달음도 없다." 고 했습니다. 나타나지 않은 세계는 이 세상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당신을 통해 그 자신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우주가 그 신성한 목적을 펼칠 수 있도록 하기위해 여기에 있습니다.
죽음이 가까워진 상황이나 육체적인 형상이 분해되는 죽음 자체는 항상 영적인 깨달음을 위한 크나 큰 기회입니다.....모든 문은 죽음의 문입니다. 거짓 자아가 죽는 문입니다. 그 문을 통과할 때, 심리적인 마음이 만들어 낸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서의 당신 자신은 막을 내립니다. 그 때 당신은 눈에 보이는 모습과의 동일시가 환상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죽음 또한 환상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죽음은 환상이 끝나는 것일 뿐입니다. 환상에 매달리고 집착하기 때문에 죽음이 고통 스러운 것입니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당신은 연인과 사랑에 빠져 있습니다. 처음에는 매우 만족스럽고 아주 강렬하게 살아 있음을 느낍니다.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하고, 원하며, 특별하게 느끼게 해주고, 나 역시 상대방에게 똑같이 해주면서 당신이라는 존재가 갑자기 중요해 집니다. 둘이 함께 있을 때는 모든 것이 완전하게 느껴집니다. 그 느낌은 너무 강렬해서 다른 일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정도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러한 강렬한 감정 속에는 욕망과 집착이 있다는 것 또한 눈치 챌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상대방에게 중독 됩니다. 상대방은 당신에게 마약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구할 수 있을 때는 기분이 좋지만, 상대방이 나를 위해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나 생각만으로도 질투와 소유욕이 일어 납니다. 그래서 감정적인 협박이나 비난, 책망등의 온갖 술수를 동원합니다. 그러다가 정말 상대방이 떠나면 험악한 적개심으로 발전하거나 깊은 절망감과 비탄에 빠질 수 잇습니다. 애정은 한 순간에 잔인한 공격성을 낳거나 지독한 슬픔의 원인이 됩니다. 이제 사랑은 어디에 있을까요? 사랑이 어떻게 정반대의 감정으로 변할 수 있을까요? 처음에 느낀 사랑은 단지 습관적인 소유욕과 집착에 불과했던 것이 아닐까요?
인간관계가 지금처럼 문제와 갈등으로 점철 된 적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이미 알아 차렸듯이, 관계가 여러분을 행복하게 해주고 충족시켜 줄 수는 없습니다. 관계를 통해서 구원을 추구한다면, 계속해서 환멸을 맛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관계가 여러분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분에게 깨우침을 주기위해 여기 있는 것이라고 인정하면, 관계는 여러분에게 구원이 될 수 있을 것이고, 이 세상에 장차 도래할 더욱 높은 차원의 의식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낡은 습관에 매달리는 사람들에게는, 고통과 폭력, 혼돈과 광기가 점점 더 증가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창조물은 결국 근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만물의 근원을 여성으로 보기 때문에, 심리학과 신화의 세계에서는 빛과 어둠의 양면을 지닌 원형적인 여성상이 나타나곤 합니다. 여신이나 신성한 어머니는 생명을 주고 생명을 거두어 가는 양면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마음의 에너지 주파수가 본질적으로 남성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마음은 저항하고 지배하기 위해 투쟁하고, 이용하고, 조작하고, 공격하고, 장악하고, 소유하려고 합니다. .....
과거나 미래로 인해 현재가 흐려지면 심리적인 시간이 만들어지고, 거기서 드라마의 재료가 생깁니다. 현재의 순간을 있는 그대로 허용하지 않으면 드라마를 창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특별한 인생 드라마와 사랑에 빠집니다. 드라마가 곧 그들 자신입니다. 에고가 그들의 삶을 지배합니다. 그들은 자아에 대한 감각 전체를 몽땅 에고에 투자해 왔습니다. 해답이나 해결책을 찾고, 치유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드라마의 일부가 됩니다. 물론 그런 노력은 대개 실패로 끝나고 말지만,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고 저항하는 것은 드라마가 끝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존재하는 동안에는 거기에서 깨어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거부합니다. 있는 그대로를 완전히 받아 들이고 살면 인생의 모든 드라마가 끝날 것입니다....."자신과 하나가 되어 존재하는 사람은 갈등이 생길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근본적인 갈등을 의미합니다.
모습의 차원에서는 분리 된 듯이 보이는 온갖 형상들이 탄생과 죽음, 창조와 파괴, 성장과 분해를 거듭합니다. 여기에서 벗어 날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별이나 행성도 탄생과 죽음의 주기가 있습니다. 육체도 그렇고, 나무나 꽃도 그렇습니다. 국가나 정치체제, 문명에도 흥망성쇠가 있습니다. 개인의 삶속에서도 얻을 때가 있으면 잃을 때가 있는 법입니다. 일이 잘 풀려서 번창할 때가 있는가 하면, 실패를 거듭하면서 시들고 붕괴 될 때가 있습니다. 새로운 것이 생기고 변화 될 여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옛 것을 떠나 보내야 합니다. 그 시점에서 매달리고 저항하는 것은 생명의 흐름과 함께 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며, 그 결과 고통을 받게 됩니다. 상승 주기가 좋고 하강 주기가 나쁘다는 것은 마음이 하는 판단일 뿐입니다. 대개는 성장을 긍정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느것도 영원히 성장 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계속해서 성장한다면 어떠한 종류의 성장이든 결국은 기형적이고 파괴적인 양상을 띠게 될 것입니다. 분해는 새로운 성장을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저것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영적인 깨달음을 위해서는 반드시 하강 주기가 필요합니다. 실패를 하고 깊은 상실감이나 고통을 경험해야만 영적 차원으로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성공이 공허하고 무의미해져서 실패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실패는 모든 성공안에 숨어 있으며 모든 실패 안에는 성공이 숨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습의 차원에서 이 세상을 바라보면 모든 사람이 언젠가는 실패하고, 모든 성취는 결국 헛된 것이 됩니다. 모든 형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세상을 적극적으로 즐기면서 새로운 형태와 환경을 만들고 창조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 동화되지는 마십시오. 당신의 자의식을 거기에서 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당신의 생명이 아니라 삶의 상황에 불과합니다.
불행해질 때마다 마음을 잘 살펴보라. 당신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다고 믿는 마음이 바로 불행이다. 불행한 마음자리에는 항상 그런 무의식적인 믿음이 깔려 있다.
존재의 차원에서는 모든 고통이 환상으로 보입니다. 고통은 모습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준비가 된 사람들의 '존재의식'을 일깨움으로써 치유의 기적을 낳기도 합니다.
만물은 당신이 그럴거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당신이 에고의 마음을 통해 만들어 내고 바라보는 세상은 매우 불완전합니다. 눈물의 골짜기 같다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인식하는 것은 무엇이든 꿈속에서 보는 이미지처럼 일종의 상징일 뿐입니다. 당신의 의식이 그런 식으로 해석하고, 우주의 분자 에너지 춤과 상호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 에너지야 말로 소위 물리적 세상의 원재료입니다. 그 에너지가 당신의 눈에는 육체와 탄생과 죽음이라는 방식으로, 또는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보는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달리 해석 될 수 있고 실제로 존재합니다. 모든 것은 지각하는 의식에 따라 달라집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의식의 한 초점이며, 그 초점이 저마다의 세상을 창조합니다. 하지만 그들 개체는 모두 상호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새상, 개미의 세상, 돌고래의 세상 등이 있습니다. 의식의 주파수가 너무 달라서 당신이 그들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그들도 당신을 인식하지 못하는 무수히 많은 존재들이 있는 것입니다. 항상 깨어 있으면서 근원과의 연결을, 서로서로의 상호 연결을 자각하며 살아가는 고도로 의식이 높은 존재들도 잇습니다. 그런 세상을 본다면 당신은 마치 천국을 마주 대한 듯 할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세상은 궁극적으로 하나입니다. 인간세상은 대개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의식차원을 통해 창조됩니다.
결과에 집착하면 그 속에서 당신 자신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깨어 있으면서 깊이 현존하십시오. 므엇 때문에 이 세상에 왔습니까? 무엇보다 먼저 거기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잇습니다. 당신이 이 세상에 온 것은 깨달음을 펴기 위함이 아닌가요? 당신이 세상에 주는 가장 소중한 선물은 평화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신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순간 당신의 의식수준입니다. 그러므로 긍정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내맡김이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당신이 취하는 행위는 그 다음입니다. 내맡기지 않은 의식상태에서는 진정한 긍정적 행동이 나올 수 없습니다.
시간은 불행의 생명줄입니다. 현재 순간을 확고하게 인식함으로써 시간을 제거하면 불행은 죽어 버립니다....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마음 에너지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문명을 구성하는 기존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구조를 만들어 냈으며, 우리의 교육체제와 대중매체를 통해 자기 자신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내맡김을 실천하게 되면, 이 마음 에너지보다 훨씬 더 높은 주파수의 에너지를 발산하게 됩니다. 내맡김을 통해 영적 에너지가 이 세상에 들어 옵니다.
온전히 내맡기기 전까지는, 사람들의 관계가 대부분 무의식적인 역할극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그러나 내맡기게 되면, 당신게게는 더 이상 에고의 방어와 거짓 가면이 필요 없어집니다.
지나간 모든 순간을 떠나보내고 현존의 빛을 비추어서 '나'라고 생각했던 고통스럽고 시간에 속박 된 자신을 날려 버리십시오....
과거를 답습하는 마음은 언제나 이미 알고 있고 익숙한 것을 되풀이 하려고 합니다. 고통스럽지만 적어도 익숙하기는 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언제나 알고 있는 것에 집착합니다. 모르는 것은 통제 할 수 없기 때문에 위험을 느낍니다. 마음이 현재 순간을 싫어하고 무시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현재 순간을 인식하면 마음의 흐름 뿐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연속성에 틈새가 생깁니다. 정말 새롭고 창조적인 것은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을 열어주는 그 틈새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이 세상에 들어 올 수 없습니다.
저마다 자기 이생을 자기가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마음이 당신의 삶을 움직이는 한, 당신이 당신의 마음으로 있는 한, 무슨 선택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존재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마음과 동화 된 상태는 엉망진창입니다. 일종의 광기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