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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머리에 … 4
1 경계 밖으로 스스로를 추방하는 자 … 8 2 한 건축가의 죽음 … 16 3 “당신은 히로시마” … 26 4 마스터플랜의 망령 … 34 5 내 친구의 서울은 어디인가 … 43 6 ‘보이지 않는 도시들’ … 52 7 메가시티가 아닌 메타시티, 인문의 도시 … 59 8 터무니 없는 도시, 터무니없는 사회 … 68 9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그리고 헤테로토피아 … 76 10 성찰적 풍경 … 84 11 세월호의 국가, 그네들의 정부 그리고 우리들의 도시 … 94 12 침묵의 도시 … 102 13 ‘스펙터클의 사회’, 그 보이지 않는 폭력 … 113 14 “우리가 건축을 만들지만, 다시 그 건축이 우리를 만든다” … 120 15 ‘불란서 미니 이층집’과 ‘마당 깊은 집’ … 128 16 집의 이름, 인문정신의 출발점 … 136 17 동네 없는 주소 … 145 18 이 시대 우리의 건축 그리고 그 문화 풍경 … 153 19 건축과 장소, 그리고 시간 … 161 20 우리는 위로받고 싶다 … 171 21 ‘포촘킨파사드’와 도시의 속살 … 178 22 건축은 부동산이 아니다 … 186 23 ‘박조 건축’의 기억 … 194 24 이 집은 당신 집이 아닙니다 … 202 25 ‘빈자의 미학’을 재론하며 … 210 26 “그리하여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도 위험한 존재인 언어가 인간에게 주어졌다” … 218 |
건축가는 자기 집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집을 지어주는 일을 고유 직능으로 한다. 그 직능은 다른 이들의 삶에 대한 애정과 존경을 바탕으로 끊임없는 사색과 성찰을 수반해야 한다. 그래서 스스로를 타자화하고 객관화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1 경계 밖으로 스스로를 추방하는 자」중에서 마스터플랜의 허망함을 아는 해외 선진도시는 이미 다른 방법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도시 전체를 한꺼번에 바꾸는 게 아니라 주민과 함께 필요한 작은 부분을 개선하고 기다리며 변화하여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형식, 시간이 걸리지만 시행착오 없는 이 지혜로운 방식을 침술적 방법이라고 이름했다. 도시는 완성되는 게 아니라 생물체처럼 늘 변하고 진화한다는 이치를 터득한 이 도시침술은 예산도 많이 들지 않지만, 무엇보다 과정이 민주적이고 흥미진진하다. 특히 개발이 아니라 재생이라는 지금 시대의 가치와 부합한다. ---「4 마스터플랜의 망령」중에서 건축가들이지만 도시에서 정작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건축이 아니라 그곳의 생생한 삶이다. 그들은 현대의 첨단 건축이 즐비한 강남을 피해 강북의 골목길 풍경에 탐닉한다. 통행 기능만 있는 직선이 아니라 지형과 경사를 따라 불규칙하게 조직된 서울의 골목길에서 그들은 건축의 지혜와 영감을 얻는 것이다. ---「5 내 친구의 서울은 어디인가」중에서 오래 산 부부는 닮는다고 한다. 서로 달리 살던 사람들이 결혼하여 한 공간에 같이 살면서 그 공간의 규칙에 따르다 보면, 습관과 생각도 바뀌어서 결국 얼굴까지 닮게 된다는 것이다. 수도사들이 산간벽지의 암자나 수도원을 굳이 찾는 이유가 그 작고 검박한 공간이 자신을 번뇌에서 구제하리라 기대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다. 오래 걸리고 더디지만 건축은 우리를 바꾼다. 즉 이런 이야기가 가능해진다. 좋은 건축 속에서 살면 좋은 삶이 되고, 나쁜 건축에서는 나쁘게 된다는 것. 이게 맞는다면, 건축을 통해 인간을 조작하는 일도 가능할 게다. 그래서 옛날부터 절대권력을 가진 자가 건축을 통해 대중의 심리와 행동을 조작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고대에는 신전과 피라미드 등을 지어 민심을 장악했고, 이후 궁전이나 기념탑 같은 건축물도 절대권력의 영광을 칭송하게 하는 도구로 지어졌다. ---「14 “우리가 건축을 만들지만, 다시 그 건축이 우리를 만든다”」중에서 어쩌면 이런 포촘킨파사드가 우리가 사는 현대도시의 전형적 모습인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강남의 대로들을 가보라. 대로변에 즐비한 고층 건물의 화려한 파사드, 그 위에 명멸하는 네온사인과 불빛……. 욕망의 풍경이 만드는 환상으로 우리는 그 꺼풀 뒤의 실제 풍경을 쉽게 잊고 만다. 그러나 뒷길에만 들어가면 앞의 소란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질박한 풍경이 전개된다. 집 장수들이 만든 주택과 거친 입면의 소형 건물, 그 사이의 좁은 길……. 사실은 이런 속살의 풍경이 이 도시의 진실인데도 질박함이 싫다 하여, 주요 가로변은 죄다 근린상업지구로 지정하고 고층의 상업 빌딩으로 가렸다. 우리가 살고 걷는 거의 모든 대로가 그러하니, 어쩌면 완벽한 포촘킨의 도시에서 살고 있는 게다. 겉살과 속살이 다른 도시, 우리는 그래서 늘 떠도는 삶을 사는가 ---「21 ‘포촘킨파사드’와 도시의 속살」중에서 건축에 시간의 때가 묻어 윤기가 날 때, 그때의 건축이 가장 아름답다고 나는 즐겨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남루했어도, 거주인의 삶을 덧대어 인문의 향기가 배어나는 건축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경이롭게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건축은 건축가가 완성하는 게 아니라 거주인이 시간과 더불어 완성하는 것이라고 말해왔다. 물론, 건축이 거주인에 의해 완성된다고 해서 건축가의 책임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건축가는 모름지기 그 건축이 담아야 하는 시간을 재는 지혜를, 그 풍경의 변화를 짐작하는 통찰력을 지녀야 한다. 그런 건축가가 만드는 건축이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빛나기 마련이며, 그렇지 못하면 시간을 견디지 못해 소멸되거나 우리 환경의 일부가 되기 위한 비용이 만만찮게 든다. 그래서 애초에 건강한 건축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24 이 집은 당신 집이 아닙니다」중에서 |
기념비적 건축으로 가득 찬 거대 도시를 비판하다
세종시 공무원 자살, 세월호, 메르스……. 벌써 잊힌 듯하지만, 사회 도처에서 그처럼 터무니없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 자본·권력에 집중하는 사회와 분열하는 시민, 파행을 거듭하는 정부. 건축가 승효상은 이러한 불행이 지난 시대 잘못 만든 건축에서 비롯한 것이라 본다. 인간은 건축 안에서 살 수밖에 없기에, 건축은 삶을 조직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나쁜 건축으로 구축한 도시에 사는 시민은 나쁜 삶을 살게 된다. 다원적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저자에게 나쁜 도시란 계급적인 도시다. 거주지를 계층별로 분류하고, 명령을 전하고 통제하기 쉬운 거리를 구성하고, 권력자의 구미에 맞는 거대 건축과 상징물을 랜드마크로 삼은 도시가 그러하다. 총독관저 터에 지은 폐쇄적인 청와대, 고위층의 압력으로 제멋대로 설계를 바꾸어 건축한 국회의사당, 땅의 기억을 깡그리 지운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정체불명의 외래어를 조합한 이름을 지닌 획일적인 아파트 단지. 우리 도시는 거대한 규모와 화려한 장식으로 시민을 압도하는 스펙터클 건축에 오랫동안 몰두해왔고, 그로 인해 지금의 불행을 떠안았다. 도시의 속살, 도시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밝히다 그렇다면 어떤 건축을 지향해야 하는가. 민주적인 도시는 어떤 모습인가. 승효상은 우리 주변에서 그 실마리를 찾는다. 오래된 건물, 낡은 창살, 정형화되지 않은 골목길, 시민이 자유롭게 오가는 빈터와 마당. 이들은 우리 도시의 속살이다. 높은 빌딩과 호화로운 네온사인 뒤편에 숨은, 시간의 때가 묻은 삶터가 진정 아름답고 정직한 도시 풍경이다. 이뿐이 아니다. 우리 땅은 산을 품고 있다. 도시 내부에 산을 품은 곳은 전 세계적으로 매우 드물다. 서울은 내산(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과 이를 둘러싸는 외산(북한산, 용마산, 관악산, 덕양산), 그 사이를 흘러나가는 물줄기가 고유한 지리를 만든다. 승효상은 서울의 랜드마크는 산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서양도시를 흉내 내느라 흉측한 랜드마크를 세워 조잡하고 부조화한 풍경을 만들었지만, 산은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인공의 랜드마크와는 달라서, 서울은 언제든 회복할 수 있는 원점을 지녔다는 것이다. 마당은 또 어떤가. 일본의 마당은 감상만을 위한 공간이며, 중국 사합원의 마당은 위계적 질서를 강조하는 공간이다. 중동 지방에 많은 중정은 혹독한 기후 때문에 만든 거주 장치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당은 어린이들이 놀면 놀이터요, 노동을 하면 일터다. 승효상은 제사, 축제, 결혼식, 장례식 등 어떤 목적도 충실히 수행하는 공간이 마당이라고 말한다. 마당이 비어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무엇이든 자유롭게 행할 수 있고, 모든 일이 끝나면 고요히 사유하게 하는 공간인 마당은 평면적인 서양의 광장보다 훨씬 민주적이다. 연대하는 공유도시를 위해 건축가가 할 수 있는 일 승효상은 왜 그러한 공간을 강조하는가. 그가 직시한 이 사회가 너무도 몰염치하고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독선과 전제, 이기와 편향, 분열과 파편으로 가득한 사회는 우리를 지켜줄 수 없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 한다. 그는 개개인은 힘이 없으니 서로 연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연대가 이루어지는 사회가 공유도시이며, 이러한 도시는 공공성을 지닌 건축을 통해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건축은 삶을 조직하고 도시를 구축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건축가는 건축주를 위해 일하는 동시에 사회와 시민을 위해서도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건축주가 사유 재산으로 개인의 집을 짓는다 해도, 그 집이 행인과 이웃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좋은 건축은 집주인뿐 아니라 일반 시민의 이익도 지켜주어야 한다. 따라서 건축주의 이익과 공공의 이익이 상충할 때, 먼저 공공의 편에서 건축주를 설득하는 것이 건축가의 의무다. 만약 그 설득이 유효하지 못하면 어찌해야 할까. 승효상은, 바른 건축가가 되기 위해서는 금전적 보상이 아무리 크다 해도 유혹에서 벗어나 마땅히 그 일을 떠나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건축가가 사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며, 건축의 공공성을 지키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제 메가시티(거대도시)가 아닌 메타시티(성찰도시)를 꿈꾸어야 한다. 이 책의 특징 1 서울시 초대 총괄건축가 승효상이 쓴 ‘도시’론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는 서울시 초대 총괄건축가로서 우리 도시 건축의 실태와 상황을 2년간 면밀히 살펴본 승효상이 퇴임 직후 출간하는 책으로, ‘도시’를 주제로 한 첫 책이다. 그간 서울시 건축 정책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결정 과정에 직접 참여한 만큼, 승효상의 도시론은 현실적이되 희망적이다. 이 책은 그가 우리 도시를 새로이 설계하며 현장에서 보고 듣고 느낀 내용을 충실히 담고 있으며, 실현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직접 목격한 총괄건축가이기에 가능한 통찰이 담겨 있다. 2 승효상, 건축을 통해 사회를 직시하다 승효상은 건축이라는 특정 분야만을 매개로 도시를 단순하게 보여주거나 일방적으로 비판하기보다는, 세태를 관찰하고 사회를 분석하며 성찰한 결과를 토대로 우리 도시 건축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한다. 독자는 이 책을 통해 도시와 건축을 이해하는 동시에 우리 사회의 과거와 미래를 만날 수 있다. 승효상은 정부의 행태를 거침없이 비판하고 우리의 과오를 직설적으로 지적하면서, 공공성을 지닌 건축으로 구축한 성찰적인 공유도시를 지향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3 ‘빈자의 미학’을 되새기며 내세운 새로운 키워드, 건축의 ‘공공성’ 20여 년 전 승효상이 자신의 건축 개념으로 선언한 ‘빈자의 미학’은, 가난하고자 하는 이를 위한 건축을 말한다. 절제하며 검박한 삶을 사는 이들을 위한 건축론이다.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에서 승효상은 우리 사회가 20여 년 전보다 결코 나아지지 않았다고 말하며, ‘빈자의 미학을’ 되새긴다. 여전히 가짐보다 쓰임, 더함보다 나눔, 채움보다 비움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 건축의 ‘공공성’을 단도직입적으로 강조한다. 좋은 건축가는 건축주뿐 아니라 그 건축과 더불어 사는 모든 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빈자의 미학』이 바른 건축을 하기 위한 자기 선언이었다면,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는 바른 건축을 통해 좋은 사회를 구축하겠다는 자기 성찰적 테제이며 공유도시를 지향하겠다는 승효상의 시민과의 약속이다. 4 승효상의 ‘장소’와 만나다 승효상은 베네치아, 베를린, 파리, 한양도성, 병산서원 등 국내외의 다채로운 공간을 소개한다. 반면교사로 삼고자 설명하는 공간도 있지만, 건축적 의미와 역사적 가치를 지닌 동시에 그 자체로 아름다워 소개하는 건축과 도시도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독자는 우리 도시에 대한 뼈아픈 성찰로 괴로운 한편 직접 찾아가고픈 공간을 향한 열망으로 긴 여운이 느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