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5년 03월 3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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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297쪽 | 438g | 153*224*20mm |
ISBN13 | 9788932027265 |
ISBN10 | 8932027269 |
발행일 | 2015년 03월 3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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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297쪽 | 438g | 153*224*20mm |
ISBN13 | 9788932027265 |
ISBN10 | 8932027269 |
프롤로그 그림자를 판 사나이 1장 사람의 개념 태아 노예 군인 사형수 2장 성원권과 인정투쟁 주인과 노예 외국인의 문제 오염의 메타포 3장 사람의 연기/수행 가면과 얼굴 명예와 존엄 4장 모욕의 의미 인격에 대한 의례 배제와 낙인 신분과 모욕 사회의 발견 “사람이 되어라” 굴욕에 대하여 5장 우정의 조건 순수한 우정과 순수한 선물 가부장제를 보완하는 국가 증여와 환대 공동체에 대한 두 개의 상상 6장 절대적 환대 신원을 묻지 않는 환대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 환대 복수하지 않는 환대 7장 신성한 것 죽은 자의 자리 서바이벌 로터리 부록 장소에 대한 두 개의 메모 장소/자리의 의미 여성과 장소/자리 감사의 말 |
우리는 존재 그 자체로 환대받을 수 있을까. 아니, 환대받고 있을까.
책의 서문은 <그림자를 판 사내의 이야기>라는 소설을 이야기하면서 시작된다. 이 소설은 주인공이 악마에게 그림자를 판 대가로 금을 무한하게 만들어내는 '행운의 자루'를 얻게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림자가 없어진 주인공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다. 그렇게 후회한 주인공은 악마에게 다시 그림자를 달라고 요구한다. 그림자는 사회가 그 인간을 사람으로 보느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요소였다. 저자는 '사람 자격'의 기준, 즉 사회 낙인의 가시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렇게 저자는 '사람이란 무엇인지' 묻는다. '인간'과 '사람'은 다르다. 인간은 그저 존재하지만, 사회 내에서 인정을 받은 존재는 사람이 된다. 이런 정의를 따른다면, 이 세상에는 인간이지만 사람이지 않은 존재를 찾아볼 수 있다.
저자는 그예시로 군인과 노예가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사람이 아니라, 물건 혹은 단순 존재의 취급을 받는지를 설명한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사소한 방식으로 존재를 지우고, 사회 내에서도 암묵적으로 존재를 지운다. 책에서 나오는 예시는 택시기사다. 우린 암묵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하며, 나만의 할일을 이어나간다. 이렇듯 우리는, 일상에서도 존재의 인정에 대한 다양한 형식을 띈다.
"이 책은 영혼과 육체의 대립 속에서 간과되어온 그림자의 문제, 다시 말해 '사람'의 문제를 다룬다.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에 들어오고, 사람이 되는가? 우리가 사람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받아들여진 것인가 아니면 이 세상에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사람이 된 것인가? 다시 말해서 '사람'이라는 것은 지위인가 아니면 조건인가? 조건부의 환대 역시 환대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주어진 환대가 언제라도 철회될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환대되지 않은 게 아닐까? 이것이 이 책이 제기하는 질문들이다." (P.26)
사회는 인정투쟁의 장이다. 우리는 단순히 사람다움의 자격을 얻지 않는다. 우리는 가면(페르소나)을 쓰고 서로의 모습을 바라본다. 저자는 고프먼의 주장을 인용하며 인격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상호작용 속에서 끊임없이 현상하는 것"임을 설명한다. "사람다움은 우리가 언래 가지고 태어났거나 사회화를 통해 획득해야 하는 본질이 아니다. 그보다 사람다움은 우리에게 있다고 여겨지며, 우리 스스로 가지고 있는 체하는 어떤 것, 서로가 서로의 연극을 믿어줌으로써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어떤 것이다."
저자는 인류학과를 전공했다. 글에서 굉장한 인류학의 분위기가 풍겨왔다. 인간은 사회 내에서 정의내려진다. 사회를 벗어나 존재할 수 없다. 삶은 사람대우를 받고자 싸우는 전쟁터가 아닐까. 핵심은 동등한 대우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나를 사랑해주거나 절대적 호의를 베풀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자격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우리 스스로가 노력해서 다같은 사회 내에서 공존할 수 있는 것. 나는 세계 역사의 투쟁이 사회 내로 받아들여지고자 하는 마음의 투쟁이라고 생각한다. 소외는 무기력을 낳는다. 무기력은 가능성을 없앤다. 우리 세상은 끊임없는 가능성의 발현을 동력으로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지 않나.
저자는 마지막 부분에서 절대적 환대가 가능할 것이라고 내비치는데, 나는 이 논의들이 약간 현실을 벗어난, 형이상학적이고 공상적인 느낌이 들었다. 사실 이민자나 난민이 밀려오는 것은 기존 영역에 있는 사람들이 긴장할 만한 사안이다. 단순히 절대적 환대의 개념으로써 받아들이기엔 현실의 문제가 매우 강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고민해야 한다. 환대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또 우리는 누군가를 환대하고 있는지. 결국 사회를 살아가는 존재로서 우리는 서로에게 존재지어지고 존재를 규정한다.
사람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모두들 알지만 쉽게 정의내릴 수 없는 질문일 것이라고 생각된다. 저자는 '사람'의 의미는 특정 장소와의 연관 속에서만 의미를 가지며, 그 장소에 거주하는 이들로부터 환대를 통하여 정체성을 획득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다양한 철학과 사회학적 이론들이 펼쳐지면서, 지극히 추상적인 차원에서 ‘사람’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책을 다 읽은 지금도 전체적인 내용이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물론 저자의 주장에 대해서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지만, 이 책의 논리 전개 방식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적지 않다.
저자는 자신의 논리를 펼쳐내기 전에 ‘프롤로그’에서 <그림자를 판 사나이>라는 소설을 장황하게 설명한다. 악마와의 거래로 자신의 그림자를 팔고 막대한 금화를 얻게 되지만,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주인공의 이야기이다. 우화적 기법을 사용한 이 소설의 제재라 할 수 있는 ‘그림자’의 의미를 통해, 사람의 존재 조건을 생각해보도록 하고 있다. 그림자를 판 대가로 부자가 되지만, 또 그림자가 없다는 이유로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당하는 사나이! 그렇다면 ‘그림자’는 사회 구성원들로부터 인간임을 증명하는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몸’이 아닌 ‘그림자’로 인정을 받게 된다는 것. 이쯤해서 ‘그림자’는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조건으로서의 비유임을 알아채게 될 것이다.
이제 저자는 본격적으로 ‘사람의 개념’(1장)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대상이 태아와 노예, 그리고 군인과 사형수 등의 존재들이다. 저자는 이들이 처한 조건과 사회 속에서의 위치를 상기시키며 논의를 전개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공동체 내부에서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적 관습이나 법적 제도 속에서 일종의 ‘경계인’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일단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보이지 않는 공동체 안에서 성원권을 갖는다는 뜻이’기에, 적어도 이들은 완전한 공동체의 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군인’은 전쟁이 벌어지면 ‘사람이 아니라 물건’으로 취급된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이때 개인은 인간도 아니고 심지어 시민도 아니며 단순한 병사일 뿐이’라고 규정한다.
그렇다면 이들이 처한 위상은 무엇일까? 저자는 공동체의 ‘성원권과 인정투쟁’(2장)이라는 측면에서 이들을 주목하면서, ‘사람의 개념은 장소 의존적’임을 지적하고 있다. 이때 ‘장소’란 공동체의 일상생활이 이뤄지는 공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인과 노예’, ‘외국인의 문제’ 그리고 미국의 흑인과 조선시대 여성의 역할과 사회적 처지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한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대하는 것, 그것이 바로 공동체 성원들의 신성함과 그것을 오염시키는 존재들로 치부하여 사회의 성원권을 부정하는 전략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저자는 ‘사람을 연기하거나 혹은 존재하게 한다는 의미’의 ‘수행’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사람의 연기/수행’(3장)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어느 정도 이해는 되지만, 저자의 생소한 논법에 대해서 이 부분을 완전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드디어 인간 관계의 측면에 주목하면서, ‘모욕의 의미’(4장)를 장황하게 설명하고, 이와 상반되는 측면에서 ‘우정의 조건’(5장)에 대해서 설명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로서는 여전히 그 의미가 정확히 이해되지 않는 ‘절대적 환대’(6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장은 사람 자체를 ‘신성한 것’(7장)으로 여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뒤르켐의 이론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하고 있다. 피터 싱어의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칸트의 윤리학을 비판한 ‘죽은 자의 자리’나 존 해리스의 ‘서바이벌 로터리’라는 개념을 통해서 인간 자체의 ‘신성함’을 성찰하게 한다고 이해된다. 아마도 사회학에서는 이러한 이론들을 통해서 ‘사람’의 존재 의미를 성찰하게 만드는 방식이라 이해되지만, 어찌 보면 굳이 이러한 이론들이 아니더라도 자명한 사실을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충분히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전제에서, 그럼에도 사람의 사회적 조건과 삶의 의미에 대해서 진지하게 따져보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차니)
나는 어렸을 때 매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는데 (지금은 아님), 거의 세뇌될 정도로 성경을 읽고 배우며 자랐다. 교회를 멀리한 지 20년이 훌쩍 지났는데도 몇몇 찬송가와 성경 속 우화는 토씨 하나 빼지 않고 외울 정도다. 성경에서 예수는 '사랑'의 율법을 설교했는데, 가장 널리 알려진 말씀으로 "누구든지 네 오른 편 뺨을 치거든 왼 편도 돌려 대라"고 했다. 그다음 구절도 이렇게 이어진다. "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를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선하고 마음이 한없이 넓은 인격자라고 해도 이유 없이 오른뺨을 맞고서 더 때려달라고 왼 볼까지 내미는 사람은 없을 거다. 당신이 하나를 원하는데 나는 둘을 줄 준비가 되어있고 그 이상의 요구에도 협력할 수 있다는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상대방과의 화해와 협력을 도모하는 전략의 일환이라고 생각한다. 실제 왼 뺨을 내밀어도 상대방은 손을 거두고 악수를 청하리라는 것을 미리 내다보는 것이다. 강대강으로 부딪혀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상처만 입는 것보다는 내가 먼저 양보하더라도 협력을 통해 이익을 얻는 것이 훨씬 더 생존에 유리한 전략이니까.
일종의 환대의 마음이라고나 할까? '환대'란 사전적으로는 '반갑게 맞아 정성껏 후하게 대접함'이라는 뜻이다. 나는 모든 이에게 차별 없이 환대하는 사회가 우리가 꿈꾸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특히, 이 책 <사람, 장소, 환대>를 읽고 그렇게 생각하게 됐다. 환대의 태도에는 사람의 성별, 국적, 출신, 능력과는 상관없이 '나는 당신과 잘 지내고 싶소. 나는 당신과 내가 좋은 친구로 우정을 쌓아 발전하기를 바라오. 당신이 원한다면 내 것을 조금 양보하더라도 당신의 성장을 위해 돕겠소'라는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환대를 통해 우리 모두는 더 나은 단계로 올라설 수 있다.
나는 차별 없는 환대를 열렬히 지지하지만, 무조건적인 (절대적) 환대에는 반대한다. 오른뺨을 맞고 나서 왼뺨을 내밀었는데, 그 왼뺨마저 때리려는 자에게서는 환대를 거둬들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런 자들에게는 예수의 '사랑'의 율법을 베풀 것이 아니라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갚는 모세의 율법을 적용해야 한다. 그것은 비단 상대방의 잘못된 선택에 대한 징벌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주변에 관계를 맺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서로 협력하고 양보하는 선의만이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신호를 준다. 게임이론에서 일종의 팃포탯(tit-for-tat)전략이 환대에도 해당된다는 말이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내가 지지한 후보가 당선되지 못해 상심이 컸다. 기울어진 언론 지형, 정보의 왜곡, 일부 정치세력이 부추긴 혐오 정서로 인한 감정적인 투표도 한몫했다고 본다. 무엇보다 나는 우리 민주세력의 전략이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힘들게 투쟁해서 이뤄낸 민주화의 성과에 무임승차하는 자들에게 무조건적 환대는 잘못된 신호를 준다. 그들의 행위에 용기를 준다. 비뚤어진 욕망, 부패한 기득권, 거짓과 왜곡을 일삼는 세력에게는 강력하게 보복함으로써 배신에는 반드시 응징이 뒤따른다는 신호를 주어야 한다. 선의가 통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되갚는 전략이 최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