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의 주인공은 옥상에서 떨어져 죽지 않았습니다. 미쓰코시 백화점 문을 나서서, 결국 아내로 상징되는 자본주의적 현대의 메커니즘이 지배하는 생활 속으로, 그 피로한 세계 속으로 다시 들어가야 하는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나’에게는 예술적 삶과 정열로 이 생활의 세계를 지양하고 초극할 수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의지를 다 잃어버린 지금, 현실 생활 속으로 흡수되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자신을 느낄 때, 그때 ‘나’는 이렇게 외쳐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 p.36~37
새로운 거처로 옮기기 전까지 짧은 기간을 보낸 하숙집이었지만, 누상동 9번지는 여전히 문제적 공간으로 남습니다. 다섯 달 남짓 동안 열 편의 시를 쓸 정도로 윤동주 시의 산실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쓴 시의 총 분량을 고려하면, 하숙하는 동안 시 창작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김송의 집을 드나드는 문인을 통해 문단의 흐름을 유심히 지켜보면서 창작열을 생성해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 시기 동안 어떤 문학의 길을 가야 할지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았을까요?
--- p. 59
1941년 11월 20일에 쓰인 「서시」에는, 아시다시피 시대의 운명 속에서도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려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 완벽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순수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윤동주를 아마추어 청년 시인쯤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등단해 문단에서 교류를 하지 않았고, 죽은 뒤에야 작품집이 나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누상동 9번지 하숙집 이야기나, 백석과 정지용 등 당대 제일의 문학에 깊이 심취해 연마를 거듭한 사실을 떠올려보면, 그를 단지 아마추어 시인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그는 시인으로서 자신의 세계를 단단하게 만들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 p.84
다시 이광수의 삶을 떠올려봅니다. 그 또한 얼마나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가요. 인생의 온갖 희로애락, 우여곡절을 겪으며 일제강점기를 보냈으면서도, 풍광 좋은 홍지동에 산장을 짓고 멋과 경치를 즐겼습니다. 고뇌를 겪으면서도 풍류를 놓지 않은 것입니다. 일장춘몽처럼 그 시절을 보낸 이광수는 1950년 6·25전쟁 이후 북한으로 끌려가 그해 10월 13일, 죽음을 맞이합니다. 탕춘대성 앞 벤치에 앉아 연산군과 이광수의 삶을 반추하며 생각했습니다.
--- p.114
경성역은 기차를 타기만 하면 부산으로, 부산에서 일본으로, 거기서 다시 태평양으로 떠날 수 있는 교두보 같은 곳입니다. 그러나 구보는 거기서 돌아서서 도회의 항구를 떠납니다. 이처럼 식민지 도시는 폐쇄적이며, 벗어날 수 없는 구심력을 갖고 있습니다. 도회의 항구라는 표현과 더불어 구보가 경성역에서 돌아서는 장면은, 병들고 음산한 세계를 쉽사리 떠날 수 없게 만드는 힘에 의해 우리의 산책자가 갇혀 있음을 의미합니다.
--- p.139쪽
자기 고향의 물상들, 사람들을 바라보며 병든 임화는 현재의 고통이 지나간 뒤에는 반드시 내일의 희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간절한 희구의 노래를 부르고자 합니다. 그는 지금 병든 몸을 이끌고 먼 남쪽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옛날에 폐결핵은 일단 악화되면 살지 죽을지 알 수 없는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삶과 죽음을 기약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임화는 자신의 ‘고향’ 종로 네거리를 향해 다음과 같은 마지막 노래를 부릅니다.
그에게 있어 종로 네거리는 곧 사랑하는 순이요, 사랑하는 조선이요, 사랑하는 민중이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 p.182~183쪽
이제 저는 명동 거리를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이 명동의 동방살롱에서 박인환은 문인들과 만나 시대의 시적 주제들을 놓고 격렬하게 토론했겠지요. 그 골목 안 선술집에서 박인환은 「세월이 가면」을 쓰기도 했습니다. 쓸쓸한 3월 초 어느 날 밤, 박인환이 쓴 시에 이진섭이 곡을 쓰고 임만섭이라는 테너가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마침 지나가던 소설가 이봉구와 김광주, 송지영까지 합세해 유명해졌고, 널리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지요. 참으로 전설 같은 일화입니다.
--- p.220~221
「세월이 가면」은 박인환의 최후의 글들 가운데 하나겠습니다. 「목마와 숙녀」를 읽다보면 이 시도 인파 속의 쓸쓸함과 외로움을 담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박인환에게 명동은 과연 어떤 곳이었을까요? 전쟁의 폐허를 딛고 우리들에게도 삶과 문화가 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곳이었을까요? 어둠 속의 등대 같이 빛나는 곳이었을까요? 바로 이 인파 속에 버지니아 울프를 읽으며 삶의 허무를 깊이 호흡하던 박인환이 서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의 큰 키가 저만치 인파 위로 불쑥 솟아오를 것 같습니다.
--- p. 221
김수영은 직업 갖기를 싫어했습니다. 체제의 구속에 얽매이지 않으려 한 것이지요. 당시 구수동 41번지는 자기가 몸담고 있는 체제를 가장 변방에서 바라볼 수 있는, 바깥에서 거리감을 두고 볼 수 있는 지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기어코 외부로 나가려 했던 것일까요? 김수영은 산문 「모기와 개미」에서, 지식인을 “인류의 문제를 자기의 문제처럼 생각하고, 인류의 고민을 자기의 고민처럼 고민하는 사람”으로 정의합니다. 굉장히 중요한 지적이지요. 인류 전체의 문제에 골몰하는 한 개인이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지점은 어딜까요? 바깥, 가장자리이겠지요.
--- p.243
그러니까 주인갑 씨의 집은 노량진에서 동작동 국립묘지 가는 길가의 언덕배기에 있어 한쪽으로는 한강을, 다른 한쪽으로는 노량진을 굽어볼 수 있는 곳입니다. 저는 이 집이 손창섭의 실제 흑석동 자택을 모델로 삼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손창섭은 흑석동 효사정孝思亭과 원불교 서울회관 자리의 언덕쯤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손창섭의 집에서 한강이 내려다보였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 아래 잔잔히 흐르는 한강과 인도교와 노량진 길을 무심히 내려다볼 수 있는” 주인갑 씨의 집은, 한강과 서울로 상징되는 한국사회의 내부를 외부에서 건너다보듯 또는 내려다보듯 주시하고자 했던 손창섭의 작가적 시점을 상징하는 듯 보입니다.
--- p.286
『서울은 만원이다』는 한국 자본주의의 병리적, 퇴폐적 요소를 상징하는 종삼과 길녀로 대표되는 몸 파는 여성을 통해, 1960년대 중반 이후 한국사회가 이러한 잉여를 처리하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김현옥 전 서울시장의 행정과 통치자들의 도시개발 계획은 종삼으로 상징되는 세계를 폐지함으로써 한국사회의 병폐와 잉여들의 존재를 극구 감춘 것이지요. 구획 정리를 통해 그들을 보이지 않는 외곽으로 밀어냈던 것입니다. 종삼 사창가를 폐지한다는 내용의 1968년 9월 27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볼까요.
--- p.322
PX와 고가 사이는 바로 수도극장이라는 의미 있는 공간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선 서부활극, 철 지난 남의 전쟁 그리고 고전적인 사랑 이야기가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이는 전쟁의 참상을 겪는 이들에게도 여전히 즐기고자 하는 욕망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바로 그 욕망이야말로 『나목』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입니다. 모든 것을 잃었어도 살아가야 한다는 욕망을 지닌 이경, 그녀는 어떻게 이 상황을 뚫고 나갈 것인가? 이것이 소설의 주제지요.
--- p.353
『나목』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을 강렬하게 꿰뚫어보는 눈동자의 존재를 느끼게 합니다. 미군 PX에서 명동을 지나 쇼윈도가 펼쳐진 거리를 지나 수도극장에 이르고, 또는 을지로입구에서 전차를 타고 종로에서 계동으로 가는 동안 피부에 스미는 정적, 괴괴한 도시 풍경, 아직 피난민들이 다 돌아오지 않은, 인적이 말소된 공허한 서울의 모습.
도강 금지령 때문에 정적에 차 있으면서도, 끝내 삶을 이어가야 하고 꽃 피워야 하는 사람들은 그때 자기의 어떤 이야기를 매만지고 있었을까요? 박완서는 그것을 뚫어지게 쳐다봅니다. 삶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 p.3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