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한 이후 문화예술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논쟁거리는 ‘새로운 문화예술의 본질과 특징은 무엇인가’였다. 즉, 과거의 문화예술과 비교하여 프롤레타리아 문화예술의 우월함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대부분의 노동자 작가들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해방적 성격과 사회주의 이념의 우월성을 그 근거로 제시했다. [……] 하지만 이 문제는 현실적으로 간단치 않았다. 왜냐하면 실제 프롤레타리아 문학은 아마추어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p. 37
보그다노프는 문화의 중요성을 가시적인 상징화에서가 아니라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인 정동의 차원에서 포착한 인물이다. 트로츠키가 유사한 감각을 갖고 있었지만 그는 문화를 정치로 환원하려 했던 반면, 보그다노프는 정치를 문화를 향해 견인하고자 했다. 우리는 후자의 작업을 랑시에르적 의미에서 정치적인 것의 장을 열기 위한 기획이라 부를 만하다. 노동자들의 일상생활, 노동자들의 생활 감정과 언어화되지 않은 신념, 이성의 논리로 대체할 수 없는 일상 관습과 개별적 습관 등은 혁명의 장애물이자 무한한 잠재력을 이룬다. --- p.121
소비에트 혁명이 그 자체로 정치적 임계점을 현시했을 때, 러시아를 포함해 유럽 전역을 휩쓸던 미학적 전위들은 예술이 예술의 이름으로 갈 수 있는 한계치를 보여주었다. 정치적 혁명과 미학적 혁명이라는 두 현상은 우연히 나타난 것이 아니었으며,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정치와 문화, 역사와 예술, 혁명과 미학은 강렬하게 스파크를 일으켰다.--- p.170
베르댜예프는 혁명이 뭔가 새로운 것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에 배태되었던 기형과 질병이 혁명이라는 그럴듯한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고 지적하면서 혁명의 새 가면 속에 숨겨진 옛 러시아의 익숙한 얼굴들, 러시아 작가들에 의해 묘사된, 러시아를 오래전부터 갉아먹어온 많은 허무주의적 악들?거짓과 배신의 악령, 평등의 악령, 파렴치의 악령, 부정의 악령, 비저항의 악령?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흘레스타코프, 표트르 베르호벤스키, 스메르쟈코프로 형상화된 악을 예로 든다.--- p. 194~95)
무엇보다 주인공 지바고의 행적과 관련하여 그가 과연 계급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지, 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이 그의 삶과 인격 성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는지,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양상이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는지 등이 여전히 의문으로 남기 때문이다. 루카치의 용어를 빌리자면 지바고는 서사시적 소설의 인물이라기보다는 부르주아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p. 216
혁명으로 인해 야기된 혼돈과 파괴에 관해 블로크는 “혁명은 자연과 같다”고 해명하였다. 폭풍우와 눈보라는 소중한 것이나 하찮은 것이나 상관없이 누구나에게 불어오듯이 혁명은 소중한 것을 파괴하고 하찮은 것을 남겨두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오류가 결국 생성을 향한 혁명의 큰 운동의 흐름을 바꾸어놓지는 못한다. [……] “위대한 러시아 작가들, 푸시킨, 고골,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가 그러했듯이,” 블로크가 혁명의 혼돈과 파괴라는 암흑 속에 잠겨든 것은 그 암흑으로부터 “빠르든 늦든 결국 모든 것이 새로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p.280~81
‘라도미르’라는 명칭은 필명인 벨리미르를 반향한다. 즉, “벨리미르와 라도미르는 피를 나눈 형제다.” 그리하여 시인 자신이 이 세계의 대표자, 즉 유토피아적 인류의 주된 일원이 되고 집단적 ‘나’가 되는 것이다. 마야콥스키의 서사시 「150000000」처럼 「라도미르」도 집단적 주체의 인칭으로 쓰여졌는데, 이 끝없이 다양한 집단적 주체는 완전한 동일함에 도달한다. 시인은 집단적 주체의 역할 속에서 그리스극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즉, 신적인 ‘나’의 역할로 등장하여, 유토피아식 인류의 보편적인 ‘우리’로 나타나는 것이다.--- p.339~40
『화두』 주인공의 관점에 따라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을 플레하노프, 레닌, 트로츠키, 로자 룩셈부르크 등 수많은 망명자들의 ‘창조적 의식’의 소산으로 간주하고, 이들이 남긴 역사적 저술들에 새삼 주목해보면 명문의 예언적 기능에 대한 『화두』 주인공의 통찰은 더욱 값지다. 플레하노프가 가장 먼저 이룬 것은 탁월한 저술을 통한 “지식인의 정복”이었고,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원래의 저작을 위대한 문학 작품처럼 빛나게 만들어준 힘들이면서도 반복적이고 현학적인 담론”이었으며, 트로츠키의 『1905년의 해』는 “1905년의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가장 뛰어난 기록”이었다.--- p.363~63
미하일 조셴코M. Zoshchenko의 단편소설 「원숭이 언어」(1925)에는 당시의 언어적 혼란과 소통의 어려움이 잘 묘사되어 있다. 외국어인 불어보다 더 불가해한, 안개에 싸인 듯 불투명하고 부자연스러운 새 어휘의 홍수 속에서 민중이 경험한 소통의 장애가 잘 드러난다. [……] 이처럼 혁명 초기에는 상응하는 러시아어 어휘가 있는 경우조차도 외래어를 고의적으로 사용했는데 이는 기존 전통과 단절하고 사회주의 혁명 이념에 기반한 초국가적 국제주의 언어로서, 내국어보다 외래어가 더 적합했기 때문이다. --- p. 392~93
소리와 관련된 신기술이 채 소비에트 땅을 밟기도 전에 작성된 이 글에서 몽타주의 대가 감독들은 ‘우려’와 ‘기대’를 동시에 표명한다. 그들의 우려는, 채플린과 그리피스가 그랬듯이, 화면에 입힌 사운드가 영화 자체의 본질을 망쳐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그들은 소리의 “자연주의적인” 사용, 즉 “소리가 화면에서의 움직임과 일치함으로써, 말하는 인간들과 소리 나는 사물들의 환영”을 만드는 도구로 전락할지도 모를 가능성에 대해 우려했다. 그들이 보기에, 그것은 과거의 극장식 볼거리로 퇴행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소위 “고급 문화의 드라마,” 말하자면 혁명 이전의 부르주아적 뿌리로 되돌아가는 것에 불과했다.--- p.444
「10월 축전」의 전체적 구성과 레닌 도상의 위치와 의미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1536~41)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스탈린 통치하에서 그려진 포스터의 장면은 ‘최후의 심판’ 후의 세계다. 보리스 그로이스B. Groys는 스탈린 시대에는 그 시대의 문화를 스스로 묵시록 이후의 문화로 이해했다고 썼다. 즉 심판 후의 세계라는 것이다. [……] 이 포스터에 그려진 세계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로서, 그리스도 이미지로 나온 레닌을 통해서 ‘심판’이 끝난 이후의 세계의 모습인 것이다.
--- p. 4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