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름의 빛과 그늘을, 여름의 황혼을, 여름의 자두와 복숭아를, 여름의 센티멘털을, 여름의 무상급식을, 여름의 우연한 만남과 흑맥주를, 여름의 크레타 여행을, 여름의 키스를 다 좋아한다. 걱정하지 말게, 벗이여. 지금 동네 텃밭에 옥수수도, 해바라기도, 토마토도, 호박 넝쿨도, 고구마도 잘 자란다네. 녹음과 그늘은 우리를 위한 것. 살아 있는 건 다 눈부시다. 자기 자리를 꿋꿋하게 지키고 서 있는 모든 것, 잘 자라는 건 눈물이 날 만큼 다 고맙다. 이 여름을 허풍쟁이와 협잡꾼과 거짓말쟁이에 게 통째로 맡겨둘 수는 없다. 이 여름이 시간의 소실점 저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행복은 하모니카 연주와 찐 옥수수와 면 셔츠를 좋아하는 이들의 것!
--- p.22~23
가을에는 사랑하는 이와 더 자주 키스를 하고 싶다. 가을 저녁, 면 셔츠를 입고 벗을 만나 중국술을 마시는 것,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을 찾아 읽는 것, 어느 날 아침 우연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빌리 조엘의 「피아노 맨」이나 리 오스카의 「샌프란시코 베이」를 듣는 것, 풀벌레 소리가 높을 때 밤하늘에 뜬 조도 높은 달을 바라보는 것, 그 찰나 내 머릿속에 장착된 ‘행복 탐지기’는 예민하게 반응할 것이다. 아, 살아 있어서 좋다! 일상의 안녕과 평온한 기쁨으로 짜인 안감의 무늬, 이런 평범한 날들이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다.
--- p.44
세상은 낮과 밤으로 나뉘고, 숲은 고요하며, 바다는 출렁인다. 봄꽃은 매운 추위를 품은 겨울에서 나오고, 서리와 북풍은 가을의 창백한 달에서 나온다. 우리는 태어난 곳에서 먼 곳으로 떠나 살며, 이곳과 저곳, 숲과 바다, 여러 계절을 스쳐 지나간다. 산다는 것은 영원과 영원 사이에서 반짝 하고 일어나는 찰나의 누전이다. 그 찰나를 사는 우리는 한바탕 생이라는 춤을 춘다. 여름과 겨울, 남자와 여자, 빛과 그늘, 새와 두더지, 달과 태양…… 그렇게 상극으로 나뉘어 있다. 상극인 것들은 서로를 품고 밀어내며 균형과 조화를 이룬다. 생이라는 춤은 음양이 그렇듯 어긋나고 부딪치는 것이 하나로 어우러져 추는 윤무(輪舞)일 테다. 이 세계는 유한과 무한, 찰나와 영원, 음과 양, 밤과 낮, 인간과 신, 대지와 하늘같이 대립된 것이 어우러지는데, 우리는 이 어우러짐 속을 통과하는 여행자다.
--- p.74~75
행복을 표상하는 색깔은 아마도 가장 먼 영역을 물들이는 파랑일 테다. 파랑은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가장 먼 곳의 색깔이다. 당신, 행복을 찾지 마세요. 행복은 무한, 불가능성, 손에 쥐어지지 않는 무(無)의 또 다른 이름이니까요. 온통 푸름으로 물든 청산과 푸른 물, 파랑새는 항상 멀리 있다. 나는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 주는 지도도 없고, 행복이 있는 곳을 가리키는 나침반도 없다는 것을 안다. 만약 어딘가에 행복이 있다면 스스로의 감각에 의지해 찾아야만 한다. 삶이 답답하고 행복의 날이 아득히 멀리 있는 듯해도 지금 살아 있고 심장이 뛴다면, 아직 우리에겐 가능성이 있다. 오늘의 실패를 이겨내고 불행을 견딘다면 더 나은 날이 올 것이다. 지금 여기의 아름다운 순간들, 그 작은 행복에 집중하자. 내 가까이에 있던 푸름, 그 사라지는 빛에 감싸인 채 멀어진 장소들, 그곳을 찾아서 묵묵히 걸음을 옮겨야만 하리라. -
--- p.175
생에 감사해! 내게 남은 생의 빛나는 날들을, 저 멀리 반짝이는 햇빛을 보고, 마른 갈대가 서걱대는 소리와 헐벗은 대지가 내쉬는 한숨 소리를 보고 들을 수 있음을, 살아서 이 빛과 공기
를 생생하게 느끼며 걷고 있음을.
--- p.183
행복은 물질적 형편의 문제가 아니라 사소한 것 속에서 느끼고 향유하는 능력에 깃드는 무엇이다. 살아 있음 자체에서 순수한 기쁨을 느끼고, 그것이 지속되리라는 신뢰 속에서 만끽하는 감정이다. 행복은 늘 작고 단순한 것 속에 있다. 나를 행복으로 이끄는 것은 새소리에 잠 깬 여름 아침, 자두 한 알, 탁 트여 빛나는 바다, 깊은 숲이 있는 산속 고요, 대숲에 사락거리는 바람 소리, 아름다운 시로 가득 찬 시집 한 권, 갈증 날 때 차가운 물 한 잔, 모르는 여인의 친절한 미소, 누군가의 배려와 호의, 우정, 건강한 정신과 신체, 숙면, 산책, 따뜻한 담요, 여행지에서의 기분 좋은 일박…….
--- p.287~2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