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에서 서울을 만나다
서울은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세계 그 어느 도시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변해간다. 하지만 서울이 유행의 첨단을 걷는 도시라고 볼 수만은 없다. 길게는 반만년, 짧게는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600년 넘게 우리나라의 수도로 굳건히 자리매김한 도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울 도심에서 권력과 역사, 문화의 오랜 중심지다운 모습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전후 산업화 시기 등 격변의 시간을 거치며 과거와의 고리는 점점 약해졌고 역사도시라는 말이 무색해질 정도로 서울은 고층건물과 아파트로 채워졌다. 하지만 우리가 무심결에 지나친 풍경 속에 옛 건물 그리고 옛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려져 있다. 이 책은 우리의 관심에서 조금 비껴가 있어 먼지 쌓인 채 잠든, 우리가 미처 몰랐던 서울의 모습을 섬세한 필치의 스케치로 되살려낸다.
권율, 김종서, 손순효, 이황, 정도전 등 우리 역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의 생가나 몇 백 년 넘게 한자리를 지켜왔지만 동네 주민들조차 그 존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딜쿠샤 은행나무, 수풀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운강대 각자(刻字) 등 옛 흔적을 찾아다니며 이장희는 개발에 밀려 역사적 유적지가 말없이 사라지는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하지만 마냥 ‘옛 서울이 좋았지’ 하고 감상에 젖지는 않는다. 세종로 횡단보도나 광화문광장, 조금씩 옛 모습을 찾아가는 서울성곽, 일본대사관 앞의 평화비, 청계광장에 세워진 다슬기 모양의 ‘스프링(Spring)’ 같은 조형물 등 서울의 공간을 새롭게 채워가는 것들에 대해 다루면서 앞으로의 서울에 대한 기대감 또한 열어둔다.
서울은 골동품이 아니다. 끊임없이 변하는 유기체이기에 오늘도 자동차 내비게이션 회사에서는 지도를 수정하느라 분주하다. 많은 옛 건물이 개발이라는 명목하에 사라져갔다. 둘러보면 한국전쟁 이후의 모습, 나아가 잘 다듬어진 신도시의 모습이 주를 이룬다. 역사도시라기에는 초라할 정도다. 그래서 더욱 사라진 것들에 대해 알고 싶어졌다. 이제는 새로 지어진 고층건물 때문에 보이지 않는, 가려진 옛이야기와 만나고 싶었다. 그렇게 과거와 현재 서울의 시간을 그려보고 싶었다. 내 스케치 속 서울도 시간의 흐름을 따라 계속해서 변해갈 것이란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의 서울 스케치 여행 또한 내가 살아 있는 한 언제나 진행형이다. _본문에서(420쪽)
서울의 역사를 거닐다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에서 이장희는 조선시대의 수도 한양의 경계를 이루던 사대문의 안쪽을 스케치한다. 경복궁, 명동, 숭례문, 인사동, 정동, 청계천 등 이 책에서 주요하게 다룬 장소들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익숙한 장소이기에 모두 여기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곳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나 그 장소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이장희는 “서울의 풍경을 담으러 돌아다니면서 내가 머문 장소에 역사를 살포시 포개놓으니, 많은 의미가 새롭게 생겨났다. 이 땅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래 태어나고 죽기를 반복하면서 어딘들 사연이 없겠냐마는 여러 전쟁과 정변, 혁명이 끊임없이 일어난 수도 서울에는 기구하고 억울한 사연이 참 많았다”고 하며 역사와 인물 이야기로 서울에 다채로운 색을 입힌다.
종각역에서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큰길가에 팔작지붕 기와집 한 채가 있다.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우체국인 우정총국이다. 우정총국은 1884년에 우정업무를 시작했으나 20여 일 남짓 운영되다가 갑신정변이 일어나 폐쇄돼 학교로 사용된다. 이후 흥인지문을 보수할 때 그 재료로 쓰일 뻔했으나 해체 직전에 체신부에서 사들여 박물관으로 운영되다가 2012년 128년 만에 본래의 업무를 재개했다. 우정총국은 운 좋게 살아남았지만 안타깝게 본모습을 잃은 장소들도 많다. 현재 현대식 병원 한쪽에 세 들어 자리한, 백범 김구가 암살된 경교장을 비롯해 태평로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교통섬 안에 고립되었다가 원래 위치보다 뒤로 물러나게 된 대한문, 짝을 잃은 채 차도에 홀로 남은 동십자각, 불길에 허망하게 사라진 숭례문 등이 서울 땅에서 힘겹게 버티는 장소들의 애잔한 모습도 전한다.
서울의 풍경을 담으러 돌아다니면서 내가 머문 장소에 역사를 살포시 포개놓으니, 많은 의미가 새롭게 생겨났다. 이 땅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래 태어나고 죽기를 반복하면서 어딘들 사연이 없겠냐마는 여러 전쟁과 정변, 혁명이 끊임없이 일어난 수도 서울에는 기구하고 억울한 사연이 참 많았다. _본문에서(78쪽)
마음을 돌리면 서울 여행이 시작된다!
서울 여행은 어렵지 않다. 일상에서 발길 한 번, 마음 하나 돌리면 여행이 시작된다. 거창하게 짐을 싸고 일정을 계획하지 않아도 좋다. 자동차 안에서 보는 서울과, 걸어다니며 보는 서울은 다르다. 스쳐 지나는 서울과 잠시 멈춰 서서 바라보는 서울도 다르다. 무심코 지나친 곳에 마음을 담아 발을 들여놓기만 해도 서울 여행은 시작된다.
많은 내외국인이 쇼핑을 목적으로 명동을 찾는다. 하지만 이곳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내진 및 내화 설계를 한 한국전력 사옥을 비롯해 과거 문화의 중심지였음을 상징하는 명동예술극장, 유리를 외장재로 사용한 최초의 건물인 유네스코 회관과 그 옥상에 위치한 작은누리 생태공원 등 다양한 구경거리가 있다. 걷고 싶은 서울 거리를 꼽을 때 빠지지 않는 정동길에도 상하이에서 직접 가져온 벽돌로 쌓은 옛 신아일보 별관, [장독대] [장밋빛 인생] 같은 조형물, 지금은 역사박물관이 된 배재학당, 덕수초등학교 교정에 위치한 첫 방송터, 한국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손탁호텔 등 다채로운 매력이 숨어 있다.
이장희처럼 서울을 스케치하지 않아도 좋다. 그냥 멍하니 바라만 봐도 괜찮다. 그저 그 장소에 머물며 지나가는 사람들, 새가 날아가는 하늘을 보며 시간을 보내기만 해도 서울 여행은 충분하다. 오랫동안 서울에서 살았지만 서울에 대해 잘 몰랐기에 서울 스케치 여행을 시작했다는 이장희와 함께 서울 곳곳을 누비는 동안 분명 서울은 그전과 다른 의미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스케치로 서울을 담고자 한 첫번째 이유는 서울을 ‘더 잘 알고 싶어서’였다. 한 장의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스케치노트와 대상물을 수없이 번갈아 보는 일은 속사정까지는 몰라도 적어도 그 외형을 알게 되는 최선의 방법이다. 선 하나하나를 따라가며 사물(혹은 인물)을 알아가는데 어떻게 가까워지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일련의 행동 사이에서 평범한 골목길도, ‘내 스케치 속 골목길’로 바뀐다. 하지만 스케치가 가진 큰 매력 중 하나인 ‘느림의 미학’은 좀더 특별한 무언가를 선사한다. _본문에서(4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