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 마을이 어렵다는 말은 누구나 쉽게 한다. 문제가 무엇인지도 쉽게 보인다. 하지만 현장 가까이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사람은 드물다.
--- 첫문장
농민이 농촌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당연히 매년 무슨 작목을 심어야 할지 정해져 있고, 판로와 연말 소득이 어느 정도 안정되어 있다면, 이보다 명확한 농촌살이 방법이 있을까?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살아오며, 한국의 근대화와 고도경제성장을 뒷받침해온 이들에게 이만한 보답이 있을까? 국민의 기본권이 중시되는 시대에 농민(농촌 주민)의 “농촌을 지키며 계속 살 수 있도록 해달라”는 주장은 사치일까? 국민의 일원으로서 농민의 당연한 기본권이 아닐까? 이제는 농촌 마을을 지키며 자연과 이웃과 더불어 열심히 노력하는 생활이 주민의 기본권으로서 당연히 보장되어야 한다. 어떤 방법, 어떤 경로가 가능할까? 가장 중요하면서 기본적인 경로는 마을에서 농업이 지속될 수 있도록 하고, 농업으로 생계를 영위할 수 있게 하는 길이다. 이런 방향에서 마을농업을 하나의 대안으로 제안한다.
--- p.18~19, 「왜 마을농업인가」, 구자인
한국의 두레는 마을 단위로 상당한 강제성을 가진 윤번제 농업노동을 뜻한다. 문제는 지금까지 어떤 사례를 보아도, 마을에서 윤번제로 일한다면 집집마다 경작면적이 다를 경우, 농가 간 형평성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모호하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한 의문을 풀어가려면 먼저 품앗이와 구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품앗이는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서로 약속하여 일손을 주고받는 것으로서, 1:1의 개별적 노동교환 방식이다. 이런 품앗이와 달리 두레는 자연마을 단위의 지연공동체적 강제성을 띠고 있었다. 상당한 강도의 참여의무가 있었다는 말이다. (…) 두레의 강제성은 왜 발생했는가? 어떤 마을에서도 전근대 시기까지는 법제적 의미의 신분제가 작동했고, 법제적 의미가 아니라 하더라도 마을 내에서 경제적인 상류층·중류층·하류층의 구분이 있었다. 그것은 사람들이 사회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선인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일제강점기까지는 어떤 마을에서나 이른바 ‘마을신분’이라는 개념이 작동했다.
--- p.29~30쪽, 「전근대 농촌 사회의 두레 다시 보기」, 배영동
초고령화는 한국 농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계 모든 국가에서 농업은 다른 산업에 비해 고령자 비율이 월등히 높다. 또한 농업과 공업 간에는 생산력의 격차가 심하다. 따라서 생산성을 어떻게 높일 것인지 대책이 필요하다. 일반적인 방법은 규모화이며, 한국은 지금까지 개별 경영의 규모를 확대하는 정책을 펼쳐왔다. 농업 구조 개선이라 함은 소규모 상층 농가에게 농지를 몰아주는 것을 의미했다. (…) 일본 또한 전통적으로 개별 경영을 통한 규모 확대를 진행해왔다. 1960년대에 농업기본법을 만들고 그 이후의 농정을 ‘기본법 농정’이라 불러왔다. 한국은 1990년대에 이 기본법 농정의 이념이나 방식을 그대로 가져와 농업구조개선사업을 펼쳐왔다. 하지만 이미 일본에서는 1970년대 말에 농가 규모를 확인해본 결과, 기본법 농정은 효과가 별로 없다는 평가가 내려졌다.
--- p.43~44, 「일본 집락영농의 현황과 시사점」, 유정규
농업환경을 보전하려면 수행해야 할 활동과 그 활동들의 묶음으로 표현될 전략을 누가 판단하고 결정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이는 아주 중요한 측면이다. 농업환경에 투입되는 여러 종류의 유기물·무기물·노동 등을 농업생산성을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도 생태계를 덜 훼손하는 방식으로 조절하는 활동은 집합적 활동collective action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가령, 일정한 수계水系를 둘러싼 농지에서 영농하는 농민들이 다 함께 농약 사용을 억제하고 유기질 비료를 쓰되 투입을 적절하게 조절하지 않는다면, 그 수계의 농업환경 보전은 난망한 일이다. 이 같은 집합적 활동은 당연히 지역사회 농민 및 주민들의 숙의熟議와 합의된 실천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그런 실천을 가능케 하는 구조를 거버넌스governance라고 부른다. 대략 읍·면 수준에서 농업 문제를 중심으로 농민이나 주민이 거버넌스를 형성해 집합적으로 활동하는 것을 ‘마을농업’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농업환경 보전이야말로 ‘마을농업’을 바탕으로 도전해야 할 과제다. 아쉽게도 현재 정부 정책에서는 농촌 지역사회 주민의 공동 노력과 자율성을 농업환경보전 프로그램에 수용하는 문제가 충분히 검토되지 않은 듯하다.
--- p.55~56, 「농업환경 보전과 마을농업」, 김정섭
농촌의 지속가능성과 농업의 지속가능성을 어떻게 상호연결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고민할 때가 되었고, 그런 차원에서 ‘마을농업’이라는 기획이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농업의 효율성과 생산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농촌이라는 공간의 지속가능성을 위해서 농업이 어떤 형태로 재편되어야 하며, 농업이 어떤 기능과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그런 의미를 포함시키자는 것입니다. 영농을 규모화해서 생산성을 높이려면 농지를 확보하는 게 중요한데 어떻게 할 것이냐는 식의 논의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계속 살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논의하자는 것입니다.
--- p.65, 「마을과 농업」, 정민철
정주하의 사진들에서 우리는, 한국 자본주의의 맹렬한 심화과정에서 생산된 마을 공간과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다. 설명 없는 사진은 메시지를 전달하기 어렵다고들 한다. 그러나 2003년부터 2007년까지 경북 경주와 울진, 전남 영광 지역의 원전 주변 마을 공간과 사람들의 일상을 기록한 『불안, 불-안』의 사진들은 사진 설명이라는 구속이 그다지 필요치 않아 보인다. 대부분의 사진에서 원경으로 자리잡은 원자로 돔들이 의미하는 것을 우리는 곧바로 알아채기 때문이다.
--- p.98~99, 「불안, 불-안」, 정주하
“평생 농민을 상대로 공무를 수행해오셨는데 농민을 무시하면 됩니까? 말씀하신 대로 농민이 못 배우고 못나서 농사짓는데 농사도 잘 짓고 거기다 파는 것도 농민이 잘 하라고 지도하시면, 대체 농협과 농정 관련 공무원은 뭐 하러 있습니까? 그리고 농사가 좋아서 농사지어 먹고살려고 내려온 저보고 농사짓는 거 부정적으로 말씀하시는 게 농사 관련 공무원이 하실 말씀은 아니시죠.”
--- p.114, 「귀농 20년, 기억나는 말들」, 길종각
소농은 미래에도 농업인의 다수를 차지할 테지만, 여전히 농업정책의 주요 대상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소농의 삶을 결정짓는 주요소가 되지는 않는다. 외부적 요인은 예전부터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변화의 출발은 어차피 ‘지금, 여기, 내가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선택의 기준은 올바름과 양심이다.
--- p.124, 「소농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금창영
그를 만날 때마다 악수를 청하는데, 그것말고도 한 가지 더 있다. 악수를 하고 말없이 커피를 타 마신 다음, 여성의류 광고건 무어건 볼륨을 높여 텔레비전을 보거나 도서관 내 책상 앞 의자에 앉아서 입을 벌리고 자기 전에 이것을 한다. “이건 뭐유?”, “뭘 하시유?” 이 두 마디다. 몰라서 묻는 게 아닌 줄 안다. 접시고 책이고 수백 번 물었을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 실마리를 푼다. 모르는 이하고도 서먹함을 풀고 관계를 트는 것이다. 어제와 같이 오늘도 그렇게 해서 좋은 관계를 확인하고 이어가자는 것이다.
--- p.127쪽, 「 「윤재영 씨」, 그 뒤」, 홍순명
농촌에는 청년 세대의 진입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가족농이 아닌 새로운 농업 형식이 필요했다. 젊은협업농장은 이런 고민에서 시작됐다. (…) 소농 정도의 경영 규모조차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이 모여 협동조합으로 기반을 구축하고 협업적으로 농장을 운영해보자는 것이었다. 협업농장은 토지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 적정한 규모의 농장을 운영하는 방식이다. 이는 각 가정에서 개별적으로 농사짓는 소농(가족농)들이 수익을 올리기 위해 유통과 가공 등의 영역에서 연대하는 것과 다르다.
--- p.135, 「협동조합과 젊은협업농장」, 정민철
이야기에서는 때때로 메시지보다 소통이 중요시된다. 정보는 촘촘하게 엮이지만 이야기는 정보에 틈을 낸다. 정보에 빈 공간을 만들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낸다. (…) 이야기에서는 이야기를 만든 사람과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 그리고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때때로 섞인다. 살고자 이야기를 변형하고, 그것을 듣고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해줄 때, 듣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이 된다. 이야기는 그렇게 끝없이 돌고 돈다. 정확한 이야기라는 것은 죽은 이야기다. 완전한 고독 속에서 만들어지는 소설이라는 형식은 그래서 죽은 이야기다.
--- p.156~157, 「이야기가 만드는 인간과 공동체의 가치」, 함성호
책을 읽으며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농부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 질문이 어려운 이유는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군대에서 고참에게 “넌 뭐하는 놈이냐?”라는 질문을 들은 이후로, 중년으로 접어든 나에게 인생의 화두가 되는 질문이다. 저자는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저는 그저 열심히 살았을 뿐입니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책을 통해서 얻은 힌트를 써보자면,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지 말자는 것. 성공에 도취하고 자만하거나, 혹은 성공을 부담스러워하고 거부하지 말자는 것.
--- p.174, 「꿈이 부담스러운 나이」, 조대성
생태·환경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온 독자라면 『최후의 전환』의 내용과 논리 전개에 꽤 익숙할 것이다. 특히 상호연관적이고 전체론적인 세계를 분절적·기계론적 세계로 재설계한 근대의 자연과학자와 철학자들에게서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생태 위기의 원인을 찾는 논리가 그렇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복습에 머물지 않는다. 서구 역사의 기원에서부터 현재까지 이어져온 자연과학과 법학 간의 끈질긴 유사성을 발견한 지은이들은,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과학과 법이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다고 단언한다.
--- p.180, 「생태를 보호하는 법과 ‘생태적 법질서’」, 장정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