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은 우스꽝스럽게 전개될 것이다. 만화 같은 인물들이 등장해 허무맹랑한 플레이를 펼치며 웃고 울고 피 흘리고 소리 지르고 싸우고 쓰러지고 사라져갈 것이다. 선수들은 서로 호흡을 맞추면서 원한을 청산하고 우애를 쌓을 것이고 주인공의 로맨스는 끊어질 듯 이어지며 조금씩 나아가고 팀은 매번 터무니없이 강한 상대를 만나 궁지에 몰릴 것이다. 주인공들은 계속되는 시련을 겪으며 조금씩 단련되겠지. 그렇다면 이 소설은 앞으로 얼마나 더 써야 할까. 우선 1부는 원고지 1천 매 정도로 마무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때쯤이면 나도 어딘가에서 다시 족구를 할 수 있게 될까.
--- pp.51-52
자질구레한 세부를 제거하면 족구의 규칙은 놀랍도록 간단하다. 상대 코트에서 넘어온 공을 3회 터치 안에 다시 상대 코트로 넘기면 된다. 실패하면 상대가 1점을 얻는다. 터치는 무릎 아래의 다리와 머리로만 할 수 있다. 15점을 먼저 얻으면 1세트를 따고 2세트 혹은 3세트를 먼저 따내면 경기에서 이긴다. 한 팀은 네 명이지만 경우에 따라 다섯 명, 세 명, 두 명 혹은 단 한 명이 될 수도 있다. 공과 상대와 딱딱한 바닥만 있다면 언제나 누구나 족구를 할 수 있다. 산업사회와 도시가 발달하면서 족구가 세계를 지배하게 된 건 그러므로 결코 우연이 아니다.
--- pp.89-89
알베르 카뮈는 축구를 하며 인간의 도덕과 의무를 배웠다고 했다. 그와 비슷한 말을 나도 족구에 대해 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나 내가 족구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뭔가 배우기는 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족구는 내게 뭔가를 주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걸 받을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그래서 족구는 그것을 어딘가에 남겨놓았을지도 모른다.
네트가 쳐진 직사각형 족구장의 풍경, 그곳에서 내가 했던 플레이들, 떠올리기조차 괴로운 볼썽사납고 어처구니없는 실수와, 은근히 자랑하고 싶은 아주 잠깐이지만 순간적으로 빛났던 플레이들, 다른 멤버들과 함께 만들었던 모든 경기들, 승리와 패배, 경기장에 뿌린 모든 땀방울들, 환희와 절망, 함께 나눈 것과 혼자 삼켜야 했던 것들, 회전하며 튀어 오르는 공, 그것을 쫓아가며 내지르는 발, 춤추듯 흔들리는 어깨, 허리와 무릎의 삐걱거림, 눈빛과 손짓, 갈구와 응답, 보상과 위로, 관용과 존경, 하나의 경기에서 배어 나오는 모든 신호와 미덕들, 공을 차고, 튀어 오르는 공을 머리로 받고, 그 공을 안축으로 토스하고, 떨어져 내려오는 공을 차서 네트를 넘기고…….
족구가 남긴 건 그 안에 있는 것 같다. 아니면 그 풍경 너머에 있거나.
--- pp.159-161
옛 여자 친구가 이 소설을 읽게 된다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여전히 이런 걸 쓰는구나. 족구라니. 내가 알기로는 그거 TV 중계도 안 하고 경기장도 별로 없는 마이너한 스포츠인 것 같은데. 국가 대표니 족구 월드컵이니 하는 것도 다 허구인 거지? 왜 이렇게 황당한 이야기를 쓴 거야? 그럼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지. 나도 잘 모르겠어. 아마 족구에 뭔가 있는데 그게 뭔지 알고 싶어서 족구 소설을 쓰는 걸 거야. 이 이야기가 엉뚱한 건 알지만, 나는 이렇게 쓰는 방법밖에는 모르니까.
--- p.207
족구는 공을 차서 상대방 코트로 넘기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스포츠다. 누구나 두 다리만 있으면 족구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족구가 사람이라 한다면 우리는 언젠가 어디선가 족구와 마주친 적이 있다. 족구는 우리에게 뭔가를 주려고 하지만 우리는 바빠서, 혹은 그게 어쩐지 별 필요 없는 것 같아서 받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난다. 그리고 언제든 그곳에 다시 가면 족구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중에 다시 가보면 그 자리에는 족구 대신 다른 것이 서 있다. 우리는 언젠가 다른 곳에서 족구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대신 점차 기억이 흐려지며 그때 만났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뭔가 만나기는 했는지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런 일은 없었다고 생각하기로 한다.
족구가 내게 주려고 했던 것이 뭔지 모르지만 내 소설의 주인공들은 그걸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빛 하나 없는 절망 속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강적들을 차례차례 꺾으며 족구를 지키기 위해 앞으로 나아간다. 그 길은 아득히 멀어 보이지만 그들에게는 함께 헤쳐나갈 동료들이 있다. 어쩌면 그 길이 바로 족구가 내게 보여주려 한 것일지도 모른다.
부디 우리가 함께 그 길을 끝까지 갈 수 있기를.
--- pp.209-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