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8년 11월 26일, 메이지 정부는 도쿄로 천도를 단행. 1) 일단 당연히 250년 수도의 전국 관리 인프라를 그대로 활용하는 게 제일 효율적인 선택이고 2) 막부 중심지였던 관동의 거대한 에너지가 저항의 방향으로 뿜어나오지 못하도록 아예 정부 자체를 누름돌로 100만 에도 위에 두자는 방책. 3) 그리고 교토 조정 귀족들의 음습한 음모 에너지와 삿초토 번주님들의 끈적거리는 영향력에서 신정부를 최대한 이격시키고 싶은 소망. 그리 수도도 옮기고, 무진전쟁도 승리로 마무리 짓고, 1869년 6월에는 홋카이도의 에노모토 일당 토벌도 마무리.
--- p.21~22, 「제1장_메이지 개원」 중에서
1880년, 오페르트는 자신의 조선 경험을 책으로 써서 남기게 되었으니. 《금단의 나라, 조선》이 책은 조선에 매우 우호적인 기술로 유명합니다. 오늘날이었다면 친한파 국뽕 유튜브로 크게 흥했겠죠. 이를테면- “조선인들은 품행, 인성이 좋아서 나라에 중범죄가 많지 않다.” “조선인들은 그 이웃들보다 키와 체구가 더 크다. 얼굴도 흰 걸 보니 혹시 코카서스계?” “그들은 이웃 나라 사람들보다 온화하고 친화력 좋고, 정직하고, 순수하다.” 이리 조선인에 우호적이었던 오페르트는, 자신이 벌인 모든 행위가 저 훌륭한 조선인을 억압하는 대원군의 압제를 타파해, 조선인을 해방시키고 문명 세계로 이끌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했겠지요.
--- p.43~44, 「제2장_Forbidden Tomb」 중에서
1867년부터 조선 땅에는 자연재해가 잇따라- 수해! 냉해! 충해! 1869년에 이르면 특히 북부 지역이 생지옥化. 이에 백성들은 살길을 찾아 떠나기 시작하고 무단으로 국경을 넘을 경우 처형당할 수도 있었지만 1869년부터 3년에 걸쳐 6만여 명이 두만강을 건넌다. 조선족들은 이를 1869년(기사년) ‘기사흉년’이라 기억하고, 고려인들은 1870년(경오년) ‘경오도강’이라 기억한다.
--- p.56~58, 「제3장_Hi Boosan, bye Dooman」 중에서
서양 교회에서 사람들 장기를 적출해 온갖 의약품, 화학제품 제조에 사용한다는 괴담이 중국 전역에 널리 퍼진 지 오래. 그 와중에 톈진에서는 ‘聖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가 세운 인자당 교회 수녀원이 수십 명의 고아들을 거둬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1870년 여름, 전염병이 돌아 인자당 고아원의 영유아 30~40여 명이 집단 사망하는 사건 발생. 이에 인자당 교회에 대한 톈진 사람들의 의혹 폭증.
--- p.124~125, 「제6장_Dieu et L’Empereur」 중에서
엠스에서 온 전보를 받은 비스마르크는- 보도 자료를 해외 언론에 배포. 독일 언론이 받아들인 내용은- 프랑스 대사가 휴양 중인 국왕 폐하 면전에 무례하게 난입! 스페인 왕위 포기를 맹세하라며 겁박!! 한편 프랑스 언론에 실린 버전에서는- 프로이센 국왕이 프랑스 대사를 대충 쫓아낸 후, 프로이센 부사관(오역)이 프랑스 대사를 문전박대!! 프랑스 조야는 혁명 기념일과 맞물려 독일 정벌론으로 불타오르고. 프로이센과 全 독일에서 프랑스 응징 분위기가 폭발한다.
--- p.133~135, 「제6장_Dieu et L’Empereur」 중에서
6월 11일 아침, 미군은 식사 후 광성보를 향해 전진. 중간에 위치한 덕진진의 조선군은 미군 도착 전에 철수. 미군, 덕진진 무혈 점령. 그리고 곧바로 대모산 고지 확보! 광성보 포켓의 입구를 제압하는 감제고지인 대모산. 대모산을 확보함으로써 미군은 배후의 위협을 차단하고 광성보 조선군의 움직임도 어렵게 만든다. 어재연은 지키기 어려운 평지의 광성 돈대 대신에 언덕 위 손돌목 돈대를 메인 진지로 삼고. 광성보 500여 명의 병력 중 다수를 손돌목 돈대에 집중. 물론 미군은 조선군에게 일각의 여유도 주지 않고, 오전 10시에 바로 공격 개시. 대모산 어귀에 배치한 12파운드 야포 2문이 불을 뿜고, 바다에서는 포함 모노카시와 팔로스가 지원 사격. 쌓아놓은 화약 더미가 적탄에 맞아 폭발하는 등, 손돌목 돈대의 화력은 적에게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한 채 무력화되었고, 손돌목 돈대의 내부 면적은 약 235평. 대형 헬스장만 한 넓이에 수백 명이 들어차 있다보니 포격에 의한 인명 피해도 컸다.
--- p.236~240, 「제12장_신미양요 下」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