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상대를 떠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자,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나보다 급여가 높은 사람, 좋은 자리에 있는 사람, 높은 평가를 받는 사람….
그 모든 것에는 ‘기준’이 있습니다. 차례로 말하자면 돈이라는 기준, 지위나 처지라는 기준, 사회적 평가라는 기준이겠지요. 그런 기준으로 나와 남을 비교하기 때문에 열등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 p.016
사람은 때에 따라서 자기의 자리나 처지 내에서도 변화를 경험합니다. 앞서 자리나 처지는 모두 자기가 ‘지키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이 지킨다는 것이 머무름, 또는 바뀌지 않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의 내가 성장해 간다(진리와 함께 변화해 간다). 이것이 지킨다는 것의 뜻입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배움입니다. 남과의 교제에서, 남의 말과 행동에서 배운다. 이것이 성장의 양식입니다. --- p.035
매사에 납득감을 추구해 간다. 이는 일을 대하는 나의 토대를 견고히 다지는 것입니다. 토대가 든든하면 그 위에는 어떤 건물도 지을 수 있습니다. 한편, 평가에 기우는 태도는 그 토대를 소홀히 다지는 것입니다. 잠깐은 번듯한 건물이 들어설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폭삭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사상누각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 p.044
‘즉금卽今, 당처當處, 자기自己.’, ‘지금 당장, 그 장소에서, 내가’라는 뜻입니다. 그 순간에, 그 곳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한 결같이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이 선어는 말하고 있습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지금’을 소중히 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지금을 소중히 할 자신이 있으십니까? --- p.053
무엇을 할 때이건 의식해야 할 것은 남이 제멋대로 내린 평가가 아니라, 해님의 시선, 다시 말해 양심일 것입니다. 나의 이 일 이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지가 아니라, 해님이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을지, 양심에 어긋나는 데는 없을지를 늘 질문해 가는 것입니다. --- p.067
실패했다고 해서, 또한 좌절을 맛보았다고 해서 목숨까지 빼앗기지는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는 결코 안이한 낙관론이 아닙니다. 앞서 ‘본래무일물’이라는 선어에 관해 말씀 드렸습니다만, 무엇 하나 가지지 않은 것이 사람의 본모습입니다. 실패나 좌절로 무언가를, 혹은 전부를 잃었다고 해도, 그것은 다만 본모습으로 돌아간 것일 뿐이지 않을까요? --- p.071
자만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조금 떨어진 데서 객관적으로 바라봅시다. 그러면 그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행동이 진흙을 조금씩 떼어내고, 번뇌를 하나씩 버리는 일로 이어집니다. 서두르지 않아도, 조바심내지 않아도 좋습니다. 가능한 부분부터 하나씩 버려 나가지 않으시겠습니까? --- p.081
인간관계를 더 좋게 유지하는 데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상대를 배려하는 일입니다. 상대는 전혀 상관하지 않고 자기만 밀고 나가서는, 그 관계는 언젠가 막다른길에 놓입니다. 다만, 상대를 배려하는 것과 눈치를 보는 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눈치를 보는 이면에는 자기를 잘 보이거나 상대의 환심을 사려는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 p.119
소중한 사람이 몸져누우면 최선을 다해 간병을 합니다. 자는 시간도 아까워하며 계속 돌보아 줄 것이며, 필요하다면 밤중에 병원에 데려가기도 하겠지요.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다 낫고 웃음을 보이면 나도 기뻐서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그 사람을 위해서 한 내 행동이 나를 기쁘게 해 주는 셈이지요. 이것이 이타행입니다. --- p.148
무리에 들기 위해 자기다움을 잃기보다는 무리에서 떨어지더라도 자기답게 있는 쪽이 더 낫지 않을까요. ‘노당당露堂堂’이라는 선어가 있습니다. 어디에도 숨기는 것 없이 있는 그대로가 드러나 있다는 뜻입니다. 자기다움이 곧, 있는 그대로라는 뜻이지요. 그것이 진실한 모습이라고 이 선어는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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