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파 신전의 하얀 대리석이 어느새 찾아온 봄 햇살을 받아 밝게 빛났다.
---「1권 / 제1장 - 모험자들」중에서
“이 로도스에는 저 고블린과 같이,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사악한 존재가 수두룩합니다. 지금의 나에겐 그런 악과 대결할 힘이 없습니다. 그렇다 해도,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여행을 떠나려고 합니다. 에트도 함께해주기로 했습니다. 동료가 있으면 이래저래 마음도 든든하고, 여행 중에 닥쳐올 위험에도 함께 맞설 수 있습니다.”
---「1권 / 제1장 - 모험자들」중에서
디드리트는 새로 온 사내들 중 금속 갑옷을 입은 쪽을 향해 미끄러지듯 다가가 다리를 모로 후려치듯 낮은 돌려차기를 날렸다. 남자는 그 발길질을 뛰어올라 피하고는, 놀란 표정을 짓는다. “아냐! 난 당신 편이라고!” 남자가 놀라서 소리쳤다. 적의가 없음을 보이려는 듯, 양팔을 크게 펼친다. “내 편?” 디드리트는 주의 깊게 남자를 관찰하며 그 말의 진위를 가려보려 했다. 순박한 눈동자가 디드리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 아직 젊은 남자인 것 같다. ‘나쁜 인간은 아닌 것 같군.’ 디드리트는 그렇게 판단하고 청년에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1권 / 제2장 - 알라니아의 검은 그림자」중에서
‘당신의 이름은 역사에 남지 않을지도 몰라. 영웅으로 칭송되지 않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당신의 올곧은 생각은 전승되어 로도스 사람들 사이에서 계속 회자될 거야.’
---「1권 / 제6장 - 마파의 딸」중에서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만큼, 로도스에 드리운 먹구름은 두터웠고 희망의 빛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2권 / 제1장 - 사막의 왕국에서」중에서
디드리트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모습이었다.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자신의 손가락 끝을 보고 있다. 그리고 잠시 후 의연한 표정을 띠며 판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비밀을 확인해야겠어. 갑옷과 레이피어를 건네줘. 나도 당신을 따라가겠어.” “안 돼!” 판은 단호하게 말했지만, 어투는 거칠지 않았다. “디드는 지금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냐. 게다가 이번 전투에 칼라가 관계돼 있는지도 분명치 않고. 하지만 나는 카슈 왕에게 입은 은혜가 있어. 또…….” “또 뭐?”
판은 흠칫하고 말을 끊었다. 그리고 쑥스럽다는 듯 다른 데로 눈길을 돌리며 툭 내뱉듯 말한다. “난 불꽃정령이 싫어졌어.” 디드리트는 그가 입 밖에 내지 못한 말까지 분명히 들려오는 것 같았다. 복받치는 감정이 그녀의 목을 메게 했다. “……알겠어. 당신이 말한다고 들어줄 사람이 아니란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대신 조심해.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프리트에게 손을 대서는 안 돼.”
---「2권 / 제2장 - 힐트 전투」중에서
피닉스는 창공을 날아오르며 단 한 번 소리 높여 울었다. 긴 여운을 남기는 울음소리였다. 그 소리는 바람과 불꽃의 사막 구석구석까지 퍼져갔다. 그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그 소리를 들었다. 물론 그 울음소리는 해방의 시기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소리였다. 옛 맹약과 흉흉한 과거로부터 해방되는 시간을.
---「2권 / 제6장 - 그리고, 해방되는 것」중에서
흑기사는 얼굴에 비아냥거리는 웃음을 띠었다.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운명을 짊어졌고, 그걸 어떻게든 넘어서야 한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잠시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한 뒤 니스는 답했다. “저라면 신에게 기도하겠습니다.” “그 충고, 새겨듣겠습니다.” 흑기사는 이번에는 호쾌하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갑옷 소리를 울리며 바로 일어섰다.
---「3권 / 프롤로그」중에서
“드래곤과 싸운다고……?” 온몸의 땀이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최강의 종족으로 알려진 드래곤과 싸우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가는 어린아이도 안다. “어째 당신에게 진 빚을 갚을 수 있을 것 같네? 내 이름은 시리스라고 해.” 망연히 있는 판을 향해 여전사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3권 / 제1장 - 광전사」중에서
“그렇습니다. 만일 아슈람이라는 남자가 지배의 왕석을 손에 넣는다면 이 로도스 전역을 정복할 수도 있겠지요. 장모님의 말씀으로는, 아슈람이라는 인물은 벨드 황제에 필적하는 실력을 갖추고 있는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남자가 지배의 왕석을 손에 넣는다면 장난 아니겠군.”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정도는 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로도스가 아슈람이라는 남자에게, 나아가 마모 제국에게 지배당하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그 사람보다 먼저 지배의 왕석을 손에 넣어야 합니다. 설령 드래곤과 싸우는 한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3권 / 제1장 - 광전사」중에서
그런 아슈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올슨은 주어진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우리는 패했다. 그리고 포로가 되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할 게 잔뜩 있었다.
---「4권 / 제5장 - 패배」중에서
지켜야 해, 올슨은 생각했다. 그녀를 지켜야 해. 그러기 위해선 힘이 필요해. 올슨은 깨달았다. 힘을 빌려주는 것이 자신의 마음속에 잠들어 있다는 것을.
---「4권 / 제7장 - 화룡산의 전투」중에서
“시리스, 미안해…….” 레드릭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너와 네 동료들을 이런 상황에 처하게 해서…….” “난 포기하지 않아!” 시리스는 크게 외치며 검을 빼 들었다. “저 문에 있는 적병을 돌파하면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몰라. 내 목숨이 끊어지기 전까지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야! 남자라면 그런 약해빠진 소리 하기 전에 검부터 뽑아!” 레드릭은 자기도 모르게 시리스의 얼굴에 매혹당했다. 그녀는 전설에 나오는 용기의 정령 발키리처럼 늠름했다. 검을 쥐고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문 가까이에 있는 적을 쏘아보고 있다. “알았어. 내 목숨과 바꿔서라도 너와 네 동료들을 지킬게.” 레드릭은 검을 뽑아 단단히 쥐었다.
---「5권 / 제1장 - 하이랜드의 용공자」중에서
그리고 에트는 밸리스 전군을 뒤돌아보며, 그들을 향해 말하듯 뒷말을 이었다. “모두들 들어라! 나는 밸리스 왕국을 검의 힘으로 통치할 생각이 없다. 파리스 신의 법과 정의의 마음이 내가 나라를 다스리는 힘이다. 밸리스는 변할 것이다. 거기에 이의가 있는 자는 당장 이 자리를 떠나도 좋다.” 에트는 마치 신상 앞에 서서 신자들을 향해 파리스의 교의를 설교하듯 천천히, 그러나 박력 넘치는 목소리로 선언했다. 잠시 기다렸지만, 떠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5권 / 제2장 - 밸리스의 신관왕」중에서
판은 잠시 슬레인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런 다음 레오나에게로 걸어갔다. “자, 폐하. 시작할까요?” 그러지, 레오나가 끄덕였다. “왕이 되기를 선택한 남자와 그러지 않은 남자가 함께 손잡고 싸우는 건가.” 레오나가 작게 미소 지으며 판에게 악수를 청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힘껏 맞잡았다.
---「5권 / 에필로그」중에서
“마신 역시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기지 않았습니까.” 니스는 남은 힘을 다 짜내어 프레베의 손을 맞잡았다. “칼라의 말이 아니더라도 정말 귀찮은 일이야. 더구나 이번에는 벨드도, 후안도 없고 자네마저도 떠나게 되었으니 …….” “대신 새로운 용자들이 일어서겠지요. 저는 로도스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고난과 재앙이 닥쳐와도 로도스 사람들은 반드시 승리합니다. 저는 그걸 확신하고 있습니다.” 니스는 모든 힘을 다 써버린 듯 천천히 숨을 내쉬고는, 프레베의 부축을 받아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6권 / 프롤로그」중에서
“견습기사 스파크에게 명한다.” 카슈는 느닷없이 그렇게 말을 꺼냈다. “하나는 밸리스 국왕에게 친서를 전할 것. 또 하나는 남쪽 가도로 도망쳤으리라 예상되는 도적을 추적하여 빼앗긴 보물을 탈환할 것.” 스파크는 믿을 수 없는 말을 들었다. 강등을 각오하고 있던 차에, 설마 징벌도 없이 국왕으로부터 임무를 부여받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것도 자신이 원했던 일이라니.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6권 / 제2장 - 도둑맞은 제기」중에서
잠시 후에 일곱 개의 그림자가 검은 벽과 같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맨 마지막까지 보였던 것은 일행에게서 조금 떨어져 걷는, 몸집이 작은 하얀 로브의 그림자였다.
---「6권 / 제2장 - 도둑맞은 제기」중에서
“또, 지키지 못했어…… .” 블레이드에서는 혼의 수정구, 로이드에서는 생명의 지팡이, 그리고 이곳 카논 땅에서는 리틀 니스. 사신을 부활시키는 두 개의 열쇠와 하나의 문을 모두 눈앞에서 빼앗겼다. 블레이드에서 공을 탐하지 않았더라면, 로이드에서 왕국의 체면을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아까 전에는 조금만 더 빨리 움직였더라면……. 후회가 파도처럼 몇 겹으로 밀려와 스파크의 온몸에서 힘을 휩쓸어 간다.
---「7권 / 제7장 - 결전 전야」중에서
카슈는 잠시 동안 환호성을 듣고 있다가, 위엄이 깃든 태도로 오른손을 들어 군중을 진정시켰다. “나는 바로 전에 이 전쟁이 로도스 사람들 모두의 승리라고 말했다. 그 말에는 거짓이 없다. 그러나 감히 한 기사의 이름만큼은 찬양하게 해주길 바란다. 이 기사는 밸리스에서 태어나 알라니아에서 자랐다. 플레임의 용병이었던 적도 있고, 모스 왕국의 통일과 카논의 해방에 협력하기도 했다. 그 기사는 우리 왕국들의 국왕이 아니라 로도스의 평화를 위해 그의 검을 바쳤다. 물론 여러분도 그 이름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위대한 용자, 자유기사 판을. 나는 여러 왕국의 왕들을 대표해 그에게 하나의 칭호를 부여하고자 한다. 로도스의 기사라는 칭호를!”
---「7권 / 최종장 - 로도스의 성기사」중에서
“당신이 말한 대로 인간은 자주 실수하곤 해. 하지만 잘못을 인정하면 곧 올바른 길로 나아가. 그걸 위해 일을 어렵게 꾸밀 필요는 없어. 저들은 아주 작은 계기만 있으면 그것만으로 마음을 바꿀 수 있어. 지금은 판을 구하겠다는 마음이 저들의 생각을 바꾼 거야.” “그런 작은 것으로 생각을 바꿀 수 있다고?” “그게 바로 인간의 훌륭한 점이거든. 저들은 계속해서 변해가. 성장해가는 거야. 때로는 개개인, 어쩔 땐 종족 전체가 퇴보하는 순간도 오겠지. 하지만 언젠가는 분명 우리를 뛰어넘는 존재가 될 거야.”
---「외전 하이엘프의 숲 / 요정계에서 온 여행자」중에서
복수는 인간을 움직이는 가장 강한 충동이 될 수 있다. 복수를 맹세한 자는 목표를 위해 무서울 정도의 행동력과 지구력을 발휘한다. 온갖 고통을 견디고 어떤 수단이라도 정당화해가면서 표적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복수에 성공하는 순간 최고의 성취감을 맛본다. 그러나 그 성취감에서 눈을 뜨면 자기 앞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현실을 곧 깨닫는다. 복수는 어떠한 것도 생산해내지 못하며 무엇으로도 이어지지 않는다.
---「외전 하이엘프의 숲 / - 복수의 안개」중에서
“그렇지만, 절망하기 위해 가는 건 아니야. 나는 내 진실을 찾을 생각이야. 에스타스와는 다른 진실을……. 아니, 어쩌면 같은 진실일지도 몰라. 하지만 비록 같은 진실이라도 받아들이는 건 저마다 다르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나는 에스타스와 다른 답을 찾아낼지도 모르잖아. 숲 밖의 세계에서 말이야.”
---「외전 하이엘프의 숲 / 돌아오지 않는 숲의 요정」중에서
“검을 들어라! 아슈람!” 벨드가 부르짖었다. “숨이 붙어 있는 한 싸워라! 두 번 다시 지지 말란 말이다! 이겨라! 이겨야만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 너에겐 희망조차 없단 말이냐!”
---「외전 흑의의 기사 / 암흑의 패자」중에서
바르바스는 결단을 재촉했다. 백성을 구하기 위해 육체를 내놓을 것인가, 말 것인가. 아슈람은 이미 마음을 정한 상태였다. 바르바스가 어떤 존재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구할 수 있다면 육체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것은 왕의 책무였다.
---「외전 흑의의 기사 / 상륙」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