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에게 산초가 있고, 산초에게는 루시오가 있듯, 나에게도 지푸라기 당나귀가 있다. 그것이 나를 보호하리라.
--- p.26
나는 궁극적으로 무엇이 되고 싶었던 걸까. 셰프님인가 사장님인가 작가 셰프인가 셰프 작가인가 업주님인가. 멋지고 근사하기만 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건 내가 지금 어떤 피를 흘리고 있는 중이라는 것.
--- p.42
내가 입고 잔 앞치마는 어떤 복장이 아니라, 긴장한 내 몸의 일부였다.
--- p.44
그냥 그러고 싶었다. 소설가적 상상력으로 그의 인생을 가늠해보거나 드라마틱하게 각색하지 않고, 그냥 담벼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노인의 칼 가는 소리를 듣고 싶었다.
--- p.51~52
하몽 자르는 법도 배웠다. 하몽 기술자는 하몽에 칼을 꽂아 넣기 전에, 그 흑돼지가 살았던 평야와 도토리나무를 먼저 보여주었고, 하몽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꽤 긴 시간을 들여 설명했다. (…) 그 자부심. 이것이 바로 도토리고 바람이고 바다고 들판이라는 선언. 껍데기를 벗겨내고 복숭앗빛의 지방을 매만지고, 한 장 한 장 얇게 살을 발라내는 동안, 결과 무늬와 감촉과 향에 대한 긴 설명을 하는 그는, 어쩐지 엄숙하고 어쩐지 경건했다.
--- p.55
하몽 칼은 칼의 위엄을 넘어서 어떤 우아함까지 가지고 있다. 길고 가늘고 위태로운, 날렵한 아름다움.
--- p.57
기회와 선택에 대해 생각한다. 기회와 선택은 대단한 성공이나 출세나 특별한 변화의 순간에만 있는 게 아니다. 궁지에 몰렸을 때 빠져나갈 수 있는 기회와 선택. 그건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이므로.
--- p.69
글을 쓰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글이 주는 힘에 대해서도. 내 어깨를 두드려준 누군가의 편지를 생각했다. 내가 계속 소설을 써야 하는 이유를 일깨워준 사람들.
--- p.74
소설이란 것은 세상에 토해놓는 토사물이 아니라, 세상을 먹고 제 몸에서 소화시킨 다음 가까스로 싸놓은 똥 덩어리여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 p.90~91
아무 생각 없이 써온 이 문장들에는 확실히 입장과 위치가 내포되어 있다.
--- p.101
언제나 감사한 마음으로 최대한 예의를 갖춰 대해야 한다. 먹거리 이전에 한 생명체였으므로.
--- p.109
멸치를 기다리는 일은 그런 것 같다. 더 이상 맛볼 수 없는 맛과, 꼭 한번 다시 보고 싶은 맛을, 어떻게든 기억해내는 일. 그러면서 침샘을 여는 일. 멸치 비린내가 진동하겠구나. 그 비린내 속에서 행복하겠구나. 미리미리 즐거워하는 일.
--- p.115
홍원항에서 갑오징어가 올라오는 날은, 사랑해와 미안해 사이에서, 단맛과 쓴맛 사이에서, 왔다리 갔다리 오고 가고 돌아가고 멈춰 서는 날. 영원히 첫사랑의 날.
--- p.120
아스파라거스는 연필 두께 정도에 진한 초록색이었다. 쌉싸름하면서 고소했다. 눈물 나게 맛있는 맛이었다. 정말 눈물이 핑 돌았다. 오늘 아침에 산에서 꺾어오셨단 말이지 하다가, 어느 숲에서 고사리를 꺾던 엄마 모습이 떠올랐고, 그 고사리를 널어 말리던 손길의 나긋함이 그리워졌고, 고사리에서 두릅으로 원추리로 오가피로, 따사로운 햇살을 등지고 무언가를 툭툭 끊어 바구니에 담는 어느 봄날의 풍경이 휙 지나가면서, 당장 엄마 목소리를 듣지 않으면 죽을 것처럼, 엄마가 그리워졌다.
--- p.123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내가 짜장면을 사랑하는 방법이었던 것 같다. 온몸으로 먹어주기. 지금도 그렇다. 사랑하는 건 온몸으로 먹어줘야 한다. 그게 뭐든. 후루룩 쩝쩝.
--- p.156
나는 종종, 어쩌다 소설을 쓰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면, 오래전 먹었던 미순 언니의 계란프라이의 맛을 떠올리곤 한다. 그 맛을 기억하기 위해, 그 복잡한 맛의 비밀에 닿기 위해, 소설이라는 다른 도구를 선택한 것이라고. 또 어쩌다 식당을 차렸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에는, 그저 누군가에게 밥을 해 먹이고 싶다거나, 다른 근육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답하곤 했다.
--- p.176
이것이 마지막이구나. 이제 더 이상 이런 식탁은 차릴 수 없겠구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차리는 식탁. 겨우 음식을 차린 대가로 들을 수 있었던 거대한 감사 인사. 그와 더불어 듣게 되었던 수많은 사연들. 오늘 내가 소진한 것은 냉장고에 든 음식 재료들이 아니었구나. 어떤 기회, 어떤 위안, 어떤 고마움, 어떤 감동. 내가 닫는 것은 그저 식당 문이 아니었구나. 하나의 세상, 그 세상을 향해 열려 있던 어떤 문이었구나.
--- p.184~185
사랑받았죠. 맞아요, 사랑받았어요. 무대가 그런 역할을 해요. 회복이나 치료. 인간에 대한 온도가 높아지는 것 같고, 치료받은 것 같고, 그래서 회복한 것 같고.
--- p.209~210
그렇지 배우는 사랑을 먹고 살지. 무대의 사랑, 관객의 사랑, 연출의 사랑, 자기 자신을 향한 사랑.
--- p.210
세상은 더 완벽할 때까지 기다리다가는 아무것도 안 돼. 완벽주의자들은 머릿속으로 완벽한 계획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다가 결국 아무것도 못 이루거든. 불완전한 대로 실행에 옮기고 해가면서 또 고치고, 세상은 그런 사람들에 의해 돌아가는 거야.
--- p.223
삶이란 게 뭘까. 무슨 의미가 있어서 삶은 계속되는 걸까. 내가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이거야. 반짝이는 순간들이 너무 예뻐서 그걸 보려고 이어지는 거라고.
--- p.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