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9년 10월 28일 |
---|---|
쪽수, 무게, 크기 | 392쪽 | 455g | 132*225*20mm |
ISBN13 | 9788937479793 |
ISBN10 | 8937479796 |
발행일 | 2019년 10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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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92쪽 | 455g | 132*225*20mm |
ISBN13 | 9788937479793 |
ISBN10 | 8937479796 |
1. 나는 죽은 몸 2. 내 이름은 카라 3. 나는 개입니다 4. 나를 살인자라고 부를 것이다 5. 나는 여러분의 에니시테요 6. 나는 오르한 7. 내 이름은 카라 8. 저는 에스테르랍니다 9. 나는, 셰큐레 10. 저는 한 그루 나무입니다 11. 내 이름은 카라 12. 나를 나비라 부른다 13. 나를 황새라 부른다 14. 나를올리브라 부른다 15. 저는 에스테르랍니다 16. 나는, 셰큐레 17. 나는 여러분의 에니시테요 18. 나를 살인자라고 부를 것이다 19. 저는 금화올시다 20. 내 이름은 카라 21. 나는 여러분의 에니시테요 22. 내 이름은 카라 23. 나를 살인자라고 부를 것이다 24. 나는 죽음이다 25. 저는 에스테르랍니다 26. 나는, 셰큐레 27. 내 이름은 카라 28. 나를 살인자라고 부를 것이다 29. 나는 여러분의 에니시테요 30. 나는, 셰큐레 31. 내 이름은 빨강 32. 나는, 셰큐레 33. 내 이름은 카라 |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다가 "낮에 잃은 것을 밤이여 돌려다오"라는 문장에 밑줄을 쳤다. 종일 찌들어 퇴근하고 이 문장을 노트에 적었다. 하지만 다음 문장은 오리무중이다. 오늘 무수한 것들을 스쳤는데 뭐 하나 제대로 생각나지 않는다. 동료들과 술 한잔을 걸치고 헤어졌지만 찜찜한 마음이 든다. 응어리진 뭔가가 있어도 숙취와 함께 사라졌다. 숙취야 내일 아침이면 미역국에 풀릴 테지만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쩌면 난 형체 없이 떠다니는 상념을 보려고 글을 쓰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도 늦은 밤에 낮에 잃은 것들을 끄집어내서 들여다본다.
글을 쓸 때 언어의 한계를 절감한다. 그래서 자주 허공을 응시하고 허벅지를 긁는다. 생각을 말로 표현하기가 버거워 부산스럽다. 볼품없는 문장을 적으면 절로 무력감이 든다. 하지만 뭐라도 써야 불안이 사그라지니 어쩔 수 없다. 부단한 성격은 쓸데없이 문장을 늘어뜨린다. 갈팡질팡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리고, 그러하여, 그런데도'를 남발하면서라도 어찌할 바를 적어나간다. 삽질에도 근력이 붙는지 한결 수월한 기분에 휩싸인다.
늘 어떤 책을 읽을지 고민한다. 어렵사리 책을 펴도 귀가 팔딱거리며 또 읽고 싶은 책이 생긴다. 요즘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을 읽는데 그새를 못 참고 인터넷 서핑을 하다 신간 몇 권을 더 주문했다. 좀처럼 책장이 넘어가지 않으니 요령부득하다. 어머니는 분명 책에는 돈을 아끼지 말라고 하셨는데, 요즘엔 책도 다 돈이라며 호통을 치신다. 뭐든 정도껏 해야 욕을 면한다. 다행히 오르한 파묵이 쓴 문장은 유려해서 잘 읽힌다. 근데 난 그걸 받아먹지 못해 다 흘린다. 되돌아가 살펴보지만, 의미가 혼비백산 흩어진다. 주위가 어수선해서 그런가. 문장을 붙들지 못하고 스쳐 지난다. 딴생각하느라 시간이 속절없이 지났다. 이제 자야 할 시간이다. 어렸을 적에도 그랬다. 난 꽤 열심히 아동문학 전집을 읽었는데 하나도 기억에 남지 않았다. 선천적으로 머리가 나빠서인지, 대충 읽는 게 습관이 돼서 그런지는 몰라도 수십 권도 넘게 사들인 계몽사 아동 문고는 흔적조차 남지 않아서 거금을 들여 방문 판매 서적을 구매한 어머니를 아연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난 조바심 내지 않고 다시 문장을 붙든다. 비록 기억에 없더라도 내 세포 어딘가에 새겨지리라 믿어버린다. 내내 잠복해있다가 어떤 위기가 닥치면 날 구원해주겠지. 그렇게 믿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
오래전 쓴 글을 읽으면 생경한 느낌이 든다. 어쩐지 내가 쓴 글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내용이 한가득하다. 현실의 나완 묘하게 다른 누군가가 우두커니 서 있다. '당신 누구시오.' 물어봐도 딴소리만 한다. 그건 마치 원근법을 무시한 그림처럼 시각 너머의 관념에 가깝다. 앙리 마티스의 그림처럼 색만 휘황하지 현실감이 없다. 어쩌면 글에는 내가 바라는 이상향과 애써 보이고 싶지 않은 내가 담겨서 왜곡되는지도 모른다. 마치 인스타그램에 담긴 나처럼 현실과 거리를 둔 이미지만 남을지도. <내 이름은 빨강>에서 등장하는 살인사건도 이런 갈등에서 시작되었다.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유럽식 화풍이 오스만 튀르크 말기의 이스탄불에 스며들고, 기존 이슬람 전통 화가들은 생계가 위태로워진다. 결정적으로 술탄이 유럽식 화풍을 적극 지지 하면서 갈등이 고조된다. 변화하려는 자와 지키는 자가 맞부닥쳐 갈등이 벌어지는 양상은 흔하다. 하지만 그 갈등이 예술과 종교로 번지면 문제는 복잡해진다. 이슬람 화가들은 눈에 보이는 걸 그대로 그리지 않는다. 그들이 믿는 신은 현실과 달리 전지적이라 그런 수고로움이 필요 없다. 금을 덧씌우고 색을 찬란하게 그리는 데 공을 들여도 그깟 원근법 따윈 무시한다. 신은 저 높은 바벨탑 꼭대기에서 우릴 굽어보는데 원근법 따위를 따질 리가 없다. 쪼그마한 인간은 길바닥의 모래처럼 구분할 수 없다는 식이다. 고작 인간 따위가 보는 방식을 이슬람 화가에게 적용하라는 건 신성모독이라고 주장한다.
난 통념에 세차게 휘둘리는 사람으로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겠다는 예술가의 욕망을 이해하지 못한다. 세상을 내키는 대로 그려내고 그걸 믿어버리는 방식을 더 선호한다. 그런 사람이다. 소설에서 카라라는 잘생긴 청년이 나오는데 그는 유부녀이자 어릴 적부터 짝사랑한 한 여자를 사랑한다. 남이 보기엔 그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말한다. '이 세상에 하나뿐인 아름다움을 가진 여인이여.' 주변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랑에 투신한다. 사랑에 빠진 남자에게 그녀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가까이 있다. 온통 그녀가 아른거리는데 원근법 따위 따질 리 없다.
오늘은 <내 이름은 빨강>이 사라지기 전에 글로 남겼다. 생각을 곱씹어도 별것 없지만, 좋으면 좋은 대로 별로면 별로인 그 자체로 정확한 감각을 적었다. 상상의 발로가 글에 드러나 누추한 현실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기를 바랄 뿐이다. 역시 소설 얘기는 않고 실컷 딴소리만 늘어놨다. 늘어놓은 문장을 읽어보니 평소 의식하지 못했던 생경한 내가 얼핏 보인다. 도시를 에워싼 무수한 사람 중 하나가 아니라, 홀로 들판을 걷는 비루한 내 뒷모습이 보인다. 조심스럽게 카라의 뒤를 쫓아 세큐레의 청순한 얼굴을 훔쳐봤다. 이 글은 의심의 여지 없이 오르한 파묵을 읽는 일상구간에 쓴 글이다.
내 이름은 빨강/ 오르한 파묵/ 1998
16세기 말 이스탄불의 갈등
1
제목의 ‘빨강’은 전통(혹은 인습)에 항거하는 새로운(혹은 불온한) 생각의 상징? 아니면 정반대로 서양화풍에 대항하여 세밀화의 전통을 지키려는 열정? 살인을 상징하는 색이기도 하고, 세밀화에 자주 등장하는 색, 빨강이기도 하다. 만약 ‘내 이름은 빨강’이란 말이 살인자인 올리브의 고백이라고 가정한다면, 이 빨강은 세밀화에 대한 애정인 동시에, 새로운 베네치아 화풍에 대한 동경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2.에서 밝혀본다. 결국 빨강은 동양과 서양,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전통과 새로움의 갈등을 상징하는 색이라고 하겠다. 그것은 16세기 말 오스만 제국의 이스탄불이 겪은 갈등이기도 하다.
2
살인자는 올리브였다. 그는 엘레강스를 죽였다. 에니시테와 함께 하는 새로운 그림에 대해 엘레강스가 반대하기 때문이다. 또 올리브는 에니시테까지 죽였다. 세밀화에 대한 애착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에니시테는 술탄과 비밀스럽게 서양화풍으로 화집을 만들고 있었다. 그럼 도대체 올리브는 어느 입장인가? 그는 어느 입장도 아니다. 그는 베네치아 화풍과 세밀화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였다기보다는 이 소설의 또 다른 축을 이루고 있는 ‘예술가로서의 삶’과 관련하여 고민하고 행동했다고 하겠다. 즉 ‘스타일과 서명’이라는 말로 대변되는 예술 외적 요소에 매달린 자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3
반면에 ‘예술가로서의 삶’을 대변하는 인물 중 화원장 오스만이 있다. 그는 전통 세밀화의 정신을 지키려고 고집하다가 급기야는 바늘로 자신의 눈까지 찌른다. 이는 예술지상주의의 모습이다. 나는 이렇게 형상화된 모습을 많은 우리 문학에서 보아왔다. 특히 김동리의 소설들. <서편제>도 마찬가지다. 서구인들이 아무리 소리가 위대하다기로서니 딸의 눈을 멀게 한 아버지의 패륜적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서 <서편제> 영화를 보고 구토를 일으켰다. 나도 그렇다. 이런 종류의 미친 예술은 싫다. 작가가 오스만을, 예술지상주의를 옹호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예술에 대한 중독적인 사랑이 존재함을, 그리고 그것이 인류 문화에 중요한 동력이 된 것임을 부인하지 않고 있다.
4
이 소설에서 가장 특이하고도 신경이 쓰이는 것은 시점을 옮겨 가며 서술하는 방식이다. 이 독특한 시도의 득과 실은 무엇인가
[得] 시점의 이동은 마치 홍상수 감독의 영화 <오! 수정>처럼 흥미롭다. 살아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이미 죽은 사람, 사물까지 자신을 말하게 한다. 이는 전통적 소설 내레이션의 지루함을 날려버린다.
[失] 주의 산만하고 긴장감이 박탈된다. 작가의 편의주의적 발상이 아닌가? 이렇게 하면 너무 쉽게 쓸 것 같다.
1인칭 시점, 3인칭 관찰자 시점, 전지적 작가 시점 중 그 무엇도 아니다. 전지적인 작가라면 모든 인물의 운명을 손아귀에 넣고 있다. 하지만 1인칭 시점을 취할 수는 없다. 왜냐 하면 1인칭 화자 '나'는 다른 인물에 대해서는 모르기(관찰할 수만 있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1인칭 시점으로 카라와 셰큐레의 생각을 각각 전하는 장면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화자 '나'로서의 카라와 셰큐레가 아니다. 작가가 살짝 가면을 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카라와 셰큐레는 각각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 전지자로서의 작가는 알고 있다./ 나. 1인칭 서술자로서의 작가는 모른다.] 이는 모순이다. 도대체 전지적인 작가가 각각의 인물로 화하여 1인칭 서술자가 될 수 있다는 발상은 새로움의 상쾌함보다는 너무 제 맘대로 해버린 불쾌함이 있다.
5
이스탄불이라는 도시.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이스탄불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도시. 각각의 이름이 역사 속에서 기나긴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도시. 동서양의 만남(혹은 갈등)이 이루어진 도시. 이 도시에서 동서양이 융합할 수 있었던 것은 오스만투르크의 관용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이슬람은 기독교보다 인자했다. 이 소설은 오스만투르크라는 생소한 나라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용어들에 대해 공부하게 된다. 샤와 칸과 술탄과 칼리프는 어떻게 다른가? 모두 지배자를 일컫는데 민족에 따라 달리 부른 결과이다. 페르시아는 샤, 몽골은 칸, 투르크는 술탄이라 불렀다. 칼리프는 아랍 쪽 용어다.
6
이슬람 세밀화는 어떤 것인가? 유행은 돌고 돈다. 장식적이고 평면적 구성. 분할된 화면에 각각 독립적인 개체들. 서양미술사에서 르네상스(소설에서는 베네치아 화가들로 나타난다)와 고전주의 시대에 우리는 원근법을 강조하고 입체감을 돋우는 것이 최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상주의에 와서는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고, 세잔이나 고갱과 고흐에 와서는 아예 무시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무엇이 최상의 태도란 말인가? 그저 흘러갈 뿐이다. 돌고 돌 뿐이다.
7
이 소설은 2006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어떤 점에서? 추측건대, 노벨문학상의 수상 범주를 제3세계 문학으로까지 눈을 돌리려는 노력의 일환이리라. 아니 정치적으로 이해하지 말고, 좀 더 이 작품 자체에 천착해 보자.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가치는?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실은 노벨상 이전에 이미 유럽의 권위 있는 문학상을 수상하였으니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가치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다만 내가 제대로 잡아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 아닌가
사랑이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걸까요, 아니면 바보들만 사랑에 빠지는 걸까요? 저는 오래전부터 방물장수 겸 중매쟁이 노릇을 해 왔지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서로 불이 붙을수록 더 영리해지고 약아지며 지능적으로 술수를 쓰는 연인들 중에서도 특히 남자 쪽이 저는 아주 궁금하답니다.
이 구절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뒤를 돌아볼 수 있는 좋은 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