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1년 03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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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270쪽 | 382g | 133*225*20mm |
ISBN13 | 9788937443848 |
ISBN10 | 8937443848 |
[2023 베스트] 페이퍼 인센스, 다이어리, 캘린더 (국내도서 3만원↑, 포인트 차감)
발행일 | 2011년 03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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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270쪽 | 382g | 133*225*20mm |
ISBN13 | 9788937443848 |
ISBN10 | 8937443848 |
이방인 1부 2부 『이방인』에 대한 편지 - 알베르 카뮈 미국판 서문 - 알베르 카뮈 『이방인』을 다시 읽는다 - 로제키요 작품해설 - 김화영 작가연보 |
136페이지 밖에 안 되는 분량의 소설이 현재까지 사랑 받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물론 소설을 읽자 마자 느낌이 팍 왔던 것은 아니고, 카뮈의 사상이나 철학 내지는 많은 해설서를 통해서 본질을 조금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 책을 재미있게 읽기 위해서는 실존주의라는 철학적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이 좋다. 실존주의에 대해 자세하게 알면 더 좋겠지만, 기본적인 개념 정도만 알아도 주인공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개인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실존주의는 첫째 인간의 삶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것이다. 즉, 타인이나 사물에 구애 받지 않고 지독할 정도로 솔직한 상태(아마 제도권에 있는 사람들이 생각하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정도)를 말한다. 둘째 낙천적이고 긍정적이고 반 허무적인 철학이다. (역시 정신 나간 사람처럼 모든 환경에 적응을 잘 한다. 주인공 뫼르소처럼) 마지막으로 인간존재가 본질적으로 무의미하고 불합리 하지만 성실하고 가치 있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충 이 정도 인식하고 책을 읽으면 뫼르소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맨 뒤 표지에 장폴 사르트르가 '이방인은 엄격한 질서를 갖춘 고전으로, 부조리에 관해서, 그리고 부조리에 맞서 쓰인 책이다.'라고 평을 해 놓았다. 알고 보니 사르트르 역시 실존주의자로 '인간에게 본질은 없다.'를 주장 하였다. 본질이 없다는 것은 정해진 틀이 없다는 말로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선택에 직면하고 그 선택을 함에 따라 우리의 삶이 만들어져 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 선택이 옳던 그렇지 않던 선택한 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주인공 뫼르소는 북아프리카의 알제에 사는 평범한 하급 샐러리맨인데, 양로원에서 죽은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다음날, 해수욕장에 가서 여자 친구 마리와 해수욕을 즐기고, 희극 영화를 보면서 웃고, 밤에는 마리와 정사를 가진다. 그러던 중 같은 아파트에 사는 레이몽과 정부 사이에 문제가 있어 오빠가 개입하였는데 오빠를 패고, 그 오빠가 친구들을 불러 싸움이 나고 레이몽이 다쳤는데 뫼르소는 자신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아라비아 인을 권총으로 살해한다. 이후 4발을 더 쏜다. 왜 그런지 이유를 모르겠다.
아라비아인을 살해 것으로 재판에 회부되어 살해 동기를 묻자 '바닷가의 여름 태양이 너무 눈부셔서 죽였다고 대답하며, 죄의식도 없고 기도도 거부하며, 현재 생활에 행복을 느끼며 처형되는 날은 많은 군중이 밀려왔으면 하는 기대로 이야기가 종료 된다.
법이란 최소한으로 인간의 행동을 제약하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많은 이들은 이를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언제나 또는 누구한테나 그렇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 7번 방의 선물에 나오는 용구나 변호인에 나오는 부림사건, 또는 주인공 뫼르소처럼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법이 최악이 되어 버리기도 한다. 이렇게 되는 이유도 많다.
가장 심한 경우는 변호인에 나오는 부림사건이나 이번에 발표된 서울 시청 공무원 간첩 사건처럼 국가가 개입하여 사건을 조작하는 것이다. 당사자들은 얼마나 억울할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국가는 미개한 국가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도 하루 빨리 여기서 빠져 나가야 할 텐데 여전히 오리무중이니 걱정이다.
다음은 권력이 개입하는 사건이다. 7번 방의 선물처럼 경찰청장이 직접 나서서 조작하면 국가가 조작하는 것 보다는 낮은 단계이긴 하지만 곤란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나라는 부패가 심하다는 증거이다. 공무원이란 국민 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봉사해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자기네가 집행관이라 되는 것 마냥.......
다음은 언론이 특종을 노리고 조작하는 경우이다. 어쩌면 주인공 뫼르소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슈 사건이 꼴랑 2건 밖에 없는데 그 중에 주인공의 사건을 연재하며 조작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상대방이나 내가 조작하는 경우다. 이런 경우를 우리는 분쟁이라고 한다. 이것은 법에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 돈이 많은 사람이 대부분 이기긴 하지만........
이런 사실을 종합해 보면 이 땅에 정의란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알지 말아야 할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곤란함을 겪듯 사회를 알면 알아 갈수록 부조리 투성이다. 서로가 상대방을 돕고 배려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종족이나 세대를 떠나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가치관은 공유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알베르 카뮈를 대표하는 작품이 바로 『이방인』이다. 거기에 역자가 한국어가 갖는 아름다움을 기반으로 지중해의 찬란한 풍광을 표현해 낸 《행복의 충격》의 저자 김화영이다. 많은 역서 중에 이 책을 선택한 이유이다. 『이방인』은 분량이 많지 않은 작품이다. 이런 작품이 실린 책들이 의례 그렇듯이 이 책도 말미에 작품에 대한 비평가들의 해석과 논문, 역자의 감상을 담았다. 헌데 개인적으론 이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문학고전은 읽는 이에 따라 작품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고, 개인이 살아왔던 삶과 가치관이 그 작품에 투영되어 옳던 그르던 자신만의 해석으로 자신만의 고전을 만나는 것이 상례인데, 작품의 말미에 여러 비평가나 역자들의 해석을 곁들이면 그들에게 덧씌워진 전문가라는 후광이 주는 아우라에 눌려 독자는 자신만의 생각을 접어버리기 십상이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된 작품은 살인을 저지르고 감옥에 갇혀 사형집행을 기다리는 주인공 뫼르소의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도록,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 뿐이었다”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과거의 죽음으로 시작된 작품은 곧 다가올 미래의 죽음으로 끝난다. 이 문장을 소재로 작품에 등장하는 세 개의 죽음(어머니, 아랍인, 뫼르소)을 통해 카뮈가 죽음에 대한 성찰을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이 비평가들의 평이다. 물론 사람은 죽는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의 묘사를 통해 보여준 형식적인 장례와 조그만 다툼이 빌미가 되어 총 맞아 죽은 아랍인도, 사형집행을 앞둔 뫼르소의 예정된 죽음을 통해 이 작품이 죽음을 가장 큰 소재로 삼고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런 비평가들의 해석을 뒤로 하고 나를 의아하게 만든 것은 마지막 문장의 바로 앞 구절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이다. 사형을 앞둔 사형수의 고백이다. 형 집행 전 마지막 기도를 해주기 위해 방문했던 신부를 내쫒고 난 이후 뫼르소가 독백처럼 되뇌었던 고백이다. 이게 이해가 되는가? 삶을 연장하기 위한 몸부림도 아니고, 사형을 앞둔 사형수의 체념도 아닌 이런 고백이 과연 어떤 의미일까? 마치 제대로 된 삶을 살다간 이가 죽음을 앞두고 다 이루었다고 고백하며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맞이하는 죽음의 모습이 아닌가. 삶을 마지막 순간 예정된 죽음을 앞두고 “행복하다” 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이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난 이 문장을 보면서 이 죽음이 내가 기억하는 누군가의 죽음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성경 속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죽음이다. 십자가에 매달려 모두의 원죄를 대신해 돌아가신 예수님의 죽음이 떠오른 것은 나만의 오지랖일까. 아니면 편견의 완성일까. “다 이루었다” 라는 마지막 말씀을 끝으로 죽음을 맞이한 예수님의 죽음과 이 작품 속 뫼르소의 죽음과의 차이를 나는 느끼지 못했다. 소설 속에 묘사된 뫼르소의 삶은 평이함 그 자체였다. 어머니의 죽음을 맞아 장례를 치루면서도 그는 울지 않았다. 그저 먼 여행에 밀려드는 피곤함을 주체하지 못하고, 어머니의 장례로 인해 마주친 낯선 이들과의 조우가 불러온 어색함만이 차고 넘친다. 장례를 치르고 일상으로 돌아온 그의 삶은 어제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식당에서 밥을 먹고, 수영하고, 여자 친구와 잠자리를 한다. 그저 매일 같은 일상이 이어질 뿐이다. 사랑하냐고 묻는 여자 친구의 질문에 사랑하지는 않지만 원하면 결혼할 수 있다고 말하는 뫼르소, 파리근무를 제안하는 상사의 요청에 변화를 바라지 않는다는 말로 거절하는 그, 그저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욕정을 느끼면 섹스하는 그의 삶은 어떤 욕심도 없다. 내일의 계획도 없다. 그 순간의 감정, 현재에 충실한 뿐이다. 하지만 그의 이런 삶은 살인을 저지른 죄인이 된 이후부터 타인들의 질타와 평가의 수단이 된다. 재판과정을 통해 그의 이런 행위가 타인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 드러난다. 어쩌면 그 타인은 우리 모두다. 한 개인의 삶을 그 자신이 아닌 우리의 시선으로 재단하고 평가하고 값을 매긴다. 살인이라는 하나의 결과를 놓고 전혀 연관성이 없는 이러한 모든 행위를 살인을 위한 당위성의 수단으로 몰아 부친다. 우린 나의 시선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마주하면 그 대상 자체를 외면하거나 격하시킨다. 우리의 시선으로 볼 때 그는 이방인이다. 이 작품을 마주하며 들었던 가장 큰 의문은 이 작품의 제목이다. 이방인. 일상적인 삶을 사는 우리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그는 우리의 통념에서 벗어난 이방인이다. 하지만 과연 그가 이방인일까. 어쩌며 진정한 삶의 모습은 그의 삶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순간의 삶에 충실한 삶, 그가 비록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고, 잠을 잤고, 커피도 마셨고, 담배도 피웠고, 장례를 치루고 난 바로 다음날부터 전혀 슬퍼하지도 않았고, 일상으로 돌아와 똑같은 삶을 사는 그의 모습은 우리네 시선으론 이질적이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도 애통함도 느끼지 않은 그의 모습을 형식을 중시하는 우리네 시선으로 보았을 때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행위를 이질적이라고 평가하는 우리의 시선은 그럼 올바른 것인가. 올바른 삶을 산다고 생각하는 우리는 사형을 앞둔 그와 같은 고백을 하지 못한다. 삶의 마지막에 뫼르소와 같은 고백을 하고 싶지만 우린 그런 고백을 할 만큼 삶을 살지 못한다. 그와 다른 삶.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고, 미래를 위해 현재를 바치는 삶.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기 보다는 타인의 시선과 타인의 평가에 의지하여 세상의 규범이라는 틀로 우리를 포장한 채 그 안에 잠든 생명체 고유의 감성을 억누르는 삶을 사는 우리네 삶의 모습은 이질적이 아닌 올바른 것인가. 난 그의 죽음 직전의 모습을 보며 예수님의 죽음을 떠올렸다고 했다. 예수님의 세상에 계시던 그 순간에 그 어느 누구도 살지 않았던 삶의 모습은 타인들에게는 이질적이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를 인정하지 못한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의 제물로 바쳤다. 그는 남들과 달랐다. 그건 다른 말로 하면 이방인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삶을 사는 이들을 우린 그렇게 한 단어로 퉁 친다. 그리곤 대중속에 나의 존재감을 묻어버리고 그 대중이라 부르는 대상들과 같은 삶의 형태를 오늘도 이어간다. 하지만 어쩌면 이 작품에서 말하는 이방인은 대중속에 갇힌 우리를 지칭하는 말은 아닐까. 대중이 가는 길이 아닌 자신만의 길을 가는 삶의 방식이 이방인이 아니라, 삶의 진정함을 느끼며 사는 삶, 삶의 순간순간이 주는 축복과 행복을 느끼는 삶, 미래를 위해 현재를 내던지지 않는 삶,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삶,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현재도 행복하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삶, 그런 삶을 살지 못하는 우리. 우리가 바로 이방인은 아닐까. 뫼르소의 머리 위에 내리비치던 그 햇빛만큼이나 찬란한 삶을 즐기지 못하는 바로 지금의 우리들 말이다.
드디어 까뮈를 만났다. 엄마의 간병이 예상보다 길어졌고 준비해온 책들은 이미 다 읽어버린 상태였다. 병원 근처 서점을 봐둔 터라 서점 이름을 검색 했더니 유서 깊고 유명한 서점이었다. 오직 책만 파는 서점, 2대에 걸쳐 운영하며 선친의 뜻을 그대로 이어가는 아들이 사장인 곳, 그래, 이런 서점에 가서 책을 사 주는 게 예의야, 하며 바람도 쐴겸 서점으로 달렸다. 얼마만인가 서점! 가기 전에 이미 문학을 고를 마음을 먹고 갔고 짐이 많아지는 것을 고려해 최대한 얇으면서 깊이 있는 책을 고르자는 기준을 정한 상태였다. 마침 눈에 띈 책, 누가 추천하는 책이라며 어느 코너에 표지 전면이 보이게 세워두었던 책. '김화영 옮김'을 보는 순간 주저없이 『이방인』을 집어 올렸다. 읽어야지 숙제처럼 남아있던 책이었고 적당히 어려울 것 같았고 무엇보다 얇았다. 기준에서 벗어나는 게 하나도 없는 책이었다. 그 옆에 세워 둔 장 그르니에의 '섬'도 만지작거렸지만 꾸욱 참고.
명작이라 불리는 문학 작품의 공통점은 독자인 내가 책 바깥에서 겉돌지 않고 이야기 속으로 흡수된다는 것이다. 활자를 읽는 것과 영상을 보는 것은 그 역동성에서 큰 차이가 있어 영상이 훨씬 각인의 강도가 세다. 그런 면을 감안했을 때 명작을 읽고 나면 마치 영화를 다보고 영화관을 나설 때 영화 속에 흡수된 정신과 몸을 꺼내는 데 시간이 좀 걸리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든다. 『이방인』도 마찬가지였다.
워낙 유명한 소설이라 대충 아는 서사라 혹시 재미없지 않을까 했는데, 나는 첫 문장부터 빠져들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한발씩 걸어가는 기분이다. 천천히 따박따박 규칙적으로 걷는 느낌. 조용한 걸음이다. 주변의 풍경이나 사람들에게 고개 돌리는 일 없이 어디론가 차분히 걸어가고 있는 글이다. 뫼르소가 보인 어머니 장례식장에서의 행동이 건조하긴 하다. 장례식에서 보일만한 모습은 아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게 어때서. 나중엔 장례식장에서의 뫼르소의 행동이 뫼르소가 유죄를 선고받는 데 왜 영향을 주는지 이해 불가다.
1부는 이야기 자체에 빠져든다. 말하기 좋아하지 않지만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사람. 뫼르소는 솔직하다. 생각대로 행동한다. 말한다. 예민하지 않다. 뭐, 그게 어때서? 하는 게 기본 태도다. 출세 욕심도 없고 열정적으로 살 생각도 없다. 적당히, 즐기면서, 무감하게 사는 사람이다. 1부를 읽을 땐 강렬한 태양빛에 잠시 실명한 기분이 들었다. 뫼르소가 살인을 했는데, 놀랍지 않다.
2부부터는 아! 이래서 카뮈카뮈 하는 구나 싶었다. 2부는 교도소에 갇힌 뫼르소의 관념들과 재판상황이 묘사된다. 2부는 죄다 필사하고 싶다. 인간의 본성을, 내면을 이렇게까지 파고들 수 있다니. 혹시 따라 적으면 내게도 카뮈스러운 감각이 생길 수 있을까? 아니 그런 건 감히 바라지도 않는다. 글자 하나하나 옮겨 적고 싶을 뿐. 나의 뇌 속에 문신처럼 새겨 넣고 싶다.
뫼르소는 살인 자체가 아닌 삶 전체를 심판 받는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남들이 나에게 가르쳐 주었을 뿐"(131쪽)이다. 뫼르소는 가정을 해본다. 여기서 나갈 수 있다면, 그런 가정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독약같은 기쁨의 물결이 가슴으로 복받쳐 올라"(122쪽)왔지만 곧 이 생각을 멈춘다. 의미 없기에. 그러나 온몸이 덜덜 떨린다라는 단조로운 표현은 뫼르소의 죽음에 대한 공포를 직선적으로 보여주었다. 사형장으로 끌려갈 아침은 언제인가. 뫼르소는 불분명한 것이 싫다.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생각지 못한 상황이 닥치는 것이 싫다. 제대로된 상상력을 발휘해본적이 없는 뫼르소이지만 죽음만큼은 아직도 낯설고 두렵다. 그의 독백들, 사제와의 대화들에서 서서히 그는 마음을 정리해간다. 죽음에 가까운 시간이 오자 엄마 생각이 자꾸 난다. 엄마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마음을 묘사한 글을 그대로 옮길까 한다.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기도 하다.
그가 나가 버린 뒤에, 나는 평정을 되찭았다. 나는 기진맥진해서 침상에 몸을 던졌다. 그러고는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눈을 뜨자 얼굴 위에 별이 보였으니 말이다. 들판의 소리들이 나에게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밤 냄새, 흙냄새, 소금 냄새가 관자놀이를 시원하게 해 주었다. 잠든 그 여름의 그 희한한 평화가 밀물처럼 내 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댇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기라 크게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와는 영원히 관계가 없어진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가 왜 한 생애가 다 끝나 갈 때 '약혼자'를 만들어 가졌는지, 왜 다시 시작해 보는 놀음을 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뭇 생명들이 꺼져가는 그 양로원 근처 거기에서도, 저녁은 서글픈 휴식 시간 같았었다.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시간 엄마는 거기서 해방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마음이 내켰을 것임이 틀림없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에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 주고 희망을 가시게 해주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그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외로움을 덜 느낄 수 있도록,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이 모여들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아, 더 이상 리뷰를 쓸 수 없다. 내가 소화하기엔 저작활동 자체가 힘든 작품인지도. 너무 훌륭한 글을 읽고 나면 한없이 쪼그라드는 자신을 어찌할 바 모르겠다. 무슨 말인진 알 것 같은데 '이런 말이야', 하며 적어내려갈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