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16년 06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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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32쪽 | 386g | 132*225*15mm |
ISBN13 | 9788937463433 |
ISBN10 | 8937463431 |
발행일 | 2016년 06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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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332쪽 | 386g | 132*225*15mm |
ISBN13 | 9788937463433 |
ISBN10 | 8937463431 |
부조리의 추론 부조리한 인간 부조리한 창조 시지프 신화 부록 ─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 속에 나타난 희망과 부조리 작품 해설 참고 문헌 작가 연보 |
뜨거운 뙤약볕에서 한 거인이 벌거벗은 몸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언덕 위로 돌을 굴리고 있다. 힘겹게 돌이 굴러 거의 정상에 다다를 무렵 거인의 몸에는 힘이 빠지고 돌을 잡은 손에는 힘이 빠진다. 돌은 다시금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그가 하루 종일 노력했던 모두 수고는 모두 무위로 돌아간다. 해가 져가는 저녁 거인은 힘없는 발걸음으로 터벅터벅 언덕을 내려온다. 그러나 거인의 발걸음은 좌절이나 포기의 발걸음이 아니다. 신들이 만들어낸 엉터리 운명을, 삶이 부당함을, 세계의 부조리함을 받아들이며, 다시금 내일을 기약하며 내려오는 걸음이다.
이것이 시지프 신화를 읽으면서 내가 떠오른 시지프의 이미지이다. 시지프신화는 20여년 전 처음 읽었다. 당시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었지만, 도대체 카뮈가 왜 어머니의 죽음 속에서도 웃었는지, 왜 햇살이 따스해서 살인을 했는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특히 카뮈가 이야기하는 부조리가 무엇인지를 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당시 육문사라는 출판사으 책으로 구입한 [시지프 신화]를 읽기 시작했다. 첫 문장부터 벽에 부딪혔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 문제에 답하는 것이다." (P15)
무언가 사람을 나른하고 지치게 만드는 이런 질문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책의 내용은 파악하기 힘들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읽은 [시지프]신화는 여전히 내게는 어려운 숙제였다. 그럼에도 이제는 카뮈가 이야기했던 그 '부조리'라는 것이 무엇인지가 조금은 느껴졌다.
그에게 부조리란 삶에 대한 당혹감이다. 우리는 당연히 내가 살고 있는 세상과 삶에 대해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있고, 내가 사는 목적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모든 것이 설명 불가능하고, 해석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세상과 내가 분리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카뮈에게 있어서 부조리란 세상과 삶에 대해 느끼는 당혹감이다.
"그렇다면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잠마저 이루지 못하게 하는 이 측량할 길 없는 감정은 도대제 무엇이란 말인가? 설사 시원찮은 이유를 대고서라도 설명할 수 있다면 그 세계는 낯익은 세계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돌연 환상과 빛을 박탈당한 세계에서 인간은 자신을 이방인으로 느낀다. 이 낯선 세계로의 유배에 구원은 없다. 그에게는 잃어버린 고향의 추억도 약속된 땅의 희망도 다 빼앗기고 없기 때문이다. 인간과 그의 삶, 배우와 무대장치의 절연(絶緣), 이것이 다름 아닌 부조리의 감정이다."(P 19)
결국 카뮈에게 있어서 세상의 부조리를 깨닫는다는 것은, 그리고 그로 인해 이방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익숙하고 당연시 여기는 세상이 어느 순간 낯설어졌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삶의 부조리에서 벗아날 수 없고, 시지프처럼 매일같이 부조리의 바위를 언덕 위로 올리는 일을 반복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책에서 카뮈는 이 부조리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스스로에 묻는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카뮈는 일단 삶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라고 말한다. 부조리는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설명하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부조리의 미로 속에 갇히게 된다. 단지 우리는 그 부조리를 묘사할 수 있을 뿐이다.
"묘사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부조리한 사고의 최종적 야망이다. 과혁 역시 그 역설들의 끝에 이르면 제안하기를 그치고 발을 먼춘 채 제 현상의 항상 새로운 풍경을 바라보고 묘사한다. 그처럼 우리는 세계의 모습들 앞에서 솟구치는 이 감동이 세계의 깊이에서가 아니라 그 다양성에서온다는 것을 마음으로 깨닫는다. 설명은 헛된 것이지만 감각은 없어지지 않고 남는다. 그 감각과 더불어 양적으로 무궁무진한 세계가 그칠 줄 모르고 우리를 부르는 것이다." (P 145)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는 시지프 신화를 통해 부조리한 운명에 맞서는 시지프의 모습을 묘사함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부조리한 삶을 살지를 이야기한다
"시지프가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저 산꼭대기에서 되돌아 내려올 때, 그 잠시의 휴지의 순간이다. 그토록 돌덩이에 바싹 닿은 채로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은 이미 돌 그 자체다! 나는 이 사람이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는 고뇌를 향해 다시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본다. 마치 호흡과도 같은 이 시간, 또한 불행처럼 어김없이 되찾아 오는 이 시간은 바로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르 ㄹ떠나 제신의 소굴을 향해 조금식 더 깊숙이 내려가는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강하다." (P182)
카뮈는 우리가 결고 부조리한 운명에 맞서 승리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 부조리에 맞서는 삶, 그것이 가치있고는 삶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삶은 부조리한 운명보다 강하다.
1957년 만 44세의 나이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젊은 작가가 있습니다. 최연소는 아니었지만, 노벨문학상이 작가의 생애를 고려하여 수상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나이는 매우 젊었습니다. 그만큼 이견의 여지가 없이 훌륭한 작품이었기 때문이겠죠. 그리고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게 해준 작품은 1942년 출간된 『이방인 L'Étranger』입니다. 네, 그 젊은 작가는 바로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입니다. 참고로 최연소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러디어드 키플링 Rudyard Kipling‘으로 그의 나이 만 42세에 수상하였고 그 유명한 『정글북 The Jungle Book』 작가입니다.
카뮈의 『이방인』은 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로 유명한 고전입니다. 게다가 두껍지도 않아서 많은 분이 읽어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카뮈의 『이방인』은 읽기는 쉬워도 이해하기는 참 어려운 작품입니다.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더더욱 공감하실 거로 생각합니다. 내용이 복잡할 것도 없음에도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기 때문이겠죠. ‘도대체 주인공은 왜?’라는 물음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죠. 그래서 더러는 『이방인』이 왜 유명하고 노벨문학상을 받기까지 한 것인지 도무지 이해 가지 않는다고 말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처음 『이방인』을 읽고 나서 ‘이게 왜?’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뭐지?’라는 생각은 했었죠. 이후 요모조모 뜯어 살펴보고 어렴풋하게나마 『이방인』에 감탄하기는 했지만 명확하게 콕 집어 ‘이거다!’라고 말하기엔 어려웠죠. 이번에 『이방인』 서평을 쓰기로 마음먹고 나서도 『이방인』을 좀 더 잘 이해하고 서평을 쓰고 싶었습니다. 스스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들을 그대로 남겨놓고 그냥 그럴듯하게 얕게 쓰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이방인』을 조금 더 심도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카뮈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카뮈는 아주 친절하게도(?) 『이방인』에 담긴 자기 생각을 글로 정리하였습니다. 바로 같은 해 출간한 『시지프 신화 Le Mythe de Sisyphe』입니다. 굳이 ‘친절하게도’라는 말 뒤에 ‘?’를 붙인 까닭이 궁금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이는 『시지프 신화』를 읽어보시면 아주 잘 이해가 가시리라 생각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시지프 신화』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죠. 『이방인』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기대감에 펼쳤던 『시지프 신화』를 읽으며 부족한 제 머리를 얼마나 나무랐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러 번 머리를 쥐어 싸매며 『시지프 신화』를 읽고 다시 『이방인』을 읽었을 때의 그 충격이란! 전에 쉽사리 이해 가지 않던 주인공 ‘뫼르소’의 행동과 생각이 이해가 가고, 감탄하며 『이방인』을 다시 읽었습니다. 실로 즐거운 경험이었어요. 그리고 카뮈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조금도 의구심을 품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 서평을 쓰기에 앞서서 『시지프 신화』를 먼저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제 능력이 닿는 데까지 최대한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해보려 해요. 『이방인』을 읽으려 하시는 혹은 이미 읽었던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혹여나 그럼에도 이해가 안 가신다면 글쓴이의 능력 부족이라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카뮈는 ‘부조리주의 Absurdism’의 대표 인물입니다. 카뮈의 사상을 ‘실존주의 Existentialism'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정작 카뮈는 생전에 자신은 실존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했었죠. 그럼 도대체 ’부조리 Absurdity'가 뭘까요? 우리는 흔히 ‘부조리’라는 단어를 옳고 그른 판단에 관련해 사용하지만, 카뮈가 말하는 철학에서의 ‘부조리’는 의미가 다릅니다. 카뮈의 논지를 따라가며 부조리가 무엇인지 살펴볼까요
‘왜?’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습니다.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사는 거지?’ 반복되던 삶에 의문이 드는 순간, 참을 수 없는 권태가 느껴집니다. 삶의 의미에 대한 의구심이 솟아오르는 때, 비합리적인 세계와 합리적인 의식이 부딪힐 때 인간은 ‘부조리’를 마주합니다.
기이한 영혼의 상태, 즉 공허가 웅변적이 되고, 일상의 판에 박힌 행동을 이어 주던 끈이 툭 끊어지면서 마음이 그 끈을 다시 이어 줄 매듭을 찾으려 해도 헛일이 되는 그 기이한 상태
(부조리의 첫 징후)
그리하여 이 언덕들, 다사로운 하늘, 이 나무들의 윤곽이 지금까지 우리가 부여해 왔던 허망한 의미를 단숨에 잃어버리고서 이제부터는 잃어버린 낙원보다도 먼 존재로 변해 버리는 것이다.
삶의 무관심함, 비합리적인 세계를 마주할 때 인간은 부조리를 느낍니다. 부조리는 빠져나갈 길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희망도 없습니다. 인간 의식이 한계에 다다른 황량한 사막과도 같죠.
돌연 환상과 빛을 박탈당한 세계에서 인간은 자신을 이방인으로 느낀다. 이 낯선 세계로의 유배에는 구원이 없다. 그에게는 잃어버린 고향의 추억도 약속된 땅의 희망도 다 빼앗기고 없기 때문이다. 인간과 그의 삶, 배우와 무대 장치의 절연(絶緣), 이것이 다름 아닌 부조리의 감정이다.
부조리의 감정을 느낀 인간은 고민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삶에 어떤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삶을 마주한 부조리한 인간은 그럼에도 계속 살아가야 할까요? 아니면 살기를 멈추어야 할까요? 그래서 카뮈는 이렇게 말합니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을 살 만한 보람이 없기 때문에 자살한다는 것, 그것은 필경 하나의 진리다. 그러나 너무나 자명한 이치이기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진리다. 삶에 대한 이런 모욕, 삶을 수렁에 빠뜨리는 이런 부정(否定)은 과연 삶의 무의미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삶의 부조리는 과연 희망이라든가 자살 같은 길을 통해서 삶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요구하는 것일까
카뮈는 계속 나아갑니다. 부조리를 마주한 인간은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계속 살 것인가? 아니면 그만 살 것인가? 부조리는 정말 인간에게 자살을 권유하는 것일까
계속 산다고 하여도 어떤 희망도 없는 삶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누군가는 ‘신(神)’ 혹은 ‘종교’를 무의미의 대안으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 카뮈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카뮈는 그런 방식은 옳지 않다고 말하죠.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이 실제로 나의 척도를 초월한다는 한 가지 사실뿐이다. 나는 이 사실로부터 부정(否定)의 결론을 끌어내지는 않을지라도 적어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의 바탕 위에는 아무것도 세우고 싶지 않다.
부조리한 인간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삶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뿐입니다. 하지만 ‘신’ 혹은 ‘종교’의 도입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 낸 도구일 뿐이죠. 철학자 야스퍼스의 초월자 존재에 대한 추론에 카뮈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실패가 가능한 일체의 설명과 해명을 초월하여, 허무가 아닌 초월적인 존재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면 무엇인가?” 돌연히 그리고 인간적 믿음이라는 맹목적인 행위에 의해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 존재를 그는 “보편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의 상상할 수 없는 통일”이라고 정의한다. 이리하여 부조리는 신(神, 이 말의 가장 넓은 뜻에서)이 되고, 이해의 무능력 그 자체가 모든 것을 밝혀주는 존재로 돌변한다. 논리적인 차원에서 이런 추론을 성립시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이것을 비약이라고 이름 지을 수 있다.
그렇습니다. 카뮈는 위와 같은 야스퍼스의 추론을 비약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에 초월적인 존재(신)를 도입하는 것은 억지라고 말하는 것이죠. 그런 추론은 결국 부조리를 마주하기보다는 뛰어넘어버리는 것입니다. 카뮈는 부조리 자체를 통합하여 마치 부조리가 없는 것 혹은 설명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기보다는 일관된 자세로 반항하며 부조리에 대면하기를 요구합니다.
투쟁은 회피되었다. 인간은 부조리를 통합하고 그 합체(合體)에 의하여 대립, 분열, 절연(이혼)이라는 부조리의 근본적인 성격을 없애 버린다. 이러한 비약은 일종의 회피다.
카뮈는 부조리를 통합하거나 없애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답을 찾지 못한다고 답 자체를 없애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분명 생은 이해할 수 없지만 ‘생의 결론’이 그것에서 나올 수 있으므로 인간은 계속해서 부조리와 대면해야 합니다.
그래서 카뮈는 자살도 부조리에 대응하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먼저, 자살을 통한 부조리의 해소는 어떠한 정당성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죽음을 목도하지만 결코 누구도 진정 죽음을 경험할 수는 없기 때문이죠. 게다가 자살은 부조리를 끌어안고 없애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역시 대면 혹은 반항과는 거리가 있죠.
자살은 그 속에 동의(同意)의 의미가 전제되므로 반항과는 정반대다. 자살은 비약과 마찬가지로 한계점에 이르러서의 수용이다.
이해할 수 없는 생의 부조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회피이고 기만입니다. 그렇다고 절망하여 그로부터 탈출을 감행해서도 안 됩니다. 자살 역시 부조리에 대한 반항이 아니라 수용이니까요.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카뮈는 계속해서 부조리를 마주하고 반항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산다는 것은 곧 부조리를 살려 놓는 것이다. 부조리를 살린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부조리를 주시하는 것이다. 에우리디케의 경우와는 반대로, 부조리는 오직 우리가 그것을 주시하던 눈길을 딴 데로 돌릴 때 죽어 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유일하게 일관성 있는 철학적 태도는 곧 반항이다.
반항은 동경이 아니다. 반항에는 희망이 없다. 그 반항은 깔아뭉개려 드는 운명에 대한 확인 그러나 그에 따르기 마련인 체념을 거부하는 확인일 뿐이다.
부조리는 각 항의 대립에서 생겨납니다. 항의 대립이 사라지면 부조리도 사라지고 말죠. 하지만 부조리를 없애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부조리를 살리기 위해 그리고 반항하기 위해서는 부조리를 마주해야 합니다. 의식을 놓치지 말고 주시해야 합니다.
바닥없는 이 확실성 속으로 빠져드는 것, 이제부터 자신의 삶에 대해 스스로가 이방인임을 확실히 느낌으로써 그 삶을 확장시키고,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근시안이 되지 않고 삶을 관통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어떤 해방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이 새로운 독립은 모든 행동의 자유가 다 그렇듯이 기한부다. 그것은 영원을 담보로 한 수표를 끊지 않는다. 그러나 독립은 자유의 환상들을 대신한다.
부조리를 깨닫고 반항하는 인간은 자신의 삶에 어떤 의미를 설정하지 않습니다. 인생의 목표를 설정하는 것은 스스로 환상을 만들고 속박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카뮈는 말합니다. 비로소 부조리한 인간은 자신이 자유라고 믿어왔던 모든 환상의 제약으로부터 풀려나서 삶을 신이 아닌 인간의 영역으로 공고히 하고 희망 없는 진정한 자유를 성취합니다.
이제 결론입니다. 부조리를 깨달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자신의 삶, 반항, 자유를 느낀다는 것, 그것을 최대한 많이 느낀다는 것, 그것이 바로 사는 것이며 최대한 많이 사는 것이다.
이리하여 나는 부조리에서 세 가지 귀결을 이끌어 낸다. 그것은 바로 나의 반항, 나의 자유 그리고 나의 열정이다. 오직 의식의 활동을 통해 나는 죽음으로의 초대였던 것을 삶의 법칙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나는 자살을 거부한다. 살아가는 나날 동안 줄곧 끊이지 않고 따라다니며 둔탁하게 울리는 이 소리를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말을 오직 하나, 이 소리는 꼭 필요하다는 것뿐이다.
이제 지금까지 파악한 ‘부조리주의’를 가지고 ‘시지프 신화’를 바라봅니다. ‘시지프 신화’는 그 이름은 모를지언정 내용은 대부분 아실 거예요. ‘시지프’라는 인간이 신을 속인 죄로 돌을 산 정상까지 굴려 올려놓아야 하는 형벌을 받습니다. 하지만 돌은 정상에 도달하면 바로 바닥으로 다시 떨어지고, 시지프는 다시 내려가서 돌을 굴려야 하죠. 끝나지 않는 영원한 형벌입니다. 이에 대해 카뮈는 말합니다.
우리는 이미 시지프가 부조리한 영웅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그의 열정뿐 아니라 그의 고뇌로 인해 부조리한 영웅인 것이다. 신들에 대한 멸시, 죽음에 대한 증오 그리고 삶에 대한 열정은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는 일에 전 존재를 바쳐야하는 형용할 수 없는 형벌을 그에게 안겨 주었다. 이것이 이 땅에 대한 정열을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다.
시지프에게 내려진 형벌, 그의 행동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힘들게 돌을 굴려봐야 결국에는 떨어지고 다시 반복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 희망 없는 행위를 시지프는 계속합니다. 어떤 의미도 없는 일에 반항하며 자신의 모든 열정을 소진할 뿐입니다. 시지프는 부조리한 인간입니다.
마치 호흡과도 같은 이 시간, 또한 불행처럼 어김없이 되찾아오는 이 시간은 바로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제신의 소굴을 향해 조금씩 더 깊숙이 내려가는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강하다.
그렇게 비로소 부조리를 의식적으로 마주하면서 시지프는 운명의 주인이 됩니다. 시지프의 반항, 시지프의 자유, 그리고 시지프의 열정.
시지프의 소리 없는 기쁨은 송두리째 여기에 있다. 그의 운명은 그의 것이다. 그의 바위는 그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인간이 자신의 고통을 응시할 때 모든 우상은 침묵한다.
* 다음 포스팅 이방인 그리고 시지프 신화 (2) - 알베르 카뮈 에서 계속됩니다.
신들은 시지프에게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끊임없이 굴려 올리는 형벌을 내렸다, 그런데 이 바위는 그 자체의 무게 때문에 산꼭대기에서 다시 굴러 떨어지곤 했다. 신들은 무용하고 희망 없는 노동보다 끔찍한 형벌은 없다고 보았는데 그것은 이유 있는 생각이었다.
시지프는 부조리한 영웅이다. 그는 그의 열정뿐 아니라 그의 고뇌로 인해 부조리한 영웅인 것이다. 신들에 대한 멸시, 죽음에 대한 증오 그리고 삶에 대한 열정은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는 일에 전 존재를 바쳐야하는 형용할 수 없는 형벌을 그에게 안겨주었다. 이것이 이 땅에 대한 정열을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다. 시지프의 신화에서는 다만 거대한 돌을 들어 산비탈로 굴려 올리기를 수백 번이나 되풀이하느라고 잔뜩 긴장해 잇는 육체의 노력이 보일 뿐이다. 하늘 없는 공간과 깊이 없는 시간으로나 측량할 수 있을 이 기나긴 노력 끝에 목표는 달성된다. 그때 시지프는 돌이 순식간에 저 아래 세계로 굴러떨어지는 것을 바라본다. 그 아래로부터 정상을 향해 이제 다시 돌을 밀어 올려야 하는 것이다. 그는 또다시 들판으로 내려간다.
시지프가 산꼭대기에서 되돌아 내려올 때, 그 잠시의 휴지 시간.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을 고뇌를 향해 다시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본다. 마치 호흡과도 같은 이 시간, 또한 불행처럼 어김없이 되찾아오는 이 시간은 바로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제신의 소굴을 향해 조금씩 더 깊숙이 내려가는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