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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의 기행

언니의 기행

: 개X마이웨이 S대 자퇴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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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3월 16일
쪽수, 무게, 크기 320쪽 | 526g | 148*210*18mm
ISBN13 9791197389900
ISBN10 1197389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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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덜 들었고, 멍청한 나는 아무래도 종을 잘못 골라 태어난 것 같다. 말미잘이나 산호초 혹은 아메바 정도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그게 더 적성에 맞았을 텐데. 아니, 길가의 가로수나 숲속의 나무가 더 나았을까. 그편이 더 세상에 보탬이 되었을 텐데. 왜 적성에 안 맞게 인간으로 태어나 쓸데없는 고생을 해야 하는 걸까.
언니는 좋겠다. 인간이 적성에 맞아서. --- p.29

여전히 백지상태인 나의 장래 희망 조사서는 쭈글쭈글하게 구겨진 채, 패딩 오른쪽 주머니 안쪽에 숨겨져 있다. 요술램프를 만지듯 장래 희망 조사서를 한 번 쓰다듬어 보지만, 그렇다고 해서 없는 꿈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잘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으니까.

어른들은 고등학교 2학년이라고 하면 가능성이 많은 나이니 포기하지 말라 하지만, 그건 다 어른들이 뭘 몰라서 하는 소리다.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나의 숨겨진 가능성을 찾으러 발버둥 쳤지만, 내가 찾은 쥐꼬리만 한 가능성은 언니의 거대한 가능성에 비하면 아주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 p.41

어차피 꿈이란 거 적어 봐야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엄청 예쁘고, 잘생기고, 노래 잘하고, 춤도 잘 추는 사람들도 아이돌이 되지 못해 좌절하고, 되고 나서도 뜨지 못해 좌절하는 걸 봤어요. 세상엔 나보다 잘난 사람이 너무 많은데, 그 잘난 사람들이 열심히 노력해도 원하는 걸 이루지 못하는데, 나 같은 게 꿈을 가져 봐야 의미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렇다고 부모님이 원하는 공무원이 되는 건 싫었어요.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알지만, 그렇다고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살기는 싫으니까요. 그래서 그런 장래 희망을 적어냈어요. 고칠 생각도 해봤지만, 고칠 수 있는 게 없어 그대로 뒀어요. 이게 다예요. --- p.145

나는 내 인생이 아니라, 부모님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고 있었어. 엄마, 아빠가 바라고 또 원하던, 평범한 가정에서 부족함 없이 자라 뛰어난 역량을 펼치는 자랑스러운 삶. 상처도 굴곡도 없는, 모두의 부러움을 사는 그런 삶 말이야.
...
사랑이라는,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포장된 욕망이 나를 옥죄이는 걸 알면서도 그 사랑과 기대를 포기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어. 포기한다는 것 자체에 죄책감을 느꼈거든. 그 죄책감 때문에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만큼.
...
그러다 어느 순간, 들숨 날숨에 이물질이 섞인 것처럼, 여느 때와 같은 공기가 이질적으로 느껴졌어. 비유하자면 코 달린 물고기가 된 기분이었어. 아가미 달린 사람이거나. 뭍에서도 물에서도 살 수 없는 무언가가 된 것만 같은, 돌아갈 고향도, 찾아야 할 정체성도, 나아가야 할 방향도 모두 잃어버린 그런 기분. 어떻게 숨 쉬는지, 어떻게 다리를 사용하는지조차 알지 못할 정도로 한순간에 망가져 버린 내게 남은 건 한 가지 선택지뿐이었지. --- pp.187~188

행복이 무엇인지 내가 모른다는 게 문제가 될 줄 몰랐다. 내가 풍문으로 들은 행복과 너희가 직접 느끼는 행복이 다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저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게 행복이라 여겼다. 행복이란 걸 그토록 쉽게, 삶의 자잘한 순간에서 거머쥘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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