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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우의 태종 이방원 (상)
태종풍(太宗風) 탐구 양장
이한우
21세기북스 2022.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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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머리말_16년 만에 다시 만난 태종

들어가는 말

1. 육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고 해서 어찌 말 위에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2. 문명의 단절과 해석의 심연을 넘어: 중(中)과 정(正)
3. 『논어』에서 『주역』으로 가는 길, 상도에서 권도로
4. 이해와 해석학적 순환
5. 이방원의 정신세계: 반종교 합리주의 현실주의자
6. 태종풍

제1장 잠룡 이방원: 변방 장수 아들로 세상에 나오다

1. 동북면 함흥에서 나다
2. ‘감반의 구은’, 원주 선비 원천석에게 배우다
3. 고려 과거에 급제하다
4. 첫 번째 위기 속 한마디, “최영은 일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5. 아버지 이성계, 회군 성공으로 중앙 정치의 한복판에 빨려들어 가다

제2장 현룡 이방원: 1차 왕자의 난까지

1. 빼앗긴 세자 자리
2. 울분 속에 보내야 했던 정안군 시절
3. 정안군 이방원의 사람들
4. 표전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정도전의 승부수
5. 거병해 세상을 뒤집다
6. 이방원의 정치적 삶을 읽어내는 틀, 『주역』 건괘

제3장 혹 (못에서) 뛰어오르거나 그냥 못에 있으니 허물이 없다

1. 멈출 줄 아는 사람 이방원
2. 윗동서 조박이 정종에게 붙다
3. 은근히 착수한 사병 혁파 1단계
4. 2차 왕자의 난
5. 세자 이방원이 완수한 첫 과제는 사병 혁파
6. 세자 이방원, 반궁에서 『시경』 함께 읽었던 벗 길재를 놓아주다
7. 세자 이방원이 조준을 보호한 까닭
8. 자기 정치에서 끝내 손 떼지 못한 좌정승 민제
9. 1399년 11월 11일 정종이 세자 이방원에게 선위하다

제4장 태종의 진덕수업

1. 제왕을 위한 리더십 교본 『대학연의』
2. 제왕학으로 『서경』을 읽다
3. 경사 통합 독서법
4. 중시 실시로 미래의 중신들을 찾아내기 위해 『중용』을 활용하다
5. 민씨 형제를 제거하던 때 『주역』을 읽다
6. 태종이 사람을 알아보는 비결, 『논어』와 『한서』

제5장 비룡이 하늘에 있다

1. 태종, 하늘을 나는 용이 되어
2. 강명한 군주를 향하여
3. 총명예지를 갖춰라
4. 관(寬)의 2가지 의미, 그릇에 맞게 인재를 쓰는 것과 너그러움
5. 인정, 백성을 사랑하는 다스림

제6장 “내가 조준을 아낌은 하륜을 아낌만 못했다.”

1. 세종이 고른 태종의 다섯 공신
2. 태종의 사직지신 하륜과 조영무
3. 스승 같은 신하 조준·권근·김사형
4. 벗 같은 신하 이래와 정탁의 차이
5. 형제 같고 수족 같은 신하 이천우와 이숙번

제7장 신하들을 길러내는 태종

1. 태종이 길러내 정승으로 발탁한 유정현·박은
2. 태종이 길러 세종의 정승이 된 황희·맹사성·허조·이직·하연
3. 태종이 길러 세조의 정승이 된 정인지: “정인지는 크게 등용할 만하다.”
4. 태종이 정승감으로 길렀으나 정승에 이르지 못한 조말생
5. 정승에 올랐으나 부패해 굴러떨어진 이원
6. ‘인재 양성 사관학교’ 승정원

제8장 동년 ‘인재풀’ 활용과 사헌부 장악

1. 임금의 눈과 귀: 사헌부 사간원에 대한 태종의 인식
2. 태종 재위 1년 대사헌 김약채·유관·이원·이지
3. 대간의 도리
4. 대형 정치 사건마다 선봉장이 되다
5. 사헌부 대사헌에 동년들을 임명한 까닭
6. 대사헌 맹사성과의 정면충돌
7. 민씨 형제 사형을 앞두고 대사헌에 앉힌 김한로
8. 태종의 뜻을 따르는 대사헌들

저자 소개 1

LEE,HAN-WOO,李翰雨

1961년 부산 송도해수욕장 근처에서 태어나 여름만 되면 팬티만 입고 송도해수욕장을 오가던 개구장이였다. 중학교 때는 가방에 책 대신 야구 글러브를 넣고 다닐 정도로 야구에만 미쳐 있었고, 고등학교 때는 영화 [친구]에 나오는 교사 못지않은 선생님들한테 자주 맞아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1981년 고려대학교에 입학해 데모하다 얻어맞는 여학생을 보고 충격을 받아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겁이 많아서인지 결국 혁명가의 꿈을 접고 공부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1985년 대학원에 들어가 철학을 공부했다. 마르크스에 대한 미련이 컸지만 대학원 과정 때 우연히 접하게 된 하이데거에
1961년 부산 송도해수욕장 근처에서 태어나 여름만 되면 팬티만 입고 송도해수욕장을 오가던 개구장이였다. 중학교 때는 가방에 책 대신 야구 글러브를 넣고 다닐 정도로 야구에만 미쳐 있었고, 고등학교 때는 영화 [친구]에 나오는 교사 못지않은 선생님들한테 자주 맞아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1981년 고려대학교에 입학해 데모하다 얻어맞는 여학생을 보고 충격을 받아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겁이 많아서인지 결국 혁명가의 꿈을 접고 공부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1985년 대학원에 들어가 철학을 공부했다. 마르크스에 대한 미련이 컸지만 대학원 과정 때 우연히 접하게 된 하이데거에 매료되어 석사학위 논문으로 [마르틴 하이데거에 있어서 해석학의 문제]를 썼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 1985년부터 번역을 시작해 첫 작품으로 《헤겔 이후의 역사철학》을 냈다. 그 후 지금까지 평균 1년에 한 권 정도 번역 작업을 해왔다. 심지어 1988년부터 1990년까지 번역병으로 근무할 때에는 네 권을 번역해 계급마다 한 권씩 번역한 셈이 됐다. 번역은 나의 운명을 바꿔놓기까지 했다. 1990년 제대 후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찾아간 곳이 [중앙일보]의 《뉴스위크》였다. 그때 정식기자로 일하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고 ‘번역하는 기자’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기자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 삶은 점점 그쪽으로 몰고갔다. 1991년 《월간중앙》에 김용옥의 《대화》를 비판한 것이 계기가 돼 [문화일보] 학술 담당기자로 자리를 옮겼다. ‘번역하는 기자’에서 ‘기사 쓰는 기자’로 탈바꿈한 것이다. [문화일보] 기자 생활 만 3년째 되던 1994년 12월에 [조선일보]의 제의를 받았다. [조선일보] 학술 출판 담당기자로 일하면서 한국 지식인 사회의 명암을 볼 수 있을 만큼 봤다. 2001년부터 1년 동안 독일 뮌헨에서 연수 생활을 하면서 촌티도 많이 벗었다. [조선일보] 국제부에서 일했고, 지금은 경제사회연구원 사회문화센터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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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2월 16일
판형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624쪽 | 1114g | 152*225*35mm
ISBN13
9788950999322

책 속으로

이번 작업의 핵심 관심사는 태종이 가졌던 정신세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그가 ‘말하는 스타일’과 ‘일하는 스타일’을 복원하는 데 있다. 지금 시점에서 태종을 다시 불러온다고 했을 때 다름 아닌 이 2가지가 우리에게 가장 의미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

지금 시점에서 그를 미화 찬양한다고 해서, 혹은 그를 비판 매도한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태종이 ‘말하고 일하는 스타일’을 탐구하는 것은 ‘말과 일을 모르는 자’들이나 일삼는 공리공담을 피하는 효과적 방법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더불어 이 같은 태종 스타일, 즉 태종풍이 바람처럼 오늘날 우리 사회 곳곳에 널리 불어 허위의식으로 가득한 공리공담 고담준론 따위를 쓸어가 버리기를 바라는 마음도 담았다.
---「들어가는 말」중에서

군주론 혹은 제왕학에 누구보다 관심이 깊었던 정안군이 건괘에 담긴 의미를 몰랐을 리 없다. 오히려 효사마다 담겨 있는 깊은 뜻을 새기고 또 새겼으리라. 그랬기에 세자 시절 처음으로 『주역』을 강하는 자리에서 이서가 하는 말을 듣자마자 “인정은 끊기가 대단히 어렵다”라는, 짤막하지만 정곡을 찌르는 답을 할 수 있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태종은 그 후 집권 내내 지공(至公) 앞에서 인정을 끊어내는 정치를 보여주었다.
---「현룡 이방원: 1차 왕자의 난까지」중에서

태종이 재위 내내 강한 왕권을 구사할 수 있었던 주요 원동력 중 하나가 바로 이 같은 학문적 우위(優位)였다. 「재재」편은 주나라 무왕(武王)이 동생 강숙(康叔)을 위(衛)나라에 봉해주면서 가르침을 전한 글이다. 대체로 이 글은 나라를 다스리는 이치를 말한 것으로, 위아래의 실상이 통하게 하고 형벌을 너그럽게 써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신하 입장에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더라도 임금 입장에서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는 글이다. 여기에는 “신하 중에도 스승처럼 여겨야 할 신하가 있으니 삼공(三公)이 그들이다”라는 내용도 들어 있다. 이는 실제로 태종이 조준·권근·하륜에게 보여준 태도이기도 하다. 즉 그들은 태종에게 사신(師臣), 즉 스승 같은 신하였다.
---「태종의 진덕수업」중에서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고 왕권을 안정시킬 때까지 세운 공에 비하면 끝내 이숙번을 내치는 태종의 결단은 야멸차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태종은 단지 사사로운 감정으로 신하 문제를 처리하는 법이 없었다. 무엇보다 이숙번을 그냥 두었을 때 왕실에 미칠 수 있는 위험을 내다보아야 했다. 그러면 공적인 해법은 하나다. 처남 민씨 형제들과 비교할 때, 살려둔 것만으로도 이숙번에게는 큰 은혜를 베푼 것이라 봐야 한다. 또 한 가지, 하륜과 비교해서 잘못된 그의 언사(言辭) 하나를 짚어야 한다. 2차 선위 파동이 한창이던 태종 9년(1409년) 8월 13일의 일이다.
---「“내가 조준을 아낌은 하륜을 아낌만 못했다”」중에서

태종은 대간이란 어떠해야 하는지 정확히 견해를 밝혔다. “간관은 마땅히 노성(老成)하고 일을 경험한 사람으로 써야 한다. 말을 해야 할 터인데 하지 않는 것도 잘못이고, 말을 할 것이 아닌데 말하는 것도 잘못이다.” (…) 사사로움에 얽매여 공정(公正)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박신과 조용은 그 말뜻을 알아듣고서 이렇게 답했다. “신 등이 이미 명을 들었으니 어찌 감히 털 한 오라기의 사사로운 뜻이 있겠습니까!”

---「동년 인재풀’ 활용과 사헌부 장악」중에서

출판사 리뷰

태종 이방원에 대한 독창적 해석
그의 ‘말하는 스타일’, ‘일하는 스타일’에 주목한 새로운 평전


태종 이방원은 누구인가? 평가는 엇갈린다. 그는 아버지 태조를 도와 새로운 나라를 열고 난세를 치세로 바꾼 현명하고 강인한 지도자이다. 세종대왕의 찬란한 업적도 태종이 닦아놓은 토대 위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정적(政敵)을 잔인하게 짓밟고 골육상잔의 비극을 일으켜 왕위를 차지한 무자비한 냉혈한의 모습도 부인할 수 없다.

현대인에게는 후자의 모습이 더 강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호불호로 나뉘는 해석은 모두 단편적이다. 이러한 접근으로는 태종 이방원이라는 인물의 진면목을 제대로 발견할 수 없다. 여기에 덧붙여 그의 선택과 행적을 끌어낸 생각 즉, 가치와 지향을 함께 살필 때 이방원을 온전히 이해하고 그로부터 이 혼탁한 시대를 헤쳐나갈 통찰에 도달하게 된다.

저자 이한우는 태종 이방원에 깊은 매력을 느끼고 그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 집요하리만큼 천착해왔다. 이미 2005년 『태종, 조선의 길을 열다』를 썼고, 그 이후 16년간이나 태종 이방원에 가까이 가려는 고투(苦鬪)를 벌였다. 그렇지만 겉돌기만 한다는 아쉬움을 이길 수 없었다.

고전을 번역하며 특별히 『이한우의 태종실록』(전 19권)을 완역하며 이해의 지평을 넓혔고 16년 만에 새로운 방향을 설정할 수 있었다. 태종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위해 그가 영향받은 책들을 탐구하는 쪽으로 공부의 방향을 바꾼 것이다. 『논어』, 『주역』, 『한서』등이 그 책들이다. 이 과정을 통해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태종 이방원의 면모가 눈에 들어왔고 그의 행적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설득력 있는 해석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저자는 머리말에 이렇게 썼다.

“그때와 지금의 필자는 다르다. 그때는 태종이 수련한 학문 내용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태종의 깊은 심사(深思) 즉 그의 정신세계(精神世界)를 명료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한 예로, 태종이 2차 왕자의 난 때 맞섰던 형 이방간(李芳幹)을 끝내 살려준 진짜 까닭이다. 피상적으로는 그가 방간을 끝까지 살려준 이유를 그냥 형제애(兄弟愛)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정신세계를 파고들어 냉철하게 살펴보면 ‘왕권 강화 차원에서의 왕실 사람 보호’가 더 결정적인 이유였다. 왕실의 존엄을 높이는 일은 곧바로 왕권 강화를 위한 기반이었다. 이것이 이번에 다시 만난 태종의 한 면모다.” - 본문 중에서

태종 이방원을 이해하는 키워드
통치 철학과 가치로써 지공(至公) 추구


공자가 『논어』에서 역설한 ‘부부자자(父父子子) 군군신신(君君臣臣)’에서 주안점은 군군신신에 있다. 이는 공(公)의 영역으로 왕권중심주의의 토대를 이룬다. 그러나 주희(朱熹)의 해석은 공자와 정치관의 근본적인 차이를 보였다. 즉 성리학이나 주자학에 반(反)왕권 사상이 담긴다. 우리 역사에서도 송익필, 김장생, 송시열 등은 주자의 방향으로 갔다. 그들은 신하들이 판결권을 쥐고서 임금을 얼마든지 바꿀 수도 있다는 신권중심주의를 추구했다.

주자학의 영향을 본격적으로 받기 이전의 인물인 태종은 공자의 원래 뜻에 가깝다. 부부자자가 중요하지만, 군군신신이 훨씬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것이 공(公)이다. 그는 종묘사직을 위해서라면 아버지, 아내와 처남들, 장남 같은 혈친과의 대립과 충돌과 갈등도 꺼리지 않았고, 신하들 가운데 1등 공신들과의 대립도 꺼리지 않았다. 태종과 정도전 대결은 공자의 왕권중심주의 사상을 철저하게 소화한 태종과 주희의 신권중심주의를 구현하려 한 정도전의 대결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태종은 전적으로 자신이 정변을 주도했기에 태종과 공신들 간에 팽팽한 긴장이 감돌곤 했어도, 결국 공(公)과 사(私)의 논리에 입각해 공신을 공이 아닌 사로 간주하면서 다시 한번 자신을 위한 신하가 될 것을 요구했다.

이를 위해 태종 자신부터 매사 공(公)에 입각해 말하고 행동했다. 이를 미처 이해하지 못하거나 의도적으로 거스를 경우 태종은 냉정하게 그리고 무자비하게 제거했다. 민씨 형제들이 당한 참화도 그런 경우 중 하나다. 이처럼 태종은 통치 철학과 가치로써 지공(至公)을 추구했다. 그리고 『논어』에 담겨 있는 ‘사람 보는 법’으로서의 직(直), 즉 곧음이라는 개념에 주목해 이를 체화했다.

왜 태종은 유학(儒學)을 선택했는가
공자의 현실주의를 체현한 반(反)종교 합리주의자


주자학적 사고방식이 아직 자리 잡지 않았던 시기를 살았던 태종을 만나려면 주자학적 사고방식을 넘어야 한다. 여기에 머물러 태종을 바라본다면 그는 한갓 도덕주의적 비판의 대상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도 만연되어있는 ‘잔혹’, ‘무자비’ 등의 인상비평이 그것이다. 주자학의 본질과 주자학적 사고방식을 꿰뚫어 그것을 넘어설 때라야 태종이 살아낸 본래 모습이 오롯이 드러난다.

공자를 이상론자, 도덕주의자, 허공에 붕 떠 있는 관념론자, 고지식한 심신(心身) 수양론자 정도로 보는 오해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이는 잘못된 견해다. 공자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이다. 그가 말한 예(禮)는 예법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일의 이치이자 상도(常道)이다.

이방원은 공자의 현실주의를 체현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권도(權道)를 적시에 제대로 쓸 줄 아는 지도자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세자 양녕을 폐하고 충녕을 세운 택현론(擇賢論)이다. 그는 현실에 집중했다. 그에게 현실은 곧 ‘정치’였다. 그는 현실주의적인 유학(儒學)을 선택했으며 무엇보다 현실정치에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았고 불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적 습속들에 비판적 태도를 지녔다. 태종 이방원은 정치를 위한 일에 초(超)인간적 영역을 끌어들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인간으로서 극한치까지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지공(至公)을 추구한 반(反)종교 합리주의의 현실주의자의 길. 그것이 태종 이방원의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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