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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자의 말 4
권9 이특웅기수세지(李特雄期壽勢志) 13 권10상 선현사녀총찬(先賢士女總贊) 51 권10중 선현사녀총찬(先賢士女總贊) 99 권10하 선현사녀총찬(先賢士女總贊) 167 권11 후현지(後賢志) 229 권12 서지(序志) 301 익량녕삼주선한이래사녀목록(益梁寧三州先漢以來士女目錄) 321 찾아보기 374 |
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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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周)나라 말기에 파(巴)나라에서 내란이 발생했다. 파나라의 장군 만자(蔓子)가 초(楚)나라에 군사를 요청하면서 그 대가로 3개 성을 주기로 허락했다. 초왕(楚王)이 파나라를 구원했고, 파나라가 안정되자 초나라는 사자를 보내 약속한 성을 요구했다. 만자가 말하기를, “초나라의 영명함에 의지하여 화란을 제거할 수 있었다. 우리가 진실로 초왕에게 성을 주기로 허락했으니 장차 내 머리로 사례할 것이지만, 성은 가져갈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마침내 만자가 스스로 목을 베어 자결했고, 파나라에서 그의 머리를 초나라 사자에게 주었다. 초왕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내가 파나라의 만자 같은 신하를 얻을 수만 있다면, 무엇하러 성을 요구하겠는가?”라고 했다.
--- p.21 겨울 10월에 이수와 비흑은 주제(朱提)에 이르렀다. 주제 태수 동병(董炳)이 성을 굳게 지켰다. 영주 자사(寧州刺史) 윤봉(尹奉)이 건녕 태수(建寧太守) 곽표(?彪)와 대성(大姓) 흔심(?深) 등을 보내 동병을 돕게 했다. 그때 이수는 이미 성을 포위하고 그들을 맞아 막으려 했다. 비흑이 말하기를, “성 안에 식량이 적을 것이 예상됩니다. 곽표 등이 이른다 하더라도 식량이 많지 않습니다. 마땅히 그들을 성으로 들어가게 해서 함께 그 곡식을 소비하게 해야 합니다. 오히려 구원병이 적을 것을 염려해야지 어찌 성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 하십니까?”라 했다. 곽표 등이 모두 성으로 들어갔다. 성이 오래도록 함락되지 않자 이수는 급공(急攻) 하려 했다. 비흑이 간하여 말하기를, “남중(南中)의 도로는 험난하고 이곳 사람들은 반란하기를 좋아합니다. 마땅히 그들의 거짓 용맹함이 곤궁해질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다만 시간을 들여 그들을 제압하여, 군사가 무사히 온전하게 승리를 거두어서 그 여력으로 〈영주를〉 공격해야 합니다. 더러운 우리 속 물건에 급급할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 p.23 두진(杜眞)은 자가 맹종이고, 면죽(綿竹) 사람으로, 문장(文章) 백만 자를 외웠다. 그의 형이 적포(翟?)를 섬겼다. 적포가 면직된 뒤에 상서령(尙書令)과 사례교위(司隷校尉)가 그를 모함하여 탄핵하고, 감옥에 가두었다. 두진이 상소하여 그를 구하려다가 태형(笞刑) 6백 대를 받고 감옥에 들어가서도 적포에게 죄가 없음을 밝히자, 경사(京師) 사람들이 그를 장렬하다고 칭송했다. 한(漢)나라의 도통(道統)이 쇠미해지자, 재산을 종족(宗族)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는 주(州)의 벽소에 응하지 않고, 장리(長吏)가 되는 것을 사양했다. 관리들이 매번 번갈아가며 그의 집 문 앞에서 그를 맞이하려고 기다렸지만, 마침내 스스로 머리카락을 잘라 벼슬과의 인연을 끊었다. --- p.119 연희(延熙) 18년(255) 위장군(衛將軍) 강유(姜維)와 서쪽 정벌을 나서서 적도(狄道)에서 위(魏)나라 옹주 자사(雍州刺史) 왕경(王經)을 크게 물리쳤다. 왕경의 군사 가운데 조수(?水)에 빠져 죽은 자가 수만 명이나 되었다. 강유가 전진하고자 하자, 장익이 불가함을 간언하고 강유가 반드시 나아간다면 공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당시 강유는 여러 차례 농서(?西)에서 출정했는데, 장익이 항상 조정에서 그와 다투면서 촉(蜀)은 나라가 작아 마땅히 무력을 남용하여서는 안 되니, 반드시 출정한다면 뱀에게 발을 그리는 것이라고 했다. 강유가 그의 말을 듣지 않자, 어쩔 수 없이 매번 그를 따라다니면서도 즐겁지가 않았다 --- p.114 〈조정은〉 그의 집으로 가서 그를 한가 태수(漢嘉太守)에 임명했다. 그를 환영하는 사람들이 문전에 가득했으나 그는 굳이 사양하여 부임하지 않았다. 한가로이 지내며 맑고 조용했고,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고 자기수양에 힘써 항상 말하기를, “세상 사람들은 도덕을 힘써 구하지 않고 작록(爵祿)에만 급급한다. 나 같은 사람은 약간은 남은 영화가 있다고 할 수 있다.”라고 했다. 향려(?閭)를 교화하여 공경을 우선했다. 나이 65세에 집에서 죽었다. 아들 사마존(司馬尊), 사마현(司馬賢), 사마좌(司馬佐) 모두 아름다운 덕이 있다. --- p.240 《촉왕본기(蜀王本紀)》를 살펴보면, “천자(天子)는 방수(房宿)와 심수(心宿)에 거하고, 삼성(參星)과 벌성(伐星)에 있으면서 정사(政事)를 결정한다.”라고 했다. 삼성과 벌성은 촉의 분야(分野)이니 촉 땅이 천자가 정사를 논의하는 곳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천자가 정사를 논의하지 않으면 왕의 기운이 서쪽 땅에서 떠돌게 된다. 그러므로 주나라가 기강(紀綱)을 잃을 때 촉나라가 선왕(先王)의 정치를 펼칠 수 있다. 7개 나라가 모두 왕 노릇을 할 때 촉나라 또한 칭제(稱帝)했다. --- p.3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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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東晉, 317~420) 때 상거(常?, 대략 291~361)가 편찬한 『화양국지(華陽國志)』는 현존하는 중국 최초의 지방지(地方誌)이다. 이 책은 신화의 시대에서 시작하여 동진 영화(永和) 3년(347)에 이르기까지 지금의 사천(四川), 운남(雲南), 귀주(貴州), 감숙(甘肅), 섬서(?西), 호북(湖北) 지역의 역사, 정치, 군사, 문화, 풍속, 인물 등 비교적 풍부한 중국 서남 지역의 고대 민족 사료를 보존하고 있다. 따라서 해당 지역과 민족의 역사와 문화뿐만 아니라 이 지역의 지리, 정치사, 경제사, 민족사를 연구하는 데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은 텍스트이다.
『화양국지』는 체제가 완비되고 자료가 풍부하며, 고증 또한 충실하여책이 편찬되자마자 세인(世人)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범엽(范曄, 398~445)의 『후한서(後漢書)』, 배송지(裴松之, 372~451) 주(注) 『삼국지(三國志)』는 이 책에서 많은 부분을 인용했으며, 이후에도 최홍(崔鴻, 478~525)이 저술한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라든가 역도원(?道元, 466~527)이 쓴 『수경주(水經注)』, 남북조(南北朝) 양(梁, 502~557)나라 때 역사가 유소(劉昭)가 주(注) 한 『후한지(後漢志)』 등 중국 서남 지역 역사를 다룰 때마다 이 책을 인용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따라서 정사(正史) 위주의 역사 서술이 주류를 이루는 상황에서 정사에서 다루지 않는 지방의 역사를 돌아봄으로써 중국 역사 연구의 편향이 어느 정도 극복되기를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