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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1부 밝은 교신/페트병/갈대/폭포의 시/봄 현수막/솔방울/산 넘어가기/산 넘어가기의 성찰/바위/블루 콤마/조협?莢/종이컵들/비닐봉지/대비사/유리 바다/가비야운, 나비/마스크/틈만 나면/최소 2미터 거리를 유지해주세요↑/우포늪/송사리의 노래 2부 분꽃/민들레 골목의 시/겨울새/개/제비꽃/방천시장/문학관/숟가락/해안/빨간 건물/‘마주 보고 있는 사슴’에게 질문하다/푸른 문 3부 가창댐 아래서/가창댐/구절초/파문/제비꽃 역사/세워지다/호명 1/호명 2/서로/코리아의 시/자장가/5월/두툼한 손 4부 누워 있는 여자/불탄 뒤/금붕어/패랭이꽃/통영/푸른색/낙화에 대하여/손/여뀌꽃/봄/마애란磨崖蘭/직지사/정취암/이별이 있고 나서 무성해졌다/입원 중 5부 뒤늦은 처음/서울, 더 그레이/산딸나무 일기/낯선, 시/시선의 기척/수니 해설 응시의 풍경과 음지陰地의 시학·김문주 |
이하석의 다른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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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빠진 약성藥性.
달콤한 시럽을 밀봉한 채 납작하니 뒤틀린 사상의 봉투가 바람 속에 내던져져 있다. 미래의 답장은 당연히 올곧게 선 나무로 무성해진 소식이겠지만 그 시작이란 게 저렇듯 얇은 질문의 꼬투리에 불과하다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시 센 모성母性으로부터 쫓겨나 바람 속에 내버려진 열매의 답서를 우체통에 편지를 넣듯이 나의 뒤뜰에 심는다. ---「조협?莢」중에서 틈만 나면, 찻길과 인도의 감전感電으로 피워낸 제비꽃들이 바람에 왁자지껄하다. 마스크 쓴 사람들이 묵묵히, 자신들도 모르게 그 선 밟은 채 버스를 기다린다. 그게 무에 그리 위험한지 버스보다 먼저, 기우뚱거리며 질병 관리 본부의 방역차가 달려와 또 소독제를 뿌린다. ---「틈만 나면」중에서 갈라져서야 서로 불러대면 귀가 난청이 되지만 서로의 시선들에 사뭇 틔어 있기에, 우리 사이 철조망이 자라도 바람에 비에, 서로의 숨결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녹슨다네. 바람아 흔들어보아라. 서로 넘나드는 번역 안 해도 되는 푸나무와 바람의 말로, 사뭇 틘 귀와 눈 서로 철조망 통하기에, 아직 우리네 사랑은 아는 도둑처럼 속지 않고 서로 훔친다네. ---「서로」중에서 사랑은 시로 할 수밖에 없는 것. 시의 말로 약속 잡고 결국 더 시선을 건드리지. 그런 음지陰地지. 사랑은 시간의 공간이어서 잔 이별마저 시로 돌아보는 거야. 너는 내게 눈웃음 짓는다, 나무 의자 수리하는 시인같이. 그런 시는 도대체 무슨 눈길일까? 퇴고할 수 없는, 그래, 나를 응시하는 너 말고 이 세상에 누가 더 낯선 시인가? ---「낯선, 시」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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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앉아서, 나도 내다보는 자,”
보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는 것들 블루 콤마의 주인도 내다보는 자에 속하지만, 자주 카페 밖으로 나가 강변 풍경이 되어서 담배를 피운다.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데, 그럴 때마다 연기가 급히 그의 몸을 부풀리다가 위축시킨다. 제 생을 제대로 왜곡시킬 줄 아는 것 같다. 나도 카페의 손님들도 그 모습을 멍하니 내다본다. 하지만 결국, 서로 빤히 들여다보이는 느낌이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서로 울컥해진다. -「블루 콤마」 부분 강변 카페인 ‘블루 콤마’의 손님들은 유리창 안쪽에 앉아 풍경을 내다본다. 때로는 이 카페의 주인마저 “강변 풍경이 되어” 전망된다. 그가 담배를 피우며 숨을 쉴 때, 연기가 “그의 몸을 부풀리”고 “위축시”키는 장면은 ‘연기’에 독자적인 시선을 불어넣음으로써 이 시의 주체와 객체를 또다시 전도한다. 이번 시집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김문주는 이러한 점에 착안해 “시를 구성하는 존재들이 모두 보는 주체이자 대상으로 세계에 참여하고 있”음을 설명한다. “인간 중심의 위계적 감수성이 사물의 시각에 자리를 내어줌으로써” “풍경의 세계에 평등하게 참여하고 있”다는 말이다. 흙 속에 그의 씨가 숨겨졌고, 그건 나의 지금으로 피어난다. 봄이 그걸 밝힌다. 이 당연한 역사가 제 화사한 응시의 그늘을 드리운다. -「제비꽃 역사」 부분 우리가 이 세계를 보고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사물 각각이 스스로를 보여주고 있다는 인식의 전환은 문명 비판적 사유나 생태적 상상력에 국한하지 않는 이하석의 시 세계를 짐작게 한다. 이는 현실의 구체적인 고통을 아름다운 언어로 좌시하지 않으려는 노력의 일환일 것이다. 특히, 이번 시집의 3부는 한국 현대사의 역사적 풍경을 집중적으로 그려낸다. 1950년 일어난 ‘대구 가창골 민간인 학살’(「가창댐 아래서」 「가창댐」), 5.18민주화운동(「자장가」) 등을 추모하고 기념하는 시편들은 해방 이후와 한국전쟁 시기의 비극 앞에서 “고스란히 눈 뜨고”(「호명 2」)자 하는 시인의 단호한 결의를 증언한다. “버려진 것들은 늘 더 버려져, 있다.” 어둠이 내리면 들려오는 소리 밤이 낮은 소리들로만 정밀하게 얽혀 짜입니다. 쌓아놓은 도서관의 책들에서 말들이 부식되어 뭇 시간들에 녹아들 듯 오래 펼쳐져 펄럭이는 늪은 새로 말문을 틉니다. 내가 부르는 소리들은 동심형으로 늪을 확장하지만, 매번 수면과 가시연잎의 틈이 더 조밀해집니다. -「우포늪」 부분 이하석의 시에서 ‘깊은 밤’은 주체가 된 사물이 율동하는 시간이다. 밤이 찾아오면 우포늪의 생명들이 새로 말문을 튼다. “낮은 소리들”이 “수런대는 고요 속에” 자리한 우포늪의 ‘틈’은 생명들이 오가고 부대끼는 길로서 활력을 불어넣는다. 소리의 파장이 커질수록 생명들의 사이는 긴밀해진다. 또 다른 어느 밤엔 목줄이 풀린 개가 “어둠을 향해 으르렁댄다”. 모두가 잠든 밤 쓰레기장을 뒤지는 개는 “이 동네가 버린 어둠들”(「개」)을 발각해낸다. 버려진 사물들의 종착지인 쓰레기장에 “가로등 불빛을 뒤집어”쓰고 나타난 개의 우짖음은 그곳을 외면하려는 ‘나’에게 비릿한 공포감을 유발한다. 시인은 흔히 생명을 빨아들이는 존재로 인식되는 늪과 더럽고 음습한 쓰레기장에 생명들의 ‘소리’를 채우며 어떤 ‘틈’을 마련해낸다. 삶의 뒤편에 숨겨진 고요한 곳, 달리 말해 쓸쓸하고 적적한 곳들을 부러 찾아가 그곳의 숨겨진 생기를 들춰낸다. 이는 시인이 오랫동안 천착해온 “폐허의 적요가 피우는 꽃”(뒤표지 글, 『것들』)이 되어 삭막한 음지를 밝힌다. 이러한 시인의 자성은 “사랑은 시로 할 수밖에 없는 것”(「낯선, 시」)이란 오랜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환하고 따뜻한 사랑이 아닌, “캄캄한 뜨거운 네 속에서 나를 응시하며”(「뒤늦은 처음」) 일구는 사랑일 것이나, “아직도, 간절히, ‘말’하고 싶은”(뒤표지 글) 시인은 한껏 주름진 얼굴로 “그런 음지陰地지. 사랑은”(「낯선, 시」) 하고 읊조릴 수밖에 없다. 시인의 말 전반부가 삶/죽음과 관련이 있다면, 후반부는 구름의 주소록? 어쩌면 다 구름의 주소록? 나는 참 멀리 와서도 여전히 제자리에서 주소가 없느니. 2023년 봄 이하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