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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제3장 한대 전제정치하의 봉건 문제 1. 문제의 한정 2. 봉건과 초(楚)·한(漢) 흥망의 관계 3. 한대 봉건의 3대 변천 4. 봉건에 대한 전제의 억제 과정 5. 억제 과정에서 학술발전에 미친 중대한 영향 6. 학술사에서 동중서(董仲舒)가 뒤집어쓴 억울한 죄 7. 후한 전제정치의 계속되는 압박 원주 제4장 한대 일인(一人) 전제정치하의 관제(官制) 변천 1. 관제는 재상(宰相)제도를 골간으로 한다 2. 역사상 관제에서의 삼공(三公)·구경(九卿)에 대한 해명 3. 한대 관제의 일반적 특성 4. 관제 변천에 있어서 무제(武帝)의 핵심적 지위 5. 무제의 재상제도 파괴 6. 상서(尙書)·중서(中書)의 문제 7. 중조(中朝, 內朝) 문제에 대한 해명 8. 상서(尙書)는 전한시기에 내조신(內朝臣)이 아니었다 9. 무제 이후 재상의 지위와 관제상 삼공(三公)의 출현 10. 광무제의 추가적 재상제도 파괴와 이후 전제하의 관제변천 구조 11. 광무제의 지방 군제(軍制) 파괴와 그 심각한 결과 원주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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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문제(文帝)는 4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두(竇)황후가 경제(景帝)를 낳았고 나머지는 모두 왕으로 봉하였다. 경제는 14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왕(王)황후가 무제(武帝)를 낳았고 나머지는 모두 왕으로 봉하였다. 무제는 6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위(衛)황후가 여(戾)태자 거(據)를 낳았으나 무고(巫蠱) 사건 때 죽었고, 조첩여(趙??)는 소제(昭帝)를 낳았다. 무제 원수(元狩) 6년(B.C.117) 아들 굉(?)·단(旦)·서(胥)를 동시에 왕으로 책봉하였다. 이 3대에 걸친 봉건은 모두 “제후왕”의 성격을 띤다. 그러나 고조 때와 다른 점은 (1) 한의 지방정치는 이미 점차 기반이 마련되어 중앙에서 직접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들 왕의 봉건에 “천하를 진무(鎭撫)한다”는 의미는 없었다. (2) 왕으로 봉해진 자가 모두 왕자라는 점은 이후 천자의 아들을 모두 왕으로 봉하는 국면을 열었다.
--- p.46 옥사의 발단은 회남왕 유안의 태자 유천(劉遷)이 그의 낭중 뇌피(雷被)와 “검술을 겨루다 뇌피가 잘못하여 태자를 찌르는”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뇌피는 태자가 이 일로 오해를 할까 두려워 장안으로 가서 종군하여 흉노를 분격(奮擊)하기를 원했지만 유안은 뇌피의 낭중을 면직하였으며 이것은 매우 일반적인 조치였다. 그러나 원삭(元朔) 5년(B.C.125) 뇌피는 (도망하여) 장안에 도착하자 “글을 올려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였고” 이에 무제는 “이 사안을 정위(廷尉)와 하남(河南)에게 내려보냈다. 하남에서는 이 사건을 조사하며 회남국 태자를 체포하려 하였다.” 이런 사소한 일로 회남국의 태자를 체포하는 것은 조금이라도 핑계거리가 있으면 오랫동안 품어 온 사전 모의를 실현하는 기회로 삼겠다는 뜻이 분명하다. 『사기』와 『한서』의 서술 중간에는 회남왕의 문객 오피(伍被)의 자백이 삽입되어 있으며, 유안이 모반을 꾸미기까지의 과정을 진술하면서 유안을 세상 물정도 모르는 우둔하고 어리석은 무리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이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하고 그럴듯한 장식을 덧입혀 꾸며 낸 문장이라는 것은 너무도 명백한 일이다. --- p.80 선제는 민간에서 영입된 자로, 곽광이 죽은 후 친히 정사를 돌보며 전력을 다해 나라를 다스렸다. 5일에 한 번 직접 관료들로부터 국사에 대한 보고를 받았고, 항상 선실전(宣室殿)에 나아가 재계하고 안건을 처리하였으며, 공적이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상을 주고 죄지은 자에게는 반드시 벌을 주는, 중흥(中興)을 이룬 군주로 일컬어졌다. “대장군”에 의한 정치 전횡의 화를 경계하여 정권은 형식상으로 대장군 같은 내신(內臣)에서 다시 재상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 p.251 후한 최대의 변경 문제는 강(羌)족에 있었다. 중엽 이후, 귀순한 강족 사람들을 삼보(三輔) 지역으로 이주시킨 것은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치(吏治)의 문란으로 강족 사람들에게 폐만 끼쳤을 뿐 정작 그들을 위무하는 효과는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강족 사람들에게는 자기 방어 능력이 있었지만 한나라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으므로 강족이 이르는 곳마다 한나라 사람들은 도피하여 유랑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로부터 우리는 오호(五胡)가 중국을 어지럽힌 근본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오호는 싸울 수 있었고 중국 백성들은 싸울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상상해 볼 수 있다. 재앙의 근원을 따져 보면 모두 광무제의 전제의 사(私)로부터 비롯되었다. --- p.300 살펴보건대 『한서』 「백관공경표(百官公卿表)」에서는 “원수(元狩) 4년(B.C.119) 처음으로 대사마(大司馬)를 설치하고 장군(將軍)의 칭호 앞에 덧붙였다[以冠將軍之號]”라고 하였는데, 이는 위청(衛靑)의 대장군, 그리고 곽거병(?去病)의 표기장군 앞에 각각 '대사마'라는 직함을 추가했다는 말이다. 장군은 실제적인 책임과 권한을 가진 실직(實職)이지만 대사마는 명예직이다. 그러나 『대륙잡지』 제38권 제1기에 실린 정흠인(鄭欽仁)이 번역한 가마타 시게오[鎌田重雄]의 「한대의 상서[漢代的尙書]」라는 글에서는 “대사마는 원래 태위(太衛)의 관원으로, 무제 때 설치했으며, 장군호를 그 앞에 덧붙였다[冠以將軍號]”라고 번역되어 있다. 글자 하나가 뒤바뀌어 원래의 뜻과는 다른 뜻이 되어 버렸으니, 정군(鄭君)이 오역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대사마는 원래 태위의 관원이라 한 것도 잘못이다. --- p.3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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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복관(徐復觀)은 1903년 호북성 희수현(?水縣)에서 출생하였다. 본명은 병상(秉常)이고, 자는 처음에 불관(佛觀)이었다가 나중에 웅십력(熊十力)의 권유로 복관(復觀)으로 바꾸었다.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글을 익힌 후 현의 고등학당, 무창(武昌)의 성립(省立)제일사범(무한대학 전신)을 거쳐 국학관(國學館)에서 전통 경전에 대한 훈련을 받았다. 1928년 일본에 유학하여 사회주의를 비롯한 정치·경제·철학 등 새로운 사조를 접하였고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였으나 1931년 9·18사변(만주사변) 발발로 귀국하여 군에 투신한 후 1937년 산서성 낭자관(娘子關) 전투 및 호북성 무한(武漢) 전투를 지휘하였다. 1943년 항일전쟁기에는 연안(延安)에 머물면서 국민당의 연락 임무를 맡았으며 6개월 후 중경(重慶)으로 돌아가 장개석의 14명 핵심막료의 하나로 기밀에 참여하였다. 1946년 육군 소장을 끝으로 15년간의 군생활을 마감하였다.
1944년 서복관은 웅십력과의 만남을 계기로 생애에서 중요한 전환기를 맞이한다. “나라를 잃는 자는 항상 그 문화를 먼저 잃는다”라는 스승의 말이 그로 하여금 불혹을 넘긴 나이에 학문 연구를 시작하도록 만들었다. 1949년 홍콩에서 창간한 정치학술이론잡지 『민주평론』은 1950-60년대 대만과 홍콩을 무대로 한 유학의 현대화 운동의 주요 토론장이 되었고 여기서 함께 활동한 당군의(唐君毅), 모종삼(牟宗三) 등과 함께 '현대 신유학(新儒學)'의 대표인물로서 명성을 얻게 된다. 그는 중국의 전통문화, 특히 유가사상과 중국지식인의 성격 및 역사 문제에 관심을 갖고 많은 글을 발표하였다. 1949년 대만으로 이주하여 대중(臺中)에 정착한 서복관은 성립 농학원(農學院)을 거쳐 동해대학(東海大學) 교수로 재직하다가 1968년 동료 교수와의 필전(筆戰) 사건 후 대학 측의 강요로 학교를 퇴직하고 1969년 다시 홍콩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이 때문에 『양한사상사』 집필에도 큰 타격을 입었다고 『양한사상사』 제1권 서문에 쓰고 있다. 1982년 4월 위암 투병 끝에 대만에서 서거하였고, 유언에 따라 1987년 고향인 호북성에 유골이 안장되었다. 사상은 그 시대를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다. 한대 사상의 연구는 당연히 그 사상이 배태되고 성장할 수 있는 토양, 즉 한대의 정치사회구조를 규명하는 작업으로부터 시작한다. 본서의 제1권 전체가 중국고대의 정치사회구조 연구에 할애되고 있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한(漢)이라는 사회가 탄생하기까지의 전사(前史)로서 서주 종법제도의 역사적 기능, 그에 기초한 봉건제도의 형성과 붕괴, 진(秦) 통일의 기반과 전형적 전제정치의 출현, 진을 계승한 한의 변질된 전제정치, 전제정치와 사회종족세력 간의 갈등관계 등 1권 전체가 고대사회 특히 한대 전제정치의 본질과 구조에 관한 연구로 채워져 있다. 제1권의 초판 제목이 『주·진·한 정치사회구조 연구』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대 정치사회구조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제2권과 제3권에서는 본격적인 사상 해부에 들어간다. 진·한을 대표하는 다양한 사상들의 종합과 조화를 시도한 『여씨춘추』, 『회남자』등의 대규모 편찬서는 물론이고, 『사기』, 『한서』 등 당대의 역사를 서술한 역사서, 심지어 『좌씨전』, 『공양전』, 『곡량전』과 같이 전승 과정의 불분명 속에 한대인의 가탁이 의심되는 부분까지도 사상 연구의 좋은 재료가 되었다. 구체적 사실과 현상을 객관적 언어로 표현한 문헌뿐만 아니라 상징화된 언어로 사람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문학작품 또한 당대인의 정서와 관념이 투영된 귀중한 사상사 재료이다. 그들이 남긴 수많은 시부와 산문은 물론이고 한영(韓?)의 『한시외전』이나 유향(劉向)의 『설원』에 반영된 현실 인식도 놓치지 않았다. 이와 함께 육가(陸賈), 가의(賈誼), 동중서(董仲舒), 양웅(揚雄), 왕충(王充) 등 주요 인물들의 행적과 저작을 면밀히 분석하여 각 사상의 본질을 드러내고 사상사적 통찰을 제시한다. (역자 서문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