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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6개월 전 에필로그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
B. A. 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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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손을 잡고 현관으로 걸어갔다. 가브리엘이 문을 열자 아이리스가 빨리 들어가고픈 마음에 바로 문턱을 넘으려 했다. 그 순간 가브리엘이 팔을 훅 뻗어 가로막았다.
“우편물이 없어.”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리스는 인상을 쓰다가 그 말뜻을 알아차렸다. 대개는 2주가량 집을 비우면 현관문 앞에 우편물이 쌓여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하나도 없었다. “불을 켜봐.” 아이리스가 속삭였다. 가브리엘이 문 안으로 손을 뻗어 스위치를 찾았다. “내 카디건.” 아이리스가 아래쪽을 가리켰다. 파란 카디건이 계단 밑 기둥에 걸쳐져 있었다. “저기에 둔 적 없어. 저것도 마찬가지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인 캔버스화를 가리키며 그녀가 덧붙였다. --- p.18 아직도 믿기 어려웠다. 피에르가 딱 한 번 같이 잤던 여자와 길에서 우연히 마주칠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 여자가 데리고 있던 아이가 아이 엄마가 아니라는데도 자기 아이라고 철석같이 믿을 확률은? 피에르는 어떻게 그렇게 딱 한 번 재회한 자리에서 여자가 거짓말을 한다고 확신했으며, 또 아이의 머리칼을 가져다 유전자 검사를 할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그 여자가 진짜 숨길 게 있었다면 과연 옛정을 생각해 순순히 카페로 따라갔을까? 말이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 p.53 그 일 이후 가브리엘은 ‘만약에’란 말을 수도 없이 되뇌었다. 만약에 그날 채석장 코스를 택하지 않았더라면, 만약에 30분 늦게 출발했더라면, 그랬으면 그가 도착했을 땐 찰리가 이미 숨을 거둔 뒤였을 테니까. 그런데 그걸 정말 바란 걸까? 그때 찰리는 그를 알아보곤 “펠리 아저씨” 하고 불렀다. 그랬기에 가브리엘은 자신이 찰리를 발견할 운명이었다고, 힘든 선택을 할 운명이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저 위에서 누군가 가브리엘의 삶이 너무 수월하게 풀려간다 싶어, 그가 뭘 해도 잘못되는 상황을 안겨줘서 살짝 망쳐놓기로 한 건지도 몰랐다. 해도 망하고, 안 해도 망하는 상황 말이다. 그러고 그 앞으로 편지 한 통이 왔다. 그는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냈다. 아이리스와 스코틀랜드에 가 있는 사이에 온 편지였다. 이 편지를 읽고 나서 도움이 된 거라곤 단 하나, 피에르 걱정이 뒤로 밀려났다는 것뿐이었다. 가브리엘은 방금 파놓은 흙을 내려다보며 편지를 땅속 깊이 묻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편지를 다시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 pp.73~74 로르가 와서 함께 지낸 지 6주째였다. 그사이 아이리스는 길을 잃었다. 전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알았다. 아이리스 펠리, 가브리엘의 아내이고 베스의 엄마이자 주택 개선 전문가였다. 하지만 이젠 상황이 달랐다. 여전히 가브리엘의 아내였지만 전과 같지 않았다. 두 사람의 육체적 관계는 끊겼고 그가 그녀를 거부하는 상황이 심상치 않은 여파를 미치고 있었다. 전에는 그 누구에게도 환상을 품은 적 없었으나 요즘은 꿈에 조지프가 자꾸 나타났다. 솔직히 말해 그를 두고 헛된 공상에까지 빠지곤 했고, 그런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녀는 가브리엘을 사랑했고 그것으로 만족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러지 못했다. --- p.175 “경찰은 수만 가지를 고려하고 그게 그들의 일이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밝혀지기 전까지 우리 모두 용의자일 수 있어.” 아이리스가 고개를 들어 가브리엘과 눈을 마주쳤다. “순경이 당신에 대해서도 물어봤어. 자전거를 타러 갔다가 몇 시에 돌아왔냐고. 내가 목욕을 시작한 직후인 4시 15분쯤에 돌아왔다고 대답했어. 실은 5시였지만.” 가브리엘이 얼굴을 찡그렸다. “왜 그런 거짓말을 했어?” “왜냐면 혹시…… 설마 그럴 리 없겠지만…… 범죄와 관련 있기라도 하면 이상하게 비칠까 봐서.” 그가 잠시 빤히 쳐다보더니 턱을 문지르며 낮게 중얼거렸다. “젠장. 그렇긴 하지.” --- p.231 잠재의식 속에서 그것이 당시 그들의 관계를 나타낸다고 생각한 걸까, 그와 아이리스는 거울을 교체할 생각을 좀처럼 하지 않았다. 둘 사이가 회복되어야만 새 거울을 걸게 될 것 같았다. 이따금 아이리스와의 관계가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고 느낀 가브리엘은 거울을 부숴버려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베스가 대학 입학을 위해 떠나고 나면 분명 그들 부부도 버티지 못하리라 싶었다. 베스가 둘 사이의 정적을 메워주고 있었다. 초인종이 울리자 가브리엘의 두 발이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는 애써 두려움을 떨쳐냈다. 지난 몇 주 동안 겪은 모든 일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며. --- pp.281~282 “왜 그렇게 화를 내고 그래? 난 그냥 가설을 제시한 것뿐이야.” 가브리엘이 고개를 저었다. “다음에는 에스메를 범인으로 몰겠네. 실은 그때 병원에서 아이를 낳은 게 아니다, 로르와 조지프가 사귀는 걸 시기해서 밖으로 나와 그녀를 죽였다, 그러면서. 아니면 휴는 어때? 에스메와 조지프의 관계를 알고서 조지프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그들의 인생에서 쫓아낼 요량으로 로르를 죽인 거야. 이런 가설은 어때?” 아이리스가 뒤로 홱 돌아섰다. “자기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내가?” 그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정말이지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가야 해, 아이리스. 이렇게 죽치고 앉아 허공만 바라보는 건 좋지 않아.” 그는 낮게 욕설을 내뱉으며 자리를 떴다. --- p.315 |
예상치 못한 ‘손님’이 몰고 온 위험한 진실
불붙은 듯 넘어가는 페이지, 폭죽처럼 터지는 반전 동네에서 알고 지내던 소년 찰리의 비극적인 죽음을 우연히 목격한 남편 가브리엘의 기분 전환을 위한 여행을 마치고 2주 만에 돌아온 아이리스와 가브리엘 부부는 비어 있어야 할 집 안에서 누군가가 머문 흔적을 발견한다. 아이리스의 잠옷을 입고 부부의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파리에 사는 아이리스의 친구 로르. 남편 피에르에게 혼외 자식이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에 정신없이 집을 나와 부부의 빈집에서 지내고 있었다면서 로르는 외려 여행에서 하루 일찍 돌아온 아이리스를 탓한다. 아이리스는 로르의 사정을 이해하고 당분간 함께 지내기로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뻔뻔해지는 로르를 감당하기가 힘들다. 가브리엘 또한 자신이 겪은 충격적인 사건을 극복하느라 아이리스와의 관계에는 별 관심이 없다. 아이리스의 외롭고 버거운 일상의 유일한 낙은 성격 좋은 이웃 에스메와 휴 부부의 집을 찾아 담소를 나누는 일이다. 그러던 어느 날 에스메의 조경사 조지프가 에스메의 임신한 배 위에 얼굴을 대고 있는 광경을 엿보고 에스메와 조지프 사이를 의심하기에 이른다. 아이리스 역시 조지프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지만 곧 로르와 조지프의 사이에도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르는 것을 알게 된다. 초대하지 않은 ‘손님’의 갑작스러운 방문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모든 사람이 저마다 다른 관계로 엮이면서 긴장을 서서히 끌어올린다. 구석구석 도사린 배신과 꽁꽁 감춰진 진실, 그리고 모든 비밀은 마지막 30페이지에서 거대한 폭죽처럼 강렬하게 터진다. 영리한 구성, 폭발적인 결말 진득하게 이끌다 힘 있게 터지는 슬로우 번 소설 B. A. 패리스의 신작 《게스트》는 정교하고 치밀한 구성이 유독 돋보이는 작품이다. 도입부는 매우 단순하지만 독자는 처음부터 평범함과 불안함이라는 상반된 요소 모두에 빠져든다. 이러한 감정적 대치 상황은 작품 전반을 지배하는데, 로르에게 집을 내어주면서도 로르가 얼른 떠나기를 바라는 아이리스, 피에르와의 갈등 해결을 원하는 듯하면서도 노력하지 않는 로르, 찰리의 유언에 관한 비밀을 간직한 채 고뇌에 빠지는 가브리엘 등 인물들 모두 서로 다른 두 감정 사이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선택을 이어 나간다. 이렇다 할 사건도, 극적인 갈등도 일어나지 않은 채 인물들의 감정선과 세세한 장면 묘사만으로 아슬아슬한 스토리를 중반까지 이끄는 것이 이 소설의 특징이자 매력이다. 공포 요소를 초반에 배치하지 않고 차근차근 등장시키는 연출 기법을 ‘슬로우 번slow-burn’이라 한다. 문자 그대로 관객의 공포심을 서서히 부채질한다는 의미다. 《게스트》는 대표적인 슬로우 번 스타일의 스토리텔링을 영리하게 구사한 작품으로, 인물 간 스트레스와 긴장감을 더 천천히 끓어 올림으로 마지막에 상상을 뛰어넘는 반전을 더욱 짜릿하게 만든다. 느리게 진행되는 이야기 안에서 긴장감과 흥미로움을 유지해야 하는 고난도의 서술 형식을 B. A. 패리스 작가는 천연덕스럽게 만들어내는 것이다. 복잡하고 독창적이며 영리한 이 작품은 캐릭터가 주도하는 서스펜스, 두뇌게임처럼 펼쳐지는 스릴러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만족스러운 경험을 선사한다. 누구에게나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다 중독성 강한 B. A. 패리스의 압도적인 반전 스릴러 미스터리나 스릴러 소설에서 비밀, 진실, 죽음은 필수 불가결한 소재다. 이 떼려야 뗄 수 없는 재료들을 어떻게 요리하느냐가 작가의 역량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B. A. 패리스의 실력은 가히 대가의 경지에 올랐다 할 수 있다. 비밀을 품고 있는 인물이 뻔뻔하고 답답한 로르 같기도, 전과 다른 모습의 가브리엘 같기도, 다정하지만 의심스러운 이웃 에스메 같기도 하다. 등장하는 모든 이를 의심의 시선으로 볼 수밖에 없는 설정은 종내에는 어떤 비밀을 감추기 위해,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로 드러난다.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비밀을 숨기려는 자의 의지는 무시무시한 동기로 변모하고 불가능한 것이 없게 만든다. 때로는 논란의 여지를 불러오기도 하는 이 주제는 패리스의 작품에서 자연스럽게 용인된다. 그만큼 잘 계획되고 잘 짜인 구성이 독자들을 납득 가능한 방향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그리고 긴장감을 한껏 끌어올린 비밀이 도미노처럼 차례로 그 모습을 드러내며 마침내 진실이 밝혀지면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말이 독자들의 뒤통수를 얼얼하게 때린다. “자신의 스타일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또 독자들의 뒤통수를 치는 게 가능할까. 하지만 패리스는 해낸다. 그것도 완벽히. 아, 이렇게도 가능하구나, 감탄이 절로 나온다”는 옮긴이의 말에 깊이 공감하면서 패리스 작가에게라면 몇 번이고 우리의 뒤통수를 기꺼이 내어주게 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