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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박라연
문학과지성사 1996.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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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지성 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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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1. 내 작은 비애
2.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3. 겨울잠 네 흙 속으로 간다
4. 사라수 잎새 하나
5. 한 사람 무릎 아래서
6. 묘지가 아름다운 계절
7. 금낭화
8. 4월의 공터에는
9. 마음 한 방울과 이 세상의 거리
10. 긴기아남 1
11. 긴기아남 2
12. 봄밤
13. 보리수나무 아래서
14. 목련
15. 봄비
16. 두루미
17. 내가 감히 산만큼 성자만큼
18. "신은 내게 말했다"
19. 치사량이 독, 그리고
20. 연꽃, 새색시 적에
(이하생략)

저자 소개 1

1951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한국방송통신대 국문과와 수원대 국문과 석사, 원광대 국문과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가 당선되어 시단에 나왔으며, 2008년 윤동주상 문학부문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생밤 까주는 사람』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공중 속의 내 정원』 『우주 돌아가셨다』와 산문집으로 『춤추는 남자, 시 쓰는 여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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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1996년 12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92쪽 | 128*205*15mm
ISBN13
9788932008646

책 속으로

흰 꽃잎 사이사이 인생유전 숨어 피더니
황국 홍국 지난 지금 꽃대에 자주 쥐가 난다
그리운 누님이라 불러준들 피워올릴 향기나 남았는지
이제사 랑송의 불문학사를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가지를 읽고 있지만
그 전율로 피 뜨거워져 흰 꽃송이 보오얗게 피어난들
탈을 쓴 것 같다고 웃지나 않을는지
장미 목련 라일락 진달래…… 수런수런
수없이 피었다 지는 봄 꽃밭 저 꽃들 속으로
건너갈 수 없는 가을 꽃 국화 한 송이
해 바뀔 적마다 저, 저쪽으로 고개 숙이는 누님꽃, 국화 한 송이
슬퍼도 비극을 노래할 줄 모르던
흔들려도 풍파를 건너뛸 줄 모르던 시절
내 속에 숨어 있는 내 얼굴을 나보다 더 잘 아는
꽃 한 송이 내 속으로 들어와
나, 제쳐두고 불러야 할 노래부르게 하더니

--- p.25

삼경에 미애와 나는
전나무 숲에서 취산의 대금 소리를 듣느다.
삼십 년이 흘렀어도 아직 맘에 맞는 소리를
못 낸다는 취산 그리고
살금살금 천왕문을 빠져나와
반딧불이라도 눈붙여서
숨어 있는 진리 좇고 있는 또 한 사람

못난 사람끼리의 그릇 깨지는 소리만 들려준다.
세상 공부 비웃지 마라
세상 공부 배불러야 사바세계도 서방정토도 기웃거리는 법
절은 있어도 스님은 없는데
무심해지고 싶어 실비 타고 왔는데
산에도 그리움이 있어
산 그리움과 내 그리움이 대금 소리에 엉켜 밀고 당긴다.
억억, 말이 되지 못한 소리로
문장이 될 수 없는 형태로 숲을 떠돌다가
숲의 정령이 되어
또르륵또르륵 숲을 흔든다.
소리가 되고 문장이 되어 퍼진다.
현실 해탈도 다음 생도 두려운 전나무들은
내가 피운 한 개비 담배 연기처럼
없을 無만, 없을 無만
공중 가득히 퍼져나가게 한다

--- p.72

내 작은 심연에는
은조기 한 떼가 꽁꽁, 무더기 무더기
얼은 채로 살고 있다
우리네 사는 일 아무리 쓸쓸해도
그리운 사람에게 마음 한 조각 전하고 싶은 날
햇살 넘쳐흐르는 소쿠리 옆에 서서 모믈 녹인다
빨갛게 달구어진 얼굴로 문지방을 들어서면
방바닥 가득 풀려나오는 은조기떼
오늘은 그 중의 한 마리가
눈 오는 나르이 삽살개처럼 지느러미 흔들더니
고운 노랑나비 되어 폴짝
외로운 내 창틀에 앉아
식구처럼 앉아
턱을 고인다

--- p.42

나,
이런 길을 만날 수 있다면
이 길을 손 잡고 가고 싶은 사람이 있네
먼지 한 톨 소음 한 점 없어 보이는 이 길을 따라 걷다보면
나도 그도 정갈한 영혼을 지닐 것 같아
이 길을 오고 가는 사람들처럼
이 길을 오고 가는 자동차의 탄력처럼
나 아직도 갈 곳이 있고 가서 씨뿌릴 여유가 있어
튀어오르거나 스며들 힘과 여운이 있어
나 이 길을 따라 쭉욱 가서
이 길의 첫무늬가 보일락말락한
그렇게 아득한 끄트머리쯤의 집을 세내어 살고 싶네
아직은 낯이 설어
수십 번 손바닥을 오므리고 펴는 사이
수십 번 눈을 감았다가 뜨는 사이
그 집의 뒤켠엔 나무가 있고 새가 있고 꽃이 있네
절망이 사철 내내 내 몸을 적셔도
햇살을 아끼어 잎을 틔우고
뼈만 남은 내 마음에 다시 살이 오르면
그 마음 둥글게 말아 둥그런 얼굴 하나 빚겠네
그 건너편에 물론 강물이 흐르네.
그 강물 속 깊고 깊은 곳에 내 말 한마디
이 집에 세들어 사는 동안만이라도
나… 처음… 사랑할… 때… 처럼… 그렇게…
내 말은 말이 되지 못하고 흘러가버리면
내가 내 몸을 폭풍처럼 흔들면서
내가 나를 가루처럼 흩어지게 하면서
나, 그 한마디 말이 되어보겠네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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