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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제1부 회전문 - 11 구름 안부 - 12 버찌가 까맣게 톡톡 - 14 놓을 - 15 꽃을 사러 가 - 18 모란을 그대에게 보여 주려고 - 20 파프리카 - 22 국수역에 가면 - 24 바다의 설법 - 26 빌린 이야기 - 28 턱 - 30 안개 - 32 봄이 오면 종로경찰서로 간다 - 34 갈라파고스 해변에서 - 36 제2부 시선 - 41 페르시아 양탄자 정원 - 42 Esthesia - 44 말 - 46 다정한 사람 - 48 dog’s ear - 50 영화 한 장면, 훗날 차용하겠습니다 - 52 우주팽창론 - 54 Etude - 56 타투 - 58 동어반복 - 60 슈베르트는 내게 안전하지 못하다 - 62 박쥐 자르기 - 63 제3부 내 사랑은 택배로 왔다 - 67 향유 - 68 궁평항 무인카페―Genofa - 70 머리 위에 녹차 향 바람이 분다 - 72 자장자장 해님 달님 - 74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 - 76 토끼몰이 - 78 소금 호수 - 80 아내를 위하여 - 82 모딜리아니의 방 - 83 돌 - 86 양파를 까고 있는 것일까 - 88 내 이름은 필로멜라! - 90 제4부 독립문 횡단보도에서 - 95 시접 - 96 사과를 왜 북극에 갖다 놓았나요? - 98 장국영, 영화 세 편을 본 날 - 99 허구의 힘 - 100 크로와상 - 102 행간 - 104 샌드아트 - 105 거미의 비행 - 108 날마다 공룡놀이터로 간다 - 110 소금 - 112 풍선인간 - 114 조약돌이 웃고 있네 - 116 풍난이 피다 - 118 해설 박동억_ 사랑과 예술적 실존 사이에서 - 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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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태우기 위해 꽃을 사러 가네
태우다가 간혹 꽃의 유령을 만나기를 바라면서 유령을 만나러 가는 길은 여러 단계가 있어 몸을 그림자로 바꿔야 해 어떤 꽃을 만날까 프리지어를 고를까 장미가 나을까 꽃들을 나열하는 일도 즐거운 일이지 꽃잎이 마르는 중에도 소곤소곤 수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한 잎 두 잎 모두 바람으로 흩어지기 전 붙잡아 두려고 날짜를 정해 꽃을 사러 가 마른 영혼에는 어떤 냄새가 나는지 꽃의 유령을 달래다 악몽을 꿀지도 몰라 태울 꽃을 주세요 말하고 싶은 걸 애써 누르며 낯선 화원 주인 앞에서 그림자를 내려놓지 않아도 될 거야 향과 색깔을 어느 기억 속에 넣을까 꽃이 야위어 가는 대기 속에서 드라이플라워라고 웅얼거리면 기타 튕기는 소리가 나 꽃을 만나러 갈 준비를 해야지 아무리 먼 곳일지라도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꽃에게로 가야지 ---「꽃을 사러 가」중에서 하루 종일 나비 한 마리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인사동 어느 전시관에서 나비 그림을 보고 홍보용 엽서 한 장 손에 쥐고 나온 것뿐인데 머리 위에 앉았다가 어깨 위로 마침내 손등에 나비는 멀고 가까워짐을 반복하고 있었다 잡으려 손을 뻗으면 멀리 달아나는 나비 한 마리 내 곁에 오게 하기 위해 손짓도 눈길도 주지 않고 숨죽이던 순간이 있었다 나비를 향한 사랑은 내 맘에 따라 귀찮은 모기가 되었다가 산비둘기나 부엉이가 되기도 했다 다른 것에 몰두하고 있을 땐 그 나비는 죽은 나비가 되는 것이다 종이 한 장 속 나비를 사랑했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바라볼 때만 나비는 살아 있다 너와 나 사이 팔랑팔랑 일렁이던, 미미한 바람을 일으켜 주던 날갯짓은 태양이 배회하던 오후의 보호색 미래를 얼리고 달아나는 한 잎 두 잎 바람들 저기 흙내음 나는 언덕 위에 앉아 보라고 여름 태양 빛 아래 한 송이 꽃이 어깨에 스며들었다 멀리서 태양이 걸어 들어오고 당신이 찰랑거리고 또 찰랑거리고 ---「향유」중에서 가는 것과 잠이 든 것은 어떻게 구분되는 것일까 빛이 더 이상 들어가지 않는 경계, 명암이 되어 버린 장롱이 담벼락에서 조는 시간 원목 장롱문을 여니 추억이 기울어져 있다 신발을 보관하는 방법을 알려 주기라도 한 것처럼 수십 켤레의 구두가 층층이 쌓여 있다 단조롭게 주목받는 짧은 무엇, 마치 헤어지기 좋은 시간을 마련하려던 것처럼 떠날 때 정리할 사람이 없었을까 알 수 없는 아이러니가 장롱문을 통해 흘러나왔다 자신이 버려진 줄 모르고 길옆 꽃 한 송이가 별빛과 연결되듯 머무는 곳에서 언어가 되살아난다 나니아로 가는 관문, 우주의 힘이 낯선 생명들과 연결되어 어리고 나이 든 신발들이 빛을 받고 있다 모든 것은 헛것이고 허깨비라는 듯 세상의 발 아무리 많아도 신을 수 없는 날개 달린 헤르메스의 신들 빛의 윤곽이 회반죽 되어 가는 과정에서 귀밑 구부러진 징후가 고요하게 읽힌다 구두코가 햇빛이 너무 밝다고 말한다 아는 걸 모른다고 말한다 꽃을 피운 길들을 잊었다고 말한다 이 세상에 오기 전의 세상이라고 말한다 아름다운 것은 눈물 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세상의 것들과 연결된 것들은 모두 나약하다 우리를 품어 안은 우주는 쓸쓸한 영혼에 편들고 싶어 할 것이다 떠돌아다니는 것 이미 엎질러져 흘러가는 것 휘감겨 목적을 상실한 것 추억을 향하다가 그것 또한 아무것도 아니게 사라져 가는, 네게로 가는 길은 이토록 어려웠다 낮달 하나가 나를 부르는 깊은 겨울날의 명령 *Esthesia: 미학적인 마음. ---「Esthesia」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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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사라지는 것을 사랑한다 지워지는 것을 사랑한다 불타는 소멸 빛처럼 신을 향한 노래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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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인가 이미 오래전에 나는 장수라 시인의 불타는 듯한 시 세계를 알아 버렸다. 그때 언젠가 이 시인은 잠깐 담갔던 발가락으로 온통 강물이 출렁거리는 청둥오리 같은 시인이 될 거라는 예감이 있었다. 이번 시집에서 내 예감은 적중했다. 「꽃을 사러 가」에서 장수라는, 꽃을 태우기 위해 꽃을 사고 꽃을 사기 위해 자기 몸을 그림자로 바꿀 수 있는, 바싹 마른 영혼으로 태울 꽃을 사려는 그는 이미 불타는 시인이 되어 있었다. 「바다의 설법」에서 “이 물을 다 마셔 버릴 거야”라고 외치는 당돌한 설법은 어느 자리에선가 만나서 시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느꼈던 충격 그대로였다. 「봄이 오면 종로경찰서로 간다」 「시선」 「Esthesia」 「놓을」 「타투」 「허구의 힘」 「풍난이 피다」 「향유」 등은 시를 읽는 동안 장수라 시인의 무엇인가 만만치 않은 겹으로 된 시 세계를 더 알게 해 주었다. 이런 시 세계를 충실히 유지해 오면서 14년 만에 시집을 출간하는 시인은 앞으로도 많은 것을 불러낼 시인일 것이다. - 최문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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