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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마량에 가다
마량에 가다·12 어느 소아병동에서·14 열려라, 참깨·16 대흥사 동백·17 겨울, 김유정역·18 숲으로·20 고무줄놀이·21 작은댁 할머니·22 겨울을 요리하다·24 붉은 바람이·26 생일도生日島·28 어느 가을, 고성사·30 에두아르 레옹 고르테스 그림 속으로·32 철새는 날아가고·34 장롱 안의 사랑·35 엄마 생각·36 우항리에서·38 간이 정류장·40 2부 강진만 갈대밭 강진만 갈대밭·44 다시 석류꽃은 피고·45 살구나무 그녀·46 정석丁石을 읽다·47 구강포 장터·48 비래도飛來島·49 갈대·50 가우도·51 박꽃·52 새해·53 넝쿨장미·54 곡우穀雨·55 모란의 집·56 홍시·57 산댓잎 흔들리는·58 봄은·59 들개·60 3부 빈집 어머니·62 밀죽의 전설·63 빈집·64 살구·66 설야雪夜·68 요양병원에서·69 늦서리 몰고 온 너·70 일 포스티노·72 하의도·74 늙어가는 사랑·75 가을·76 활·77 골목길·78 한정식·80 애저녁에·81 미자·82 KBS 가요무대·83 4부 눈길 까치·86 찔레꽃·87 풍금이 있던 자리·88 그리운 할머니·90 사월·91 우리 동네 노총각·92 1974년 5월·94 사의재四宜齋에서·96 소·98 땅끝에 선 연인·99 곡예사·100 그녀는 연보라색을 좋아하셨어요·102 수채화 역·103 별·104 오월의 길목·105 눈길·106 해설 | 박성민_순수와 진실을 갈망하는 인간 회복의 꿈·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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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량*에 가다
마량……. 너를 부르면 말머리 닮은 마을에 밤새 정박했던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연필에 침 발라 쭉 그은 수평선 비릿한 지느러미 쏟아내며 포구에 몰려드는 바다 등 푸른 슬픔이 펄떡이면 그 위에 굵은 소금 던져주는 아침 끝없이 끝없이 부서지는 파도 눈썹 같은 해안선에서 생계의 그물을 깁는 아낙 물살이 고단한 항해를 멈추고 설핏 노루잠을 자는 곳 목울대에 차오른 설움 저물녘 생채기가 붉게 터지고 원시遠視의 눈빛을 뿌리는 등대 마량……. 너를 부르면 오랜 언약처럼 속눈썹이 젖어 간절해지는 이름 하나 * 마량(馬良): 전남 강진군 마량면 --- 「1부, 마량에 가다」 중에서 물컵 속 감자에서는 싹이 돋아나고 있다 엄마는 입술이 바싹 타들어 가고 피 말리는 한숨을 토해낸다 아기를 두 팔로 껴안아 보지만 안을수록 경직된 아기의 몸 얼굴에서는 신열의 꽃들이 피어나고 일그러진 어둠이 아기를 사육하고 있다 다리를 접고 펴고 매일 척추 세워주며 사무치게 기도한다 겨울나무처럼 자음들을 모두 떨구어내고 모음만을 스산하게 발음하는 엄마는 다시 산통하고 싶다고 링거의 긴 줄처럼 기도가 길어진다 속눈썹이 긴 아이 눈이 파르르 떨다 새근거린다 잠시 잠들었나 보다 아이의 입가에 오랜만의 미소가 보인다 풀밭에서 뛰어노는 꿈을 꾸고 있는지 병실 문으로 선물처럼 수액을 든 간호사들이 들어온다 크리스마스이브다 --- 「1부, 어느 소아병동에서」 중에서 장마철 축축한 바람을 걷어내며 새벽잠 덜 깬 초여름이 피어난다 물드는 노을을 뒤로 한 채 조개 잡는 아낙네들 머리에 광주리 하나씩을 이고 까르르 까르르 웃음소리 쏟아지는 저녁 깻대에 층층이 매달린 열매처럼 줄지어 밭둑길을 걸어간다 날마다 깨가 쏟아진다는 새색시가 연분홍 볼을 붉히며 뒤따르고 동네 개들 짖는 소리와 함께 목젖을 내놓고 웃는 아낙들 초저녁 달빛이 고소한 참기름 한 방울까지 짜내고 있다 --- 「1부, 열려라, 참깨」 중에서 두륜산에 낮게 엎드린 운무가 산문으로 흘러든다 연둣빛 이파리마다 염주알로 맺힌 새벽이슬 동백은 몇천 년 전 아득한 전생으로 가지를 뻗어 동박새 한 마리 울음소리를 날려 보낸다 범종 소리에 온몸의 불을 켜는 천년의 고찰, 대흥사 동백 머언 허공으로 색色이 흩어진다 --- 「1부, 대흥사 동백」 중에서 수수 울타리 사이에 허기진 저녁이 차오른다 박녹주를 사랑한다던 한 사내의 충혈된 눈 같은 하늘이 울컥 각혈을 토한 듯 점점 붉어지고 멀리서 들리는 기적 소리에 생각났다는 듯이 흩날리는 눈발 발목이 가는 새 몇 마리가 야윈 나뭇가지를 흔들며 날아가고 서로의 허무를 확인하며 개찰구를 나서 떠나간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고 나 홀로 여기 앉아 철로처럼 속울음 키울 때면 눈물을 그러안는 침목들의 한 세월 상심한 계절이 또 지나가고 역의 그림자가?점점 더 길어지고 있었다? --- 「1부, 겨울, 김유정역」 중에서 초록 심장을 가진 나무들은 어떤 색의 피가 흐를까 삭정이 툭, 부러지는 소리 창백한 내 전생의 한때가 만져지면 나뭇잎마다 맺힌 눈물 유리창에 번지다 사라지는 입김 같은 이승의 아침 뿌리부터 길어 올린 울음을 나이테에 새기고 푸릇푸릇 돋아나는 꽃 더미 가난할수록 더욱 무성해지는 내 마음속 숲으로 바람이 불어온다 --- 「1부, 숲으로」 중에서 가리약머리, 맘보머리 가래로 딴 머리, 가르마 탄 단발머리 바람에 배어 나온 봄 향기로 해맑은 웃음소리가 분장한다 고무신에 발 바꿔가며 고무줄 넘기에 즐거움으로 배 불렸던 향토 흙먼지가 짧은 치마에 엉키어 춤을 추고 하늘은 푸르고 푸른데 놀이의 합창 소리로 계절에 활짝 핀 작은 장다리꽃 같은 계집애들 종달새 노래 듣고 봄 나비 한 쌍 팔랑팔랑 춤을 추는 봄 나비 한 쌍 까마득한 어린 날 슬프고도 가난한 사람들이 서로 도와가며 모여 살던 집성촌 --- 「1부, 고무줄놀이」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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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와 진실을 갈망하는 인간 회복의 꿈
- 박성민(시인) 자아와 세계의 본질을 투시하는 사유 황형자 시인은 2019년 『해남문학』 신인상에 당선된 후 2020년 『시조시학』에 시조로, 그리고 2023년 『문학청춘』에 시로 등단하여 치열하게 시작(詩作)하고 있는 시인이다. 고향인 강진의 아름다운 자연 풍광과 어우러진 사람들의 따스한 정에 대한 기억,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한 시·공간적 기록이라고 볼 수 있는 이번 첫 시집은 인간과 자연과의 공감,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함께 그것들을 지금 이 자리로 호명하여 대모적(大母的) 감성으로 품고 다독거리는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 시집의 특성은 시와 시조가 함께 실린 시집이라는 점이다. 전체 4부로 구성된 시집에서 1부, 3부, 4부는 시, 2부에서는 현대시조만을 모았다. 현대시조는 사유의 집약성과 언어의 응축성이 돋보인다. 황형자 시인은 3장 6구 12음보라는 시조의 기본 골격 안에서 배행과 배연을 자유롭고 비약적으로 함으로써 삶의 외로움이나 그리움을 통찰하고 강진의 자연물과 사람들을 형상화하고 있다. 황 시인은 전통적으로 시조가 지켜온 3장의 형태적인 정형성을 여러 방식으로 변형시키면서 시적 형식의 긴장과 이완을 실험하기도 한다. 특히 단시조가 추구해온 시적 주제의 압축, 긴장과 함께 정형의 틀 안에서 시적 의미를 심화하고 확대하려는 시적 전략을 보여주고 있다. 황형자 시인의 시편은 고향 강진에 대한 따스한 기억, 바다와 섬을 보며 자란 존재들이 잉태한 욕망과 좌절의 존재론적 고독을 형상화하고 있으며 이는 강진의 역사에 대한 비망록이라는 의미망을 형성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자연 사물을 통한 자아 성찰은 물론 문명 비판적 시선을 견지한 시편에서는 생태시의 가능성까지 타진해 볼 수 있다. 가슴 밑바닥에서 솟는 정한이 오롯하게 곰삭아 있는 황형자 시인의 시 세계를 살펴보겠다. 고향 강진, 가슴 저리고 따스한 기억들 지나간 시대의 삶은 회상, 혹은 환기라고 하는 기억 기제를 거쳐 시인의 언어로 재현된다. 황형자 시인의 시는 유년부터 성장기를 거쳐 중년에 이르기까지 고향에서의 가난하고 힘겨웠지만 따스했던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면서 그것과 화해하거나 치유하기 위한 글쓰기로 볼 수 있다. 개인의 기억에 관한 문제는 공동체적 기억이나 정체성과도 직접 관련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그것이 작품 속에서 어떻게 형상화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중요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신작로 따라 모퉁이 들어서니 울 넘은 호박꽃 순한 얼굴 내밀고 토담의 거친 손 유년이 서 있다 푸르스레한 저녁이 몰려오면 아궁이에 쪼그리고 앉은 어린 동생들 허기진 졸음에 자꾸 꾸벅거리고……. 어머니는 늦은 저녁을 굽는다 멸치육수에 호박 된장국 끓여주시던 날이면 배가 따뜻하고 온몸이 포근한 가족 찌든 땀 훔쳐가며 일하던 엄마는 일 년 내내 밭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지 어쩌다 한번 엄마가 분홍립스틱 바르는 날이면 내 유년은 행복했어라 거미줄은 빈집을 쉼 없이 다독거리고 호박꽃은 흑백의 필름 속 유년을 보듬어 보는데 -?빈집? 전문 이제는 빈집이 되어버린 어린 시절 화자의 ‘집’은 그리움과 동경의 낭만적 대상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늦은 저녁때가 되어서야 어머니가 멸치육수에 호박 된장국을 끓여줄 때까지 “허기진 졸음에 자꾸 꾸벅거리”면서 “아궁이에 쪼그리고 앉은 어린 동생들”을 다독거리며 배고픔을 참아야 했던 처절한 가난과 고통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고향 공간은 일 년 내내 밭에서 일하다가 어쩌다 한번 “분홍립스틱 바르”고 외출하는 어머니에게도 힘겨운 생존의 공간이었으리라. 그래도 “배가 따뜻하고 온몸이 포근한 가족” 속에서 자란 화자는 “내 유년은 행복했어라”라고 말하면서 이제는 쇠락해버린 옛집을 보며 “흑백의 필름 속/유년”을 더듬는다. 이 시는 자신의 과거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옛집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시인이 어린 시절 가난하고 외로웠던 기억을 은폐하고 고향의 옛집을 이상적 공간으로 설정하는 까닭은, 옛집을 떠난 삶이 힘겹고 각박하기 때문이다. 옛집에서의 삶이 보릿고개를 견뎌야 했던 우리네 1960년대 사람들의 삶과 달리 낭만적일 리가 없지만,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과거 유년의 옛집을 이상적 공간으로 재구성하려는 무의식적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프로이트가 말한 ‘은폐기억’(隱蔽記憶)’으로 볼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불안을 해소하려고 현실에서 어떤 상징적 질서를 찾으려 무의식적으로 노력한다. 그런데 이런 노력이 실패했을 때 인간은 ‘행복했던 과거’를 먼저 떠올린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같은 무의식이 플라세보 효과(Placebo effect)를 나타낸다는 점이다. 어린 시절 기억을 소급해서 재구성하는 동안 황형자 시인의 유년기는 가난했지만 아름다운 ‘옛집’이라는 상징적 공간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공간성은 요양병원에서 “축 늘어진 흰 장미로 임종을 맞아 누워 있”는 어머니(?요양병원에서?), “꽃잎이 꽃불처럼 분분히 휘날리는” 초등학교 교정에서 “가슴 속에서 아직도 숨을 쉬는/아이들을 가만히 불러 보”는 행위(?풍금이 있던 자리?)로 이어지며 이는 ‘장롱’에서“갈래머리, 땡땡이 리본을 머리에 달고/빨간 책가방”을 맨 손녀의 사진을 꺼내 보며 회상에 잠기는 화자(?장롱 안 사랑?)의 모습에서도 여실히 형상화되고 있다. 시린 꿈의 숫눈을 밟고 온 길 이 시집의 맨 마지막에 수록된 다음 작품은 시인의 삶을 압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시집의 표제이기도 한 ?눈길?을 살펴보자. 숫눈을 밟는다 산기슭 쭈뼛쭈뼛 일어서는 바람 맞으며 마디 굵은 흉터 남긴 소나무처럼 시린 꿈의 우듬지가 자꾸 흔들리던 겨울 가장 추웠던 시절이 지나가고 내 생에서 막막했던 날들이 지나가고 나 여기까지는 걸어왔구나 새벽의 내재율이 내 몸을 감싼다 큰딸로 잠든 동생들 이불을 덮어주고 큰며느리가 되어 혼자서 울어야 했지 어떤 무늬도 일렁이지 못하고 입 다문 물병 속에선 푸른 물소리 출렁이는데 항상 파리한 낮달이 결빙된 하늘에 보이는 듯 안 보이는 듯 떠 있었지 숫눈이 나를 밟는다 꿈결처럼 나를 다녀간 이 길을 한번은 걸었던 것 같기도 하고 영영 처음 걷는 길인 것 같기도 한 미몽의 새벽이면 발자국이 내 생애를 밟는다 -?눈길? 전문 화자에게 ‘눈길’은 큰딸과 큰며느리로 살아온 생애의 통점, 그 트라우마를 의식의 표층으로 끌어들이는 공간이며 그것은 “시린 꿈의 우듬지가 자꾸 흔들리던 겨울”이라는 시간과 함께 존재한다. ‘숫눈’은 눈이 내려 쌓인 후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이다. 모두가 잠든 새벽에 내려서 쌓인다는 점에서 혼자 눈물을 삼켜야만 하는 큰딸과 큰며느리의 성정과 유사하다. 요즘은 많은 것이 변하고 있지만, 예전의 가족제도에서 ‘큰아들, 큰딸, 큰며느리’ 등 ‘큰~’자가 붙은 존재들은 다른 사람에 비해 더 무거운 기대감 속에서 심적 부담에 짓눌린 채 살아가야 했다. 이런 역할을 하나만 하기에도 버거운데, 화자는 살림 밑천이라고 부르던 ‘큰딸’에,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면서 다른 며느리들의 형님 노릇을 해야 하는 ‘큰며느리’의 역할까지 맡았으니 그 부담감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대식구들이 모이는 ‘명절’과 같은 전쟁을 한바탕 치르고 나면 큰며느리는 드러누울 수밖에 없을 정도로 정신적·육체적 힘겨움에 시달려야 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속울음을 삼키며 새벽녘에 숫눈을 밟는 정경은 이런 삶은 수용해야만 하는 화자의 모습이기도 하다. “가장 추웠던 시절”과 “생에서 막막했던 날들”을 지나 힘겹게도 ‘여기까지는’ 걸어왔음에 화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입 다문 물병”과 보이는 듯 안 보이는 듯 떠 있는 “파리한 낮달”은 큰딸, 큰며느리로 살아온 화자의 객관적 상관물이다. 하여 결말 부분의 “숫눈이 나를 밟는다”와 “발자국이 내 생애를 밟는다”라는 언사에는 철없는 동생들을 다독거려야 했던 큰딸, 혼자 속울음을 삼켜야 했던 큰며느리로 보낸 세월에 대한 자기연민이 스며 있다. 나지막하지만 흡입력 있는 황형자 시인의 시는 진정 우리가 무엇을 소망하고 살아가야 하는 길을 시인의 길로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강진의 자연환경과 삶, 그리고 자아와 세계를 둘러싼 시인의 진솔한 메시지들은 우리 시의 서정적 휴머니티라는 질감을 고양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의 말 원고지에 한 생애를 녹여 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다시 느끼게 되었다. 내 안에 가꾸고 가꾸었던 은유와 상징의 날들 내면에서만 들끓었던 기억과 한숨과 눈물을 차마 지울 수 없어 이 작은 시집에 담아본다. 외롭고 공허해도 늘 위로가 되어준 시 항상 곁에 있는 가족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커튼을 열고 보는 가을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환하다. - 2024년 시월 아침 강진에서 |